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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압해면의 전설 관리자 2006/3/2 6206


    압해면의 전설

    ◎ 동서리 벼락바위(압해면)
    압해면 동서리에서 서북쪽으로 1km 쯤 가면 바닷가에 크고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있으며 그 바위 옆에는 옹달샘이 있다. 어떤 처녀가 바다에서 조개를 줍고 있었는데 바닷가 산에서 나무를 하던 한 청년의 시선이 우연히 그녀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청년은 한눈에 처녀가 마음에 들었다. 처녀의 아름다움은 선녀의 모습인양 그 청년의 마음과 정신 모든 것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 청년은 움직일줄 모르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만일 저규수와 결혼할 수만 있다면 우리 둘이는 행복하게 될것이며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스러울 것만 같았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녀와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의 결심을 해버린 것이다.
    그너나 그녀는 모든 면에서 귀한 집댁 규수일 것만 같은데 천인 출신으로서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질 것인가 그것이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성이며 감천이고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의 뜻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처녀의 뒤를 미행했다.
    청년을 놀라게 한 것은 귀한집 처녀인줄 알았던 그녀가 초라한 집에서 혼자 쓸쓸하게 사는 처지임을 알았다.
    쳐녀가 다시 바다가로 가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때마침 어느날 바다에서 조개를 잡아 가지고 해는 서산에 넘어가고 어두어질 무렵 집으로 가고 있었다.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총각은 바위밑에 은신하고 있다가 처녀가 그 앞을 지나갈 때 덮석 껴안고 사랑을 고백했다.
    처녀는 완강히 반항하며 안된다고 뿌리쳤으나 힘센 총각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고 바가 오더니 벼락이 떨어져 두 사람은 흔적도 없이 죽어 없어져 버리고 벼락 맞은 바위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뚝 서 있었다.
    후일 사람들은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 역도의 전설 (압해면)
    임진왜란후 정승벼슬에 있던 사람이 죄를 지어 지금의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진도에서 죽고 그의 아들이 유배가 풀려 서울로 올라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역도로 표류하였는데 수일동안 송공리 해변에서 머무르면서 지금까지의 생활을 회상해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 한번 한탄하면서 모래벌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자기의 나아갈 바를 곰곰히 따져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에 머물며 순박한 농촌의 전원에 묻혀 조용하고 깨끗하게 일생을 마칠것인가 한양으로 올라가 자기 집안의 명예를 걸고 다시 재기의 길을 걸을 것인가를 헤아려 보다가 왕실을 둘러싼 당파간의 알력과 세력다툼 정의가 패하고 불의가 승리하는 사회인 당시의 한양임을 절실히 깨닫고 그는 그러한 사회가 자기의 체질내지 인생관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에서 살기를 결정하고 송공리 대촌에 그대로 정착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전주 이씨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이 분이 도착한 곳이라 해서 역도하고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 복룡 떡시루바위(압해면)
    옛날 한 장수가 살고 있었다.
    그 장수는 어려서부터 말타기를 좋아했고 언젠가는 큰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신념을 가진 장수이다.
    그러나 장수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말타기를 좋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 애가 글 공부를 잘하여 선비가 되어야 할텐데 위험한 말타기만을 좋아 하는구나"하며 항시 염려했다.
    장수는 반대하는 어머니의 눈을 피하여 기회있는 대로 열심히 말타기 연습을 했다.
    그는 밤시간을 많이 이용하였다.
    이것을 안 어머니께서는 말타는 것을 말리다 못해 아들과 시합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런 조건을 내 놓았다. 어머니는 3분 동안에 떡 한시루를 하고 아들은 같은 시간에 이 섬을 한바퀴 돌기로 하여 어머니가 지면 말 한 마리를 사주어 마음대로 말타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마을 들은 장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뻐했다.
    장수는 "이제야 내 마음대로 말타기를 하고무술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는구나 이제는 무술연마에 열중하여 사회악을 바로잡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보리라"하며 굳은 결심을 하였다.
