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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안군의 우실과 장승․입석 신안문화원 2006/3/23 3755


    우실과 장승․입석

    1) 마을 공동체의 울타리, 우실

    우실은 마을을 보호하려는 울타리로서 지역에 따라 우실, 우술, 우슬, 마을 돌담, 돌담장, 당산거리, 방풍림, 방조림, 방파림, 사정(射亭 : 射場)나무터, 정자나무거리, 어유림(漁遊林), 어부림(漁付林), 노거수림(老巨樹林) 등으로 호칭한다. 우실의 본디말은 ‘울실’로서 마을의 울타리라는 자의(字意)를 가지고 있다. 울(울타리, 우리)의 어원은 둘레를 에워싸서 지킨다는 ‘위(圍)’의 뜻이 있고, ‘실’은 마을[村] 또는 곡[谷]의 고어로 집단주거지의 뜻을 지니고 있다. 울실이 우실로 통용되는 것은 치조음(齒槽音)인 ‘ㄹ’이 ‘ㅅ’ 앞에서 탈락된 음운변화현상이다.
    우실의 종류는, 마을 출입구의 허(虛)한 곳에 흙이나 돌담으로 축조하거나 수목으로 조성하는 ‘부분 우실’과 마을 주위를 전부 감싸는 ‘전체 우실’이 있다. 이러한 우실은 입도조(入島祖) 또는 고승(高僧)이나 옥황상제의 명(命 즉, 現夢)에 의해서 마을 공동 노작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울타리인 우실은 방조(防潮)와 방풍(防風)이라는 실용성 뿐만 아니라, 심성을 정화하고 정서를 순화하는 풍류성과 제의를 행제(行祭)하는 방액담(防厄垣)으로서 신앙성을 가지고 있다.
    신안지역의 대표적 우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우이도 진리(鎭里)의 서북쪽 고개 능선에 돌각담[石墻] 우실이 있다. 직선으로 축조된 외원과 내원이 엇갈려 갈지자(之)의 출입구를 하고 있다. 약 250여년 전에 문씨(文氏) 입도조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강한 하늬바람[西北風]과 뒷개에서 밀어닥친 모래와 해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외원은 길이 14m, 높이 1.7m-2m, 폭 1.5m, 내원은 길이 26m, 높이 1.7m-2m, 폭 1.5m이며, 내외석장간의 거리는 5m이다.
    (2) 암태면 송곡리 마을 입구에 돌각담 우실이 있다. 마을에서는 우실 또는 돌담이라 부른다. 두 직선의 돌담이 교합되는 지점에 윤선형(螺旋形)의 출입문이 있다. 1905년 마을 앞을 지나가던 스님이 마을의 번창과 우환을 막으려면 담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어 수목의 우실이 있던 좌우에 석장을 길게 축조했다고 전하며, 지금도 팽나무 3주가 돌담 속에 끼어 있다. 그 스님의 말처럼 이 우실의 축조로 재액과 북풍을 막고 흉산(凶山)이 보이지 않아 더욱 강녕하며 풍요롭게 되었다고 한다. 우측의 석담은 길이 42m, 높이 2m, 폭 1m~2.6m, 윤선형의 외만의 길이 5.1m이며 좌측의 석담은 길이 50m, 높이 2m, 하단폭 3m~4m, 상단폭 1m~1.5m, 좌․우 돌담간의 거리는 4m이다.

    (3) 암태도 북촌[益今] 우실골 마을의 뒤편 서남방에 내․외의 돌각담 우실과 20여 주의 노거수림의 우실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350여년 전에 알마도 오씨(吳氏)가 입도하여 익금 신석 일대를 돌아보고 안락한 주거생활을 위해 우실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내석장(內石檣)은 길이 30m, 높이 2.1m, 폭 1,9m이며 외석장은 길이 35m, 높이 2.1m, 폭 2m, 내외 석장간의 거리는 2.2m이다.

