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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안군의 당제 신안문화원 2006/3/23 6298


    당제

    1) 당제의 권역별 전승 양상

    당제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주민들의 안녕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공동제사다. 신안은 어느 지역보다도 당제가 많이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3년도에 출판된 최덕원의 『다도해의 당제』에 의하면, 신안군내 333개 운영마을에 당이 120개가 있고 전 마을의 36.3%가 당제를 지내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1987년도의 보고서(이종철․조경만, “신안지방의 민속자료”)에 의하면 현행 당제가 38개이고, 비현행 당제가 13개인 것으로 나타난다. 두 통계는 불과 4년의 시차인데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전자의 많은 숫자를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지만, 후자의 보고에 의하더라도 신안지방에 많은 당제가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이처럼 당제가 많이 전승되고 있는 것은, 바다를 배경으로 삶을 영위해 온 신안 사람들의 도서적 생활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거칠고 힘든 생활 환경이 당제를 필요로 했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전통적인 조건은, 최근 기계화된 어업이 보편화되고, 외래종교와 사고가 도입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당제의 전승도 위축되고 있는 형편이다.
    신안지역 당제의 분포는 크게 세 권역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연안도서권, 근해도서권, 원해도서권이 그것이다. 각 지역 당제를 당신(堂神)의 성별에 따라 여신(당할머니), 남신(당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연안도서권
    ꠆ꠏ 상당 - 당할머니
    ꠌꠏ 하당 - 당할아버지
    ② 근해도서권
    ꠆ꠏ 상당 - 당할머니, 당할아버지
    ꠌꠏ 하당 - 기타신(쥐신, 몽달귀신, 아들, 며느리, 용왕신 등)
    ③ 원해도서권
    ꠆ꠏ 상당 - 당할머니, 당할아버지, 총각, 각시, 산중처사, 상궁부인 등
    ꠌꠏ 하당 - 용왕신

    신안 도서지역의 당제에는 내륙에 비해 다양한 신격이 등장한다. 남도지방의 보편적 신격인 당산할아버지나 당산할머니 말고도 다른 명칭의 신이 많이 나타난다. 신안지역에는 두 신격 외에 상궁부인, 도령님, 쥐신, 소저, 총각, 용왕 등과 같은 신들이 추가되어 있다. 이 신들은 기존의 신들과 병행되어 섬겨지거나 기존신의 역할을 대신하여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제의 담당 집단의 생활 경험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민속신앙은 민중의 삶 속에서 생활의 표상이자 계기로서의 기능을 한다. 이러한 민속신앙의 어떤 부분이 약화․변형․소멸 등의 변화를 보인다는 것은 신앙 집단이 문화 변동이나 생활 변화를 겪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위의 권역별 변이 양상은 신안 사람들의 삶의 조건과 환경에 따라 조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원해 쪽으로 갈수록 용왕신에 대한 제의가 강화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지역 사람들의 삶에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바다의 의미를 헤아려 보게 해준다. 당제는 육지와 해안․도서에서 각각 그 양상을 달리 하는데, 그 중에서 용왕신에 대한 갯제가 병행되는 해안․도서 지역의 이중제의(二重祭儀)는 내륙과 다른 현상으로 설명된다. 도서 지역의 당제는 남자 제관들에 의해 치러지는 엄숙한 의례와 여자와 무당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적 의례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를 상당제, 후자를 하당제[갯제]라 부르는데, 이러한 이원적 당제의 구조는 도서지역 당제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연안도서권은 내륙지역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데, 특히 여성신의 우위적 성격은 비숫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호남지역 당제에서 일반적으로 섬겨지는 신은 당산할아버지[당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당할머니]이며, 이 중에서 특히 당할머니에 집중해 있는 신관(神觀)을 보여준다. 이것은 농경사회에서 차지하는 지모신(地母神)의 사회적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러한 육지부의 여성신 우위성이 연안도서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편 근해․원해도서권에서는 당할머니와 당할아버지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통합되어 섬겨지고 있다. 이처럼 당할아버지의 거처가 옮겨져 당할머니와 통합되어 있고, 제의에서의 비중도 약해져 있는 것은, 전통적 신관의 기본틀인 지모신 우위 신앙이 약화된 현상으로 보인다. 아직 당할머니와 당할아버지에 대한 관념이 그대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신격들이 선택되어 그들을 하당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원해도서권에서는 상당에 당할머니와 당할아버지가 함께 모셔지기도 하지만, 관계가 더 복잡해져서 하당에 용왕신이 모셔지고, 흑산도 진리와 수리에서는 그 용왕신이 상당의 당할머니와 부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는 소저아가씨와 도령님(진리), 소저와 총각(사리), 소저아기씨님과 별방도령님(영산도), 총각신(홍도 석촌리) 등과 같이 젊은 신들이 많이 등장한다. 또한 이들 젊은 대체신들은 신격이 보다 구체화되고 서로 짝을 이루는 등 일정한 변화의 지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신안의 당제는 권역별로 다른 전승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각 지역의 생활 조건에 걸맞게 당제의 구성 요소가 달라지고 그 의미도 다르게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만큼 당제가 주민들의 삶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도 당제의 가치와 의미를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