    시합은 시작되었다. 갑자기 강풍이 일더니 장수는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떡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부엌에서 불을 때시던 어머니의 치마에 갑자기 불이 붙어 어머니와 떡시루가 고스란히 불에 타 돌로 변해 버렸다.
    장수는 잠깐사이에 섬을 한바퀴 돌고 기쁜 얼굴로 돌아왔다. 한데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어머니와 떡시루는 간데 없고 바위만이 남아 있지 않은가. 장수는 바위만인 떡시루 바위를 부등켜 안고 한동안 통곡을 했다.
    그리고 나서 말을 타고 주변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지쳐 쓰러져 죽었다 한다. 이 바위를 떡시루 바위라고 하며 지금도 이 바위에는 말발굽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하며 떡시루 바위는 복룡리 상도 농장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범 바위(압해면)
    옛날 가룡리에 어미호랑이와 새끼호랑이 네 마리가 의좋게 살고 있었다.
    어미호랑이는 밤마다 마을로 내려가 새끼들에게 줄 먹이를 구해 오곤 하였다. 가축이나 음식이 밤마다 없어지는 일은 부락으로서는 한시도 맘놓을 수 없는 불안한 일이었다.
    부락 사람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한 나머지 장정들을 동원 밤마다
    철저한 경비를 결정했다.
    장정들은 누구나 무엇이든 우리 부락을 해치는 것은 죽여 버리겠다는 굳은 결의로 지켰다.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 밤도 어미호랑이는 여전히 새끼들의 먹이를 구하고자 동리로 들어섰다. 이 호랑이를 본 동리 사람들은 저것이 이제까지 우리 부락을 해쳤구나 생각하니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그들은 갑자기 몰려 들어 몽둥이로 치고 불로 지지고 창으로 찌르고 하여 호랑이를 죽여 버렸다. 한편 새끼 호랑이들은 어미 호랑이가 오지 않자 배고픔과 어미를 보고 싶은 마음에서 마중을 나가게 되었다. 마중나온 시끼들은 어느 큰 바위에 이르러 어미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어미는 영영오지 않았다. 애타는 통곡도 아랑곳 없이 시간은 흐르고 결국 오지 않자 서로 부등켜 안고 통곡하다 그대로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범바위라 부르며 가룡리 구 금기 앞산에 절벽처럼 우뚝 솟아 있다.

    ◎ 세천 벼락바위(압해면)
    압해면의 명산 홀매산을 돌아가면 복룡리 입구의 역할을 하는 세천 부락이 보이고 부락뒤에 두동강이가 난 큰 바위가 있다.
    어느날 한 감장수가 행상을 하는데 온종일 복룡리를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감을 팔았다.
    그러나 가지고 온 감을 다 팔기도 전에 해는 서선(홀매산)에 넘어갈 무렵이므로 할 수 없이 식구들의 밥짓기, 어린아이 젖먹이는 일 등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집안 일을 처리해야 하는 아낙네의 의무를 한시바삐 해야겠다는 심사로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는데 시간이 급한 중에 더욱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급하게 된 용변이었다. 하는 수 없이 큰 바위 뒤에 은신하여 급시 용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이 일더니 갑자기 바람과 함께 번개와 천둥소리가 진동하며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뇌성 소리와 함께 떨어진 벼락이 바위를 두동강으로 만들었고 그 자리에 감장수는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도 두쪽으로 갈라진 바위가 있고 바위산에선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효지 굴박산(압해면)
    복룡리 중촌에서 바로보이는 곳에 효지라는 섬이 있고 이 섬을 이루고 있는 산을 굴박산이라 한다.
    이 섬에 사이좋게 행복하게 사는 세식구가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 걱정이었다. 그날도 식구들이 모여 먹을 것 걱정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겁이난 식구들은 도망쳤으나 구렁이는 계속 추격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멈추어 구렁이가 하는 대로 두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구렁이는 입에 물고 있던 먹이를 사람들 앞에 놓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었다.