    (4) 장산도 도창리의 뒤편 도로변 긴 등성이에 350여 년 생인 팽나무 61주, 소나무 9주, 주엽나무 5주, 가중나무 5주, 예덕나무 3주 등이 400여m의 노거수림을 이루고 있다. 이 곳은 미곡 창고가 있었던 해변 선적지로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실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5) 지도읍 태천리 서북쪽 들판에 400여 년 생의 팽나무 12주, 멍구나무 15주와 350여 년 생의 동구나무 5주 등의 혼교림(混交林) 원형(圓形) 우실이 있다. 마을 앞 들판에 있는 이 우실은 해풍을 막아주고 마을을 은폐시켜 줄 뿐 아니라 마을의 주신(主神)을 모신 제당이 있는 신수림(神樹林)이다. 이 곳에 당할아버지, 당할머니, 팔방지신, 잡귀신을 모시고 음력 정월 3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6) 압해도 대벌리 반월마을 토담[土垣] 우실은 본래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지금은 마을 앞 동남쪽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동문 곁에 있는 팽나무는 당산목으로 정월 15일에 제사를 지냈으며, 그 위쪽에 있는 7개의 바위도 흙담신과 지신의 신체라고 여기고 제사를 드렸다. 마을 사람들은 북쪽에 있는 송림을 방풍림이라 부르고 흙담을 우실, 토성이라 호칭한다.

    2) 마을 공동체의 지킴이 : 장승․입석

    신안에는 현재 장승이 4기가 있고 입석은 7개 마을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 목록을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는 장승 4기를 모두 소개하고, 입석은 암태면 단고리의 ‘선돌’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지도읍 당촌리 후촌마을 장승

    후촌 마을에서 장도로 가는 마을 어귀에 2기의 장승이 90m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있다. 하나는 ‘할머니 장성’ 다른 하나는 ‘할아버지 장성’이라고 불린다. 할머니 장승은 높이 178cm, 둘레 122cm에 긴 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할머니 장승은 무표정의 얼굴이어서 무뚝뚝한 인상을 준다. 할아버지 장승은 높이 200cm, 둘레 127cm의 긴 장방형의 자연석에 얕은 선각의 수법으로 조각되었다. 할아버지 장승은 전체적으로 근엄하면서도 할머니 장승보다 인자한 느낌을 준다.
    이 장승들은 1917년에 세워진 것들이다. 원래 그 자리에는 목장승이 서 있었는데, 장승을 새로 세우지 않고 썩어가는 대로 방치하고 있다가, 이 무렵 4-5년간 마을에 사망, 가뭄, 흉년
    소재지
    명칭
    기수
    기능

    지도읍 당촌리 후촌
    할아버지장성
    할머니장성
    2
    액막이, 마을수호
    장승
    도초면 고란리
    천하대장군
    1
    액막이, 마을수호

    도초면 외남리 외상
    장성
    1
    마을비보, 祈子

    비금면 내월리 월포
    대장군[장성]
    1
    마을비보

    지도읍 자동리 자동
    입석
    1
    기자, 잡신․질병 방지

    지도읍 자동리 자서
    할아버지바위
    할머니바위
    2
    잡신․질병 방지

    지도읍 탄동리 탄동
    입석, 살맥이독
    3
    잡신․질병 방지
    입석
    암태면 단고리 단고
    산소등 선돌
    모태 선돌
    2
    잡신․질병 방지,
    마을수호

    암태면 송곡리 활목
    선돌
    1
    기자, 잡신․질병 방지

    암태면 와촌리 와촌
    선독
    1
    잡신․질병 방지

    압해면 동서리 도창
    선돌(송장군 지팡이)
    1
    송장군의 자취

    등의 액운이 연이어 발생하게 되자, 주민들은 그 원인이 장승을 세우지 않은 데에 있다고 보고 현재의 석장승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마을은 평안을 되찾았고 농사도 풍년을 누렸다고 전한다.