    2) 당제의 권역별 전승 사례

    이제 당제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보기로 하자. 여기서는 지면 관계로 각 권역별로 1군데씩의 사례를 소개하기로 한다. 지도읍 탄동리는 연안도서, 비금면 내월리는 근해도서, 흑산면 진리는 원해도서의 사례다.

    (1) 지도읍 탄동리 당제

    탄동1구는 섬 안의 마을이지만 바다와는 별 관계없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생활하는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당제를 모시고 있다. 당제를 모시는 곳은 마을 뒷산의 상당과 마을 앞 하당 그리고 ‘살맥이’ 입석(3기)이다. 제사의 전체 순서는 먼저 상당제를 지낸 후 하당제를 지내고 이어 ‘살맥이독’ 앞에 음식을 간단히 차려 놓는 순으로 진행된다.
    상당은 돌담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상당은 2번의 개축이 있었는데, 1980년 3월에 돌담만으로 된 당에 스레트 지붕을 얹어 당옥을 지었던 것이 첫 번째고, 7-8년 전에 다시 지붕을 없애고 돌담당으로 복원한 것이 두 번째 개축이었다. 지붕을 얹었던 이유는 정월달의 추운 바람과 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것을 헐고 돌담으로 복원한 것은 지붕을 얹어 당을 개축한 것이 마을에 해롭다고 하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당 안에는 높이 40cm, 30cm 크기의 입석이 모셔져 있다. 이 입석은 ‘당할머니’라고 지칭되는 당신(堂神)의 신체다. 이 당할머니는 이 마을 당제의 주신(主神)이다. 그런데 ‘할멈이 있으면 영감이 있는 법이다.’는 식의 해석에 의해 실제 제의에서는 양위로 섬겨진다. 그리고 하당은 마을 앞에 있는 쥐엄나무를 지칭하며, 특별한 신격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살맥이 입석은 3기가 있는데, 1기는 쥐엄나무 곁에 있고, 나머지는 마을 윗길과 아랫길에 각각 1기씩 서 있다.
    한편 이 마을 당에 대해, 주민들은 ‘인근 당말[堂村] 당산이 높고 시다. 거기서 띠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 당촌리 당이 본당이고 거기에서 분가해온 당이 탄동리 당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어쩌면 주민들의 이주 내력을 전하는 구전인지도 모르겠다.
    이 마을에는 당제 관련 문서들이 많이 남아 있다. ‘동중계안(洞中禊案)’, ‘탄동리동중문서철(灘洞里洞中文書綴)’, ‘동중희사기 금고(洞中喜捨記 金鼓) 준창’, ‘금고부(金鼓簿)’ 등의 문서들이 그것으로, 여기에는 당제 축문이나, 예산 내역, 주민들의 기금 출연 내역, 금고 결성 시의 예산 내역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서들은 이 마을 당제의 전통성과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제사를 모시는 제관은 두 사람이다. 제관은 생기복덕을 보아 당제 5일 전에 선정한다. 그 중 한 사람은 새로운 사람을 선정하며, 나머지 한 명은 전년도의 제관 중에서 선정한다. 이들을 각각 ‘신공원(新公員)’과 ‘구공원’으로 지칭하는데, 1999년도에는 방금중(남, 59)과 전덕산(남)이 그 역할을 맡았다.
    공원으로 선정되면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제사 지낼 준비를 한다. 제물은 주․과․포로 준비하며, 신공원이 지도읍에 나가 구입해 온다. 제사 비용은, 과거에는 동제답이 있어 그 농사를 지은 공원이 소출 중 일부로 지출했으나 지금은 약간씩의 돈을 걷어서 충당한다. 동제답은 얼마 전 경지정리를 할 때 규정 평수 미만이라는 이유로 공공 용지로 흡수되었다. 이 논이 있을 때에는 제관으로 고생한 대가가 어느 정도 주어졌으므로 제관을 하려는 지원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제관을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정월 14일(1999년에는 양력 3월 1일) 저녁 8시 무렵에 김성호씨가 축문을 썼는데, 그 전부터 마을에 내려오는 축문 양식에 달라진 간지와 제관 이름만을 바꾸어 작성하였다. 한편 제관이 한자를 모르기 때문에 한자 옆에 한글을 병기하여 그것을 보고 읽을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한자를 해독하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새로 생겨난 현상이다. 이 축문은 11시 무렵에 신공원이 와서 받아갔다.