    식구들은 구렁이를 눈물겹도록 고맙게 생각하였다. 구렁이는 매일같이먹이를 가져다 주었다.
    구렁이는 굴에서 살면서 이 섬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착한 일을 하곤 했다. 착한 구렁이는 이 섬에서 먼 바다를 헤엄쳐 이들의 먹이를 구해다 주었다.
    그러나 구렁이가 결국은 병들어 죽게 되어 사람들은 구렁이를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 곱게 장사지내 주었다.
    후세 사람들은 죽은 구렁이의 혼이 영원히 이 섬을 보호하기 때문에 잘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지금도 굴박산 봉우리에서 약간 내려 가면 꼬불꼬불 이상 야릇하게 생긴 굴이 있다. 이 굴이 바로 착한 구렁이의 굴이라 전해오고 있다.

    ◎ 덕석할미의 전설(압해면)
    가난한 한 가정이 있었는데 어찌나 곤란한지 매일 바다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해와야 했다.
    그날은 햇빛도 있고 따뜻하여 늙은 할머니가 구차한 생활이라 옷도 못해 입고 멍석(덕석)을 두루고 굴을 채취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ㄹ이 어두워 지더니 추위가 몰려오는 것이어다. 그렇지만 굴을 채취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생각에 추위를 참고 견디어야 했다.
    그러나 추위는 할머니의 사정도 아랑곳 없이 계속되었다.
    할머니는 일어 설려고 했으나 이미 몸이 굳어 결국 얼어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날 (음력 2월8일)이 되면 꼭 추위가 온다고 전해오고 있다.

    ◎압해면의 기씨
    옛날 기씨들이 가룡리 무학동에 살았다 한다.
    기씨 선조의 묘가 복용리 2호 저수지 왼편 쪽에 있었다.
    그런데 그 묘는 개나 말등 짐승의 놀이터가 되다 싶어 하여 짐승들이 그곳에서 놀며 장난도 하고 싸움도 하고 교미도 했다.
    이것을 보기 흉하게 생각한 기씨 후손들이 대책을 강구하고자 회합을 가졌다.
    이 묘를 이장하자는 측과 그대로 두자는 측이 팽팽히 대립되었으나 결국 이장하자는 측이 승리하여 지금의 무학동 뒷산에 이장하기로 합의를 보고 날을 정하여 묘를 팠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묘를 파자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김이 무럭무럭 나더니 묘속에서 말이 앞발을 끊고 뒷발을 들고 서있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묘속에서 학이 나와 무학동 뒷산 밑에 지어진 제각에다 똥을 싸고 날아가 버렸다 한다. 학의 똥이 떨어진 곳이 불바다가 되어 제각은 전소되었다. 제각 장소가 지금은 밭이 되었지만 그 자리를 파면 타자 남은 나무와 기왓장이 나온다.
    이 묘를 판후부터 기씨 자손들은 다 망해 버리고 그곳은 떠났다 한다. 지금도 몇몇 자손들이 와서 제사를 지내며 조상의 명복을 빌곤하다. 후세 사람들은 만일 이 묘를 파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묘에서 비호같은 훌륭한 말이 나왔을 것이고 이 말을 탈 수 있는 훌륭한 장수가 기씨 자손 중에서 나와 기씨은 흥했을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 가란리 목나리(압해면)
    옛날에 어느 한 도시가 해도를 편찬하기 위하여 열심히 물의 깊이를 측정하고 다녔다. 이곳저것 다니며 열심히 수심을 측정하며 목나리에 이르렀다. 목나리에서 수심을 측정하는데 바닷물이 점점 들기 시작하여 도사의 목이 넘도록 물이 들었다. 도사는 최선을 다하여 물을 헤치고 나오려 하였으나 바닷물에 휩쓸려 큰 뜻을 이루지 못한채 억울하게도 죽었다.