    (2) 도초면 고란리 장승

    고란(古蘭) 마을은 도초면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커다란 석장승 1기가 눈에 띈다. 마을 개천 건너 ‘장석거리’ 또는 ‘삼거리’라 불리는 곳에 이 장승이 서 있다. 크기는 높이 290cm, 폭 66cm, 후면 40cm이다. 형태는 머리에 약 30cm 높이의 갓모양의 모자를 쓰고 몸에 도포형의 긴 옷을 걸친 모습이다. 어깨에서부터 반듯이 내린 소맷자락 아래로 다섯 개의 손가락이 앙증맞게 펼쳐져 있다. 80cm 길이의 얼굴은 290cm의 장승 전체 크기에 비해 다소 긴 편이다. 커다란 타원형의 눈이 툭 튀어나와 있고, 좁은 양미간에서 길게 내려 온 삼각형 코는 두툼하며 투박한 느낌을 준다. 한편 얼굴 측면의 귀는 길고 두툼하게 이어 내려와 투박하면서도 일면 석가모니 귀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한편 입의 묘사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행인에게 위압감을 주려는 의도에서였는지 윗니와 아랫니를 드러낸 형상인데, 오히려 웃는 모습같이 보이기도 한다. 장승의 전체적인 인상은 일견 투박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듯하면서도 차츰 접할수록 오히려 포근하고 익살스러운 느낌을 준다. 몸에 새겨진 명문은 없고 뒷면에 건립년대(을축십삼년)가 새겨져 있다.
    고란 마을의 석장승은 ‘장석’ 또는 ‘벅수’라 불린다. 벅수의 가장 큰 기능은 액운과 살을 막아 주민을 보호하는 마을 수호의 기능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옛날 마을에 괴병이 번져 젊은이가 사망한 적이 있었고, 이 괴병 때문에 주민들이 심한 고난을 겪고 있을 때, 한 도승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앞에 장승을 세우면 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말을 받아 들여 주민 중에서 손재주가 있는 사람을 시켜 나무를 깍아 목장승을 세웠고, 그 후 목장승이 썩어 내려 앉을 때마다 다시 깍아 세워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자 1938년에 석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장승 뒷면에 건립년대가 새겨져 있는데, 본래 ‘소화십삽년’이라고 새겨져 있던 것을, 해방 후 일본 연호를 깍아 없애 버리고, 당시의 간지를 새겨 넣어 ‘을축십삼년’이라 고쳤다고 한다.
    고란리 장승의 관련 의례로 마을 공동 제사인 당제가 있다. 현재는 당제가 단절되었지만 과거에는 상당제와 하당제로 나뉘어 성대하게 지내던 제사였다. 제의 후에는 일종의 굿놀이인 죽마제(竹馬祭)를 지냈는데, 이 제의는 도초면 일대에 널리 알려져 인근 주민들이 구경하러 올 정도였다고 한다.

    (3) 도초면 외남리 외상마을 장승

    외상 마을의 어귀에 1기의 석장승이 있다. 이 장승은 1946년 11월에 세워졌는데, 당시 마을에 불상사가 발생하자 무당에게 물어본 즉 장승을 세우도록 권유했고, 또한 마을 앞에 있는 ‘진개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외상 마을의 기세를 가로막는 형국이기 때문에 그 기를 꺾고자 장승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외상 마을 석장승의 크기는 높이 240cm, 폭 45cm, 후면 25cm이다. 이 장승은 큰 갓의 모자를 쓰고 손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창을 잡고 있다. 긴 얼굴의 상부에 타원형의 눈이 있고, 눈동자는 박아 놓았던 구슬이 빠지고 그 자리가 패여 있다. 눈 위에는 갸름한 눈썹이 새겨져 있다. 코는 양눈 사이에서부터 직선으로 삼각코가 양각되어 있고, 입은 한일(一)자로 벌어져 치아가 모두 드러나 있다. 턱에는 수염을 달기 위해 여러 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전에는 이 곳에 머리카락을 달아 매어 수염의 형상을 갖추었다고 한다. 귀는 부처님 귀처럼 윗부분보다는 귓볼을 더 크게 하여서 축 늘어진 듯이 보인다. 목은 두텁게 하여 옷을 걸친 듯이 옷선을 표시한 반면, 가슴은 벌거벗은 듯하다. 또한 가슴 좌우로 사선을 7줄씩 음각하여 갈비뼈를 묘사한 듯이 보인다. 한편 남자 성기 모양이 옷자락 밑으로 나타나게끔 조각되어 있었는데 30여년 전에 마을 주민들이 보기 흉하다고 파냈다고 한다.