    제사는, 11시45분 무렵 신공원 부부와 구공원이 신공원 집에서 제물과 제기, 풍물[농악기]을 들고 상당으로 올라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상당에 오르자마자 진설을 시작하여 12시 10분 경에 제사가 시작됐는데, 절차는 헌작과 재배, 독축, 소지 순으로 진행됐다. 소지는 동네의 평안을 비는 ‘동네소지’와 집집마다의 평안과 재수를 비는 ‘가정소지’를 올리며, 올해(1999년) 당제의 경우 가정소지가 26장이었다. 이 중에서 16명은 따로 소지 종이를 사와서 제관에게 소지를 부탁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소지를 올리는 도중에 5분 정도 풍물을 연주했다. 꽹과리는 구공원이 치고 장구는 신공원의 부인이 치고 징은 조사자가 쳤다. 이렇게 풍물을 치는 이유는 마을에 상당제가 거의 끝났음을 알려 가정에서 대보름 차례를 준비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어 계속 소지를 올리고 12시 46분경 철상을 한 뒤 바로 하산 준비를 하였다. 하산을 시작하기 전 징을 세 번 쳤는데 이는 상당제가 끝나고 하산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라고 했다.
    12시 53분 신공원 집으로 돌아와 하당제에 쓸 메를 준비했다. 메를 준비하는 도중에 간단히 음복하고 휴식을 취했다. 오전 1시 31분 하당제에 쓸 제물과 제기를 들고 마을 앞 하당으로 이동했다. 이어 곧바로 진설하여 1시 46분부터 헌작과 재배 순으로 간단히 제를 모신 후 51분 무렵에 제사를 마치고 바로 철상했다.
    하당제를 마치고 다시 신공원 집으로 돌아온 후, 살맥이독으로 가서 간단히 헌식을 했다. 먼저 웃길에 있는 살맥이독으로 가고 이어 아랫길에 있는 살맥이독에 헌식을 했다. 여기서의 제의는 진설하고 술을 붓고 음식을 던져주는 식의 간단한 절차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당제를 마친 보름날 아침이면, 몇 해 전까지는 동중회의를 하고 금고[농악]를 연주하며 마당밟이를 했다고 하는데, 요즘에는 과거만큼 성대하게 하지 않는다. 요즘에는 마을 어른들 몇이 신공원 집에 모여 음복을 하고, 당제 결산 회의를 하며, 기회가 되면 마당밟이를 하는 식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올해의 경우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마당밟이를 하지 않았다.
    이 마을의 당제는 얼마 전에 비해서는 활력을 많이 잃었으나 지금도 주민들에게 중요한 제의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이 마을의 전통이기도 한데, 당제 관련 문서들에 주민들이 협심하여 당제나 매구를 전승해 왔던 내력이 기록되어 있듯이 그것이 지금도 어느 정도의 전승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1980년 이후로 상당을 두 번 개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제가 과거의 잔존이 아니라 현재 작용하는 문화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주민들은 마을에 교회의 영향력이 별로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인근 마을들이 교회의 영향으로 당을 폐쇄하고 당제를 지내지 않는 것에 비교해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들은, 과거만큼 신명나는 축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당제를 전승하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비금면 내월리 월포 당제