    이런 사연으로 이곳을 '목나리'라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 고이리 왕산의 전설(압해면)
    지금부터 약 900여년전 고려태조왕건의 작은 아버지인 왕망이란 사람이 있었다. 왕망은 후삼국 혼란시기의 평정과 왕건의 득세에 많은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왕건이 임금이 된 후 논공행상 당시 왕망의 공을 무시한듯하자 왕망은 임금의 전복을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산전에 기밀이 탄로나자 도망쳐 온곳이 지금의 押海古耳였다. 왕망은 이곳에 성을 쌓고 왕의 정치를 폈으며 언젠가는 고려왕실에 도전하기 위해 날마다 군사훈련과 세력확장, 군량미 비축 등 크게 활동했다. 군사훈련이 시작되면 성안에서 말달리는 소리며 호령소리가 천지를 진동했고 연기같은 먼지가 일대를 뒤덮었다 한다. 왕망은 고이도근해를 지나가던 상선이 나라의 국세를 싣고 가던 배를 잡아 식량과 돈(보석)을 빼앗었으며 선원들은 자기 부하로 만들었다. 붙잡은 배는 배시게라는 곳에 버리고 돈은 돈바위 밑에 감추었다.
    지금도 돈바위와 배시게(목포에서 지도방면 영신호 선착장)는 이 전설에 유래된 명칭들이다. 배를 버린 곳에는 (배시게) 지금도 잔재가 남아있으며 왕망은 큰 바위를 엎었다 뒤집었다 할 정도로 힘이 센 장사인지라 지팡이도 돌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 한다.
    세월이 몇 십년 흘렀다. 나라에서는 이 지방의 세금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긴 나머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왕망의 정체가 드러났다.
    조정에서는 왕망을 잡아오도록 명하니 많은 군사를 거느린 장수가 왕망을 공격했다. 왕망은 이 때를 위해 힘을 길렀기에 원한의 보복시기로 생각하고 질풍같이 호령하고 대항하니 관군은 일시 파죽시세로 수십명의 병졸을 잃으며 고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왕망의 병족들은 기력을 잃고 관군에 투항하거나 도망치고 죽었다.
    왕망은 다급하게 도망치다가 바위에 부딪쳐 넘어지니 돌지팡이까지 떨어 뜨린채 마구 도망했다.
    지금도 대촌부락 앞에 우둑선 바위가 왕망의 돌지팡이라는데 사람들은 지금도 왕망의 지팡이라 부른다.
    왕망은 계속 도주하여 강건너 무안군 망운면 두무치의 큰 바위를 떠들고 자기가 쓰던 인을 숨겨 두고(지금도 인바위라 부름) 더 이상 도주할 기력을 잃어 고시라는 곳에 이는 연못에 뛰어 들고 말았다.
    뒤를 쫓던 관군들은 연못의 물을 퍼냈으나 왕망의 흔적은 찾을길이 없고 다만 이상하게 생긴 자라 한 마리를 발견했을 뿐이다. 화가 난 장수는 왕망의 목을 얻지 못하고 자라의 목을 칼로 내려치니 이상하게도 자라목에서 흐른 피가 연못을 가득채웠다.
    지금도 연못의 물이 흐리다고 하여 이 지역에 왕무덤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 있다.
    왕망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가 살던 흔적은 지금도 1km 가 넘는 성과 집터가 남아 있으며 왕이 살았다하여 고이도 큰 산을 왕산이라 부르고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이곳에 제를 지냄으로써 풍년과 행운이 오고 병마를 막아낸다고 하여 부정없는 사람을 선발하여 제를 모셨다. 일제말 우리나라 지도에 이 섬을 왕도라 적혀 있었으나 현 고이도는 왕망군이 종적을 감춘 고시의 옛고자(古字)와 섬의 모양이 사람의 귀와 같다는 사실에서 귀이자(耳字)를 따서 고이도라 부리워졌다고 한다. 성터는 그대로 보호되어 新安郡의 천연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 뒤 왕성이라는 사람이 이조에 와서 체포되어 성평에서 처형되었는데 성평군내 '고이리'하는 마을에 옛 그사람의 고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 押海面 송장수
    압해면 송공리 바다 건너에 역도라는 산이있는데 옛날에는 송공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하루는 하늘에서 검정구름이 일고 햇빛이 사라지더니 우뢰와 같은 큰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큰 소리로 울부짖는 사람의 목소리가 압해도 전체에 메아리쳤고 이어서 말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이때 온 땅이 진동하고 바다에서는 물결이 눞이일어 역도산이 압해도에서 갈라졌다는 것이다. 사면이 조용해지자 위풍도 당당한 송장수가 커다란 돌지팡이와 활과 창을 들고 유유히 송공산으로 올라갔다. 송공산 끝에 모래 사장이 1km쯤 쳘쳐진다.