    (4) 신안 비금 월포마을 석장승

    월포(月浦) 마을은 비금면 소재지인 덕산리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4km 떨어져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에는 농경지에 연접하여 길게 마을길이 나 있다. 마을 어귀에서 이 길을 따라 약 70여m 걷다 보면 ‘사장거리’ 또는 ‘사장’이라 불리우는 공터가 나오는데, 이 공터의 한쪽에 화강암을 깍아 세운 장승 1기가 있다. 장승 전면 기단에 ‘대장군(大將軍)’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주민들은 이 명칭 외에 ‘장석’, ‘장성, ’장군‘이라고도 부른다.
    대장군의 크기는 높이 298cm, 폭 60cm로 대형 장승이다.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1.5m의 장검을 거머 쥐고 눈을 위로 치켜 떠 앞의 ‘숭애봉’을 주시하고 있다. 동그란 꼭대기에 이마를 질끈 동여맨 투구는 양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크고 둥근 얼굴의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눈에는 눈동자를 제외한 안면이 조작되어 있다. 투구의 앞 끝에서 바로 내려온 큰 코가 양각되어 있고 그 밑에 위․아래 입술이 음각된 입이 있다. 굳게 다물고 있는 입은 육중한 느낌을 더해 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얕은 선각(線刻)을 위주로 하였기에, 입체감이 덜한 느낌을 준다.
    제작년대는 명문 밑에 “단기 사이팔팔 을미년(檀紀 四二八八年 乙未年)”(1955년)이라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장승이 세워진 동기와 경위는 확실한 편이다. 건립 당시 풍수지리에 많은 지식을 갖고 있던 전남균 씨의 풍수적 해석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1950년대 어느 해, 마을의 젊은이가 많이 사망하는 액운이 겹치자, 전남균 씨는 그 원인이 마을 앞쪽에 흉한 ‘범아재비’ 형상을 하고 있는 선왕산(仙王山) 숭애봉의 세찬 기에 있다고 해석하고 그 기를 막아내는 방법으로 이 마을에 장승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목장승을 세웠다가 나중에 석장승으로 바꿔 세웠다고 한다. 장승의 재료가 된 돌은 선왕산에 있던 큰 바위를 떼어다가 썼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이 장승이 그 이름처럼 대장군이기에 능히 앞산의 기를 꺽어 살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장승과 관련된 의례로 ‘산제’가 있다. 월포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 자정에 ‘산제’ 또는 ‘당제’라고 불리는 마을 제사를 거행한다. 산당에서 산제를 지낸 후, 장승 앞에서 하당제를 지내는데 이 제의를 ‘장승제’라고 부른다. 장승제는 산제의 절차처럼 복잡하지는 않다. 먼저 장승 앞에 짚을 깔고 메, 과, 포 등의 제물을 진설한 후, 헌작, 재배, 구축을 하는 간단한 순서로 진행한다. 구축에서는 ‘마을에 재앙이 없게 해달라.’는 내용의 기원을 한다. 제관 외에는 아무도 당에 오를 수 없는 산제와는 달리 장승제에서는 주민 모두가 참석할 수 있다.

    (5) 암태면 단고리 단고마을 선돌

    장고마을에서 단고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산소등 선돌’(높이 131cm, 상폭 30cm, 하폭 40cm)이라 불리는 입석이 있다. 이 입석에는 인면(人面)이 조작되어 있는데 본래에는 없었으나 후대에 주민들이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서남쪽 외곽의 김만석씨 집 앞에도 입석이 하나 서 있다. 높이 142cm, 폭 35cm, 두께 30cm의 이 입석은 ‘모태선돌’이라 불린다. 이 2기의 입석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치 않고, 구전에 의하면 200여 년 전에 이 마을에 거주하던 어떤 노인이 산에서 돌을 져다 마을 앞에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70여 년 전까지는 마을에서 정월 보름에 이 입석에다 제사를 지내고 농악놀이 등을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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