    월포마을은 비금면 소재지인 덕산리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4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에 ‘산제(山祭)’ 또는 ‘당제’라 부르는 마을 제사를 지낸다. 제의는 마을 뒷산 상봉의 ‘산신당’에서 지낸다. 산신당은 높이 116cm, 폭 193cm 크기의 원형 석단이다. 내부에는 ‘사신주(社神主) 단기(壇紀) 4288년(年)’(1955년)이라 새겨진 반반한 돌이 세워져 있으며 주위는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이 곳 당신은 산신․당할머니․당할아버지 세 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산신당 아래쪽에는 쥐신(神)을 모신 ‘쥐당(堂)’이 있고, 산의 아랫부분에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장만하는 ‘신사당(神社堂)’이 있다. 산신당은 원래 초가였으나 30년 전 지금과 같은 시멘트 양철 지붕으로 개축하였다. 그리고 마을 앞 ‘사정거리’에 ‘대장군(大將軍)’이라 명문이 새겨진 장승이 있다. 산신당에서 제사를 지낸 후 이 장승 앞에서 하당제를 지내는데, 이를 ‘장승제’라고 한다.
    정월 열이튿날이 되면, 제관으로 뽑힌 2명의 주민이 3일간 산신당에 거주하며 제를 지내기 위한 정성을 드린다. 그 동안 당에는 제관 외에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으며, 제관들은 당의 청소, 제물 장만 등의 준비를 한다. 정월 14일 밤 10시경, 제관은 메 3그릇․술․과일․명태․우족․산채 등의 제물을 차리고, 헌작․재배․독축․소지의 순으로 제를 지낸다. 소지는 깨끗하다고 여겨지는 집에 한하여 가가호호 올리는데, 특히 군에 입대했거나 외지로 출타한 주민의 무병장수를 축원한다. 산제가 끝난 후 제관은 쥐당 바위틈에 제물 일부를 참종이로 싸서 넣어 주고, 쥐에게 한 해 농사를 해치지 말아달라고 축원하고 내려온다.
    장승제에서는 우선 장승 앞에 짚을 깔고 메․주․과․포 등의 제물을 진설한다. 장승제는 산신당에서의 제의처럼 복잡하지는 않다. 헌작․재배․구축의 간단한 순서다. 구축에서는 ‘마을에 재앙이 없게 해달라.’는 내용의 기원을 한다. 제관 외에는 아무도 당에 오를 수 없는 산제와는 달리 장승제에서는 주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다.
    제가 끝나면 매구를 치며 놀이판을 벌이고 논다. 초저녁 쇠가락을 맞추어보던 매구꾼들은 산제와 장승제가 시작되면 일시 매구를 중단했다가 제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 가락을 울리기 시작한다. 장승이 있는 사장에서 흥겹게 시작된 매굿은 이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마당밟이를 하는 것으로 계속된다.