    이 모래사장가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이 굴이 송장군이 나오신 굴이라고 전한다.
    굴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역도라는 무인도의 섬이 있다.
    이 섬에서 송장수의 역마가 나왔다 해서 역도라 이름하였다 하다.
    그리하여 송장수는 역마에서 나온 역마를 타고 송공산에서 약 8마일쯤 되늠 매화도산을 왕래하면서 무술을 연마하게 되었다 한다.
    이로 인하여 지금도 비가 오려면 송공산과 매화도 산의 구름이 오가서 혼합되어야 비가 온다고 한다.
    이것은 송장수가 두 산을 왕래하면서 무술을 연마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지금 송장수의 지팡이가 서 있는 앞 밭에서 송장수가 군병훈련을 하여서 그 곳을 장바탕 이라하고 활 쏘던 것을 사창동(동촌소재) 과녁판을 보며 화살 줍던 곳을 불마등(서촌소재)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 중앙국민학교 동편 학교림에 죄수를 가두어 두던 토굴이 있는데 그 곳을 옥터라 한다. 지금도 허물어진 토굴의 흔적이 있다.
    신용리 1구에 있는 창마장은 송장수의 군병이 말먹이던 창고가 있던 곳이라 한다.
    대천리 1구 조천부락 윗쪽에 흙으로 성을 쌓고 말을 가둬 먹이던 곳을 마방(마장터) 이라 하는데 마방터의 넓이는 8km 정도였다 한다.
    군사가 주둔을 하고 있다가 군사가 죽으며 석곽을 만들어서 무기와 시체를 넣고 바윗돌로 덮어 지팡이를 꽂아서 표시를 했다한다. 송장수 지팡이는 압해면 사무소에서 송공리 쪽으로 1km쯤 가면 길옆 동서리 밭 648번지에 높이 4m 80cm 둘레 3m 15cm인 규모로 우뚝 솟아 보는이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송장수 지팡이가 서 있는 부근에 바윗돌이 수백 있어서 70∼80년 전에 동서리 다리 돌로 사용하고 50년 후에는 개뜨려 간척사업에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솜장수 지팡이와 바윗돌 1개만 남아 있는데 깨뜨린 바윗돌 1개만 석곽이 나왔고 거기서 신석기 시대에 사용하던 돌칼 1개와 화살촉 2개를 발굴했다.
    본관이 압해송씨 혹은 가락송씨는 송장수 후손이라 전하며 50∼60년전 까지도 가락부락에 2호가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하여 버리고 집을 헐어 버린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루는 문득 바다 한가운데서 흰 물거품이 이상하게 끊어 오르며
    바닷물이 하늘을 향하여 솟아 올아 바다가 하얗게 뒤집히더라는 것이다.
    송장수는 그이변에 대하여 관심이 커져 잠시도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송장수는 구렁이 두 마리가 바다 고기를 서로 잡아 먹으려고 싸움을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가 나서 활로 쏘고 칼로 쳐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를 죽여 벼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한 마리가 재빨리 도망쳐 매화도에 있는 제일 높은 산봉우리로 달아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송장수가 매화산으로 쫓아 올라가 보니 높은산 꼭대기에는 구렁이의 굴이 하나 있었다는 것이다. 굴속으로 몇 발자국 들어가 활을 마구 쏘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얼마동안 굴속에서 소란한 소리가 나더니 점점 조용해져 들어가보니 구렁이는 죽어 있었고 동굴속에는 고기가 가득차 있었다는 것이다.
    송장수는 얼마간 매화도에서 머무르다가 생활무대가 좁은데다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난 송공산이 그리워 다시 송공산으로 가기를 작정하고 온 힘을 다하여 힘껏 뛰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차하는 순간 힘의 균형이 맞지 않아 넘어지는 바람에 왼손을 지금의 하륭 뒤 새원안 바위에 집고 말았다는 것인데 이 바위에 다섯 손가락 자국이 박힌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하여 그 바위를 송장군 손바위라 전하다. 넘어지는 순간 송장수의 투구가 벗겨져 매화도에 떨어졌는데 지금의 장군봉이 그때에 벗겨진 송장군의 투구라는 것이다.
    송장수는 다시 일어나 또 뛰었으나 우거진 송공산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영원히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치명상을 입고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고 전하다. 죽는 순간 울부짖는 소리다 천지를 진동 했으며 태어날 때와 같은 하늘의 이변이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 도둑골의 전설(압해면)
    옛날에 송공산을 기점으로 도둑질을 하는 한무리가 있었다. 밤마다 산에서 내려와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죽이는 등 횡포를 자행했다. 동리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으며 이사가는 무리들도 많았다. 이에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회의를 열었다.
    그날 밤도 역시 도둑의 무리들은 마을을 습격하였다. 부락 주민들은 너 나할 것 없이 몽둥이와 돌맹이 농구를 들고 뛰어나가 도둑무리를 물리쳤다.
    그러나 역시 주민의 힘으로 완전 소탕할 힘이 부족하여 도둑 무리들의 만행은 역시 계속되었다. 하는 수 없이 송공리 사람들은 한곳으로 이거하여 집단부락을 형성하여 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지금의 송공리 대촌부락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한다.
    부락 사람들은 도둑을 완전 섬멸할 힘이 없어 부락안으로 도둑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경비를 하여 현상유지에 급급했다. 이때 이 부락에 귀양온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분들은 선량했으며 이 고장으르 자기 고향처럼 아끼고 사랑했다한다.이 부부는 궁리 끝에 물로써 도둑을 물리치기로 했다.
    그리하여 송공산 높은 곳에 기우제를 지내기로 했다. 처음에는 희생을 두려워한 몇몇 주민의 반대가 있었으나 이것이 우리들의 살 수 있는 공동 목표라는 것을 인식한 후에는 모두 찬동하였다. 날이 밝자 거사는 시작되었다.
    죽음을 각오한 부락민의 공격에 당황한 도둑들은 잠시 후퇴의 작전을 펴고 다른 곳으로 물러갔다. 선량한 부부는 모두들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정성껏 기우제를 드렸다. 얼마후 햇빛이 가려지더니 폭우가 무섭게 쏟아져 삽시간에 압해도 전체가 물바다가 되고 낮은산들
    까지도 다 침수 되었다. 송공산 봉우리만이 경우 물위에 솟아 있었다.
    물에 잠긴 만물은 생명을 잃었고 자기들의 근거지를 되찾고자 안간힘을 쓰던 무리도 죽어갔다.
    이 부부가 떠내려가는 시체를 산봉우리에 정성껏 묻어 주었더니 다시 날씨가 좋아지고 물이 마르기 시작하여 주민들은 평화로운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전설을 대변해 주듯 지금도 가뭄이 들면 소공산 봉우리에 불을 피우며 기우제를 지내곤 한다. 지금 송공산에는 도둑들의 집터와 우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 비비각시(압해면)
    옛날 압해도는 아름다운 하나의 나라였다 한다. 이 조그마한 나라에 왕이 계셨는데 이 왕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었다 하며 나라 일도 잘되어 가고 왕의 가족들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한다.