    (3) 흑산면 진리 당제

    흑산도 진리 마을의 당제는 예로부터 성대한 규모로 이름높았으며, 당(堂)은 흑산의 본당(本堂)이라고 전해질만큼 권위를 갖춘 것이었다. 상당(上堂)과 용신당(龍神堂)이 있으며, 이 외에 갯가에서 갯제를 지낼 때 임시로 설치하는 제청이 있다.
    상당의 형성과 관련해서는 ‘당각시 설화’와 ‘총각화상 설화’ 두 편이 전한다. 이들 설화들은 당각시와 총각화상이 어떻게 해서 당신(堂神)으로 좌정하게 되었는가를 전하고 있다. 그 설화의 줄거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당각시이야기>
    처녀, 총각이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남편이 고기잡으러 갔다가 죽었다. 각시가 목을 매어 죽었다. 주민들이 각시가 죽은 자리에 당을 지어 원혼을 모셨다. 그리고 마을의 안녕 과 풍어를 기원했다.

    <총각화상이야기>
    진리에 총각화상이 옹기를 파는 배를 타고 왔다. 총각이 피리를 불면 바다가 잠잠하고 고기가 많이 잡혔다. 옹기 장수 일행이 출발하려고 하자 당각시가 풍랑을 일으켜 못떠나 도록 방해를 했다. 당각시를 달래기 위해 총각을 섬에 떼어놓고 옹기배가 출항했다. 총각 화상이 혼자 남아 피리를 불다가 죽었다. 주민들이 총각을 당각시 옆에 모시고, 용신으로 믿고 기원한다.