    이 평화로운 가정에 갑자기 암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항상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히 왕자를 돌봐주던 왕비가 병석에 눕게 된 일이다. 왕자도 왕도 정성을 다하여 왕비를 간호하였으나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어느날 자기의 생명이 다해가는 순간을 안 왕비는 왕자를 불러 "녀는 내가 정해 준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슬픔에 싸인 이 가정의 괴로움은 이루말 할 수 없었다.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다시한번 한탄했다. 왕도 왕자도 왕비의 유언에 따라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공주도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혼을 이루기로 약속했다.
    세월이 흘러 죽은 왕비를 잃게 된 왕은 자식이 넷있는 어여쁜 여인과 결혼하였다. 새 왕비는 왕이 있을 때는 왕자를 사랑하는척 하였으나 왕이 없을 때에는 매우 미워하였다. 자기 친자식에 비해 영리하고 잘생긴 왕자를 시기하다 미움으로 변하겨 결국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변해 버렸다.
    이러한 새 왕비가 왕자의 결혼을 순순히 응해 줄 리가 없었다. 더욱이나 아릿다운 공주를 보고 나서는 자기의 친자식에게 결혼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번 결심한 왕자와 공주의 사랑을 누구도 떼어 놓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공주의 마음을 변화 시키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결국 왕비는 최후수단로 요술할멈을 불러 왕자를 구렁이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을 안 공주의 마음은 어떠 했을까? 가슴이 에이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좋다. 비열한 것 같으니 구렁이면 어떻가?" 고 생각한 공주는 구렁이로 변신한 왕자와 결혼할 것을 결심했다.
    새 왕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구렁이가 된 왕자를 왕 몰래 바다로 쫓아 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이었으나 어머니의 명령에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효성 높은 왕자는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용왕님은 의로운 사람을 죽음의 구렁에서 건져 주셨다.
    공주도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순간 구렁이로 변신한 왕자는 공주를 구하여 조그마한 모래섬에 함께 있게 되었다. 공주는 밤낮으로 남편을 본래 모습의 왕자로만들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빌었다.
    그러던 어느날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이들을 태우고 하늘로 올라갔다한다.
    그후로 사람들은 이 모래섬을 비비각시라고 불렀다.
    비비각시란 이곳에서 공주가 밤낮으로 빌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하다. 모래섬은 복룡리 중촌과 송림 뒤 바다에 슬쓸하게 솟아 있다.
    또 다른 비비각시의 전설이 있다.
    얌전한 쳐녀가 외롭게 혼자 살고 있었는데 행상인 노인의 눈에 들어 행상인의 중매로 이곳 바보스럽고 우직한 사람이었으나 그런대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구박에 시집살이는 괴로운 나날이었다.
    시집가도 너무나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어 바다의 경험이 없는 각시를 바다로 보내 조개, 낙지 들을 잡아 오게 하였다. 어느 몹시 추운 날 바다로 게를 잡으로 갔었다. 한참 게를 잡고 있는데 어느덧 바다물이 밀려 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각시는 돌이 몇 개 모여있는 곳으로 빨리 갔다.
    바닷물은 각시가 서 있는 곳만을 남기고 온 바다에 가득차 머렸다.
    너무나 추운 각시는 견딜수가 없어서 온 몽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에서 각시를 생각하고 염려한 사람은 없었다. 신랑만이 애가 타도록 염려하였으나 집안 식구들의 눈치만 보느라고 가 볼 수가 없었다. 한참만에야 신랑이 그 곳을 찾아 가보니 각시가 이미 얼어 죽어있었다. 신랑은 앞이 캄캄했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며 각시가 불쌍해서 부등켜 안고 울다 같이 얼어 죽었다 한다. 장소는 비비각시 전설과 같은 곳이다. 지금도 들물일 때 이 섬은 물에 잠기지 않는다. 만일 비비각시가 물속에 잠긴는 날이면 이 압해도는 물바다가 된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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