    이러한 설화가 얽힌 상당은 두 겹의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안쪽 돌담은, 신을 모신 당집과 제기와 취사도구들을 넣어 놓은 문간방들을 잇고 있다. 현 당집은 상당 기둥에 쓰여 있는 건조 연월일로 보아 1938년 7월 1일에 지어진 것이다. 그 전의 집을 헐고 지금의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는 ‘소저아기씨(당각시)’, ‘상궁부인’, ‘제석님’, ‘산중처사님’, ‘도령(총각화상)’의 종이 위패가 있었고, ‘상궁부인’과 ‘제석님’의 중간에는 위패는 없으나 ‘당할머니’가 좌정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 위패의 중간에 ‘신베[당베]’가 걸려 있었고, 이 당의 또 다른 신체인 성주단지 및 쌀 뒤주, 들돌 등이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 화재 이후 이러한 유물들은 자취가 없어지고 다만 한지로 만든 ‘당베’만 걸려 있다. 상당의 오른쪽 돌담 밖에는 바다의 신인 용왕이 좌정한 용신당이 있으며, 당집 앞으로는 돌담 밖에 넓은 마당이 있고, 당집을 등지고 서서 마당 우측에 총각화상이 떨어져 죽었다는 노송과 그의 무덤이 있다. 마당에서는 4월 초파일 경로잔치를 비롯한 각종 마을잔치와 집회가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당 아래편 마을 쪽으로 개안이라는 바다 여울과 접해서 당샘이 있다.
    본래 진리의 당제는 제의 기간이나 절차로 보아 상당히 성대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과거에 비해 약화되어 있다. 특히 제의 기간이 음력 정초부터 3일간이었던 것, 제관들이 들돌을 들어 보아 가벼우면 신들이 제물을 잘 흠양했다고 여겼던 의례, 그리고 갯제에서 무당을 불러 용왕굿을 성대하게 진행했던 내용 등은 현재의 당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당제를 지내기 2일전에 마을 이장이 예리에 가서 쌀과 소지 종이 등의 물품을 구입해 온다. 제물 구입 경비는 마을공동기금에서 충당된다. 신격들이 육류와 어류의 냄새를 싫어하므로 준비되는 제물은 메와 술, 과일, 식물성 음식물이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새벽, 선정된 3명의 제관(1명은 제를 주관하고 2명은 보좌한다.)들이 몇 벌의 깨끗한 옷가지와 그 동안 먹을 식량, 제수용 물품 등을 챙겨서 당으로 간다. 우선 상당의 당집과 용신당, 당샘을 청소하고 문간방의 한쪽방에 보관해 놓은 시루, 절구, 그 밖의 제기들을 씻은 후, 제장 주위에 황토를 뿌리고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친다.
    진설할 제물의 준비를 위해 제관들은 쌀에서 겨, 반점이 있는 쌀알들을 하나하나 골라 낸다. 메를 정히 지으려는 의도이며, 제를 지낼 때까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 돌갓, 더덕, 고사리를 솥에 넣고 간을 맞추어 익힌다. 이 나물류는 반드시 주민들로부터 희사받는데, 이는 진리의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마을의 산에서 손수 채취한 것을 제물로 써야 정성이 담긴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준비를 마친 제관들은 제물을 진설하고 자시(子時) 무렵 재배, 헌작, 구축, 소지 등의 절차에 맞춰 상당제를 거행한다. 구축의 내용은 당제의 일반적인 기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을의 안녕, 무병, 탈없는 농사와 어업, 객지에 나간 이들의 안녕 등이다. 소지는 제관, 마을 전체, 각 가정을 대상으로 하여 진행된다.
    상당제를 마친 제관들은 용신당(龍神堂)으로 가서 용신에게 제를 지낸다. 용신에게 드리는 제물은 창호지에 진설되며, 제를 마친 후 제물들을 바로 아래에 있는 바다에 헌식하면서 뱃길의 무사와 풍어를 기원한다. 과거 큰 배들이 많았을 때에는 평상시에도 오랫동안 먼 바다에 나갔던 배들이 들어와 개안에 배를 대고서 절을 하고 구축을 하는 등의 간단한 의례적 행위를 했다고 한다.
    상당제와 용신에 대한 제가 끝나면 제관은 당마당에 장작불을 피워 주민들에게 알린다. 주민들은 그것을 보고 농악을 앞세워 당에 오른다. 주민들은 평상시에는 접근하지 못했던 당집의 열려진 문으로 당집 내부를 구경하고, 당각시 등의 신격들에 소망을 발원하기도 한다. 제관들은 진설되었던 제물 중 일부씩을 떼어 동서남북 사방에 뿌리는 사신(辭神)을 한다. 주변에 떠도는 잡신들도 흠향시키는 것이다. 다음 남은 제물들을 모여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음복을 한다.
    과거에는 새벽에 당에서 내려와 바닷가에서 성대한 갯제와 용왕굿을 지냈다. 해변에서의 갯제는 마을 부녀자들이 진행했으며 용왕굿은 선주들이 불러온 무당이 진행했다. 갯제는 당제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제의였고, 용왕굿은 원할 때에 무당을 불러다 하는 특별한 의례였다. 갯제를 지낼 때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바다로 띄워 보내며, 칼잡이를 하여 칼날이 바다 쪽으로 꽂혀야만 액을 쫓고 풍어와 안전한 뱃길을 보장받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지금은 이와 같은 용왕굿이 행해지지 않고 갯제도 요식적으로 행해질 뿐이다. 용왕굿의 경우 주관할 무당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옛날처럼 풍요로운 어업이 아니라서 심리적으로도 굿을 벌일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제 후의 걸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농악대는 마을 이장, 마을 어른, 제관들의 집과 원하는 이들의 집을 돌며 농악을 쳐준다. 그리고 여느 곳의 걸궁과 마찬가지로 대문, 우물, 부엌, 대청 등지에 있는 가신(家神)들에게 그 집의 명과 복을 빌고, 잡귀, 잡신을 쳐내는 의례 행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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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안군의 우실과 장승․입석   신안문화원 2006/03/23 3747
1 신안군의 당제   신안문화원 2006/03/23 6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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