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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수달장군 능창의 섬(강봉룡) 관리자 2006/3/6 3499


    수달장군 능창의 섬 압해도와 고이도
    -강봉룡 교수의 논단(신안문화 14, 2004중에서
    수달장군 능창의 섬 압해도와 고이도 : 우리 해양사를 빛낸 명소

    강봉룡(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1. 문제제기

    완도가 장보고의 섬이고 진도가 삼별초의 섬이라면 압해도는 수달장군 능창의 섬이다. 해양활동이 왕성했던 고려시대까지는 섬은 해로의 징검다리로서 국가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고, 유력한 해상세력의 근거지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해양활동이 금지되면서 섬은 크게 쇠퇴하고 말았지만, 고려시대까지 빛났던 해양사와 해양문화의 흔적들이 섬의 도처에 남아있다. 이들의 흔적이야말로 신해양의 시대를 맞은 이 시점에 다시 부각시켜야할 최고의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압해도는 우리 해양사의 최고 명소 중의 하나로 손꼽힐만하다. 현재 신안군의 군청 이전 대상지로 거론되고 있어, 해양을 거점으로 하는 신안군의 입장에서 볼 때, 압해도의 해양사와 해양문화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기울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압해도와 고이도의 해양사적 의미를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통해서 제시하고, 그 활용방안까지 제안해 보기로 하겠다.


    2. 압해도 및 고이도와 해양사

    1) 압해도와 해양사

    (1) ‘압해(押海 혹은 壓海)’의 의미와 군현(郡縣)의 치소(治所)

    압해도의 ‘압해’란 명칭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백제시대의 아차산현(阿次山縣) 통일신사시대에 아차산군(阿次山郡)으로 승격되었고, 경덕왕대에 압해군으로 개칭되었던 것이다. ‘압해’란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로서, ‘바다를 청소한다’는 의미의 ‘청해(淸海)’와 ‘바다를 진호한다’는 의미의 ‘진해(鎭海)’와 같은 의미이다. ‘청해’는 9세기에 동아시아 해상을 제패한 장보고가 그의 근거지였던 완도를 스스로 칭한 바였고, ‘진해’는 16세기 말에 침략세력인 일본 수군을 격퇴한 이순신이 머물렀던 여수의 좌수영을 ‘진해루(鎭海樓)’라 칭했던 사례로 저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압해도는 장보고의 ‘청해’ 및 이순신의 ‘진해’와 유비(類比)되는 한국 해양사의 대표 명소라 할만하다.
    이런 압해도는 옛 군현의 치소였다. 백제시대에 아차산현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아차산군으로 승격되었으며, 경덕왕대에 압해군으로 개칭되어 고려시대까지 서남해 도서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백제시대 아차산현의 현치는 오늘날 압해도 대천리 일대로 비정되고, 통일신라 이후 아차산군(압해군)의 군치는 신룡현 고읍촌 일대로 비정된다.

    (2) ‘포스트장보고’를 꿈꾸던 해상세력 능창(能昌)의 거점

    “완도에 장보고가 있었다면, 압해도에는 능창이 있었다.” 수달장군 능창에 관한 기사는 다음 기사가 유일하긴 하나, 크게 주목할만한 기사이다.
    「드디어 광주 서남계(西南界) 반남현 포구에 이르러 첩자를 적의 경계에 놓았더니 압해현(壓海縣)의 적수(賊帥) 능창(能昌)이 해도(海島) 출신으로 수전(水戰)을 잘하여 수달(水獺)이라고 하였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모으고 드디어 갈초도(葛草島)의 소적(小賊)들과 결탁하여 태조가 이르기를 기다려 그를 맞아 해하고자 하였다.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능창이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반드시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니 적도가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힘을 아우르고 세력을 합하여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니 헤엄을 잘 치는 자 십 여인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작은 배로 밤중에 갈초도의 나룻가에 나아가 왕래하며 일을 꾸미는 자를 사로잡아서 그 꾀하는 일을 막아야 될 것이다”라 하니 여러 장수들이 다 이 말을 따랐다. 과연 조그마한 배 한 채를 잡아보니 바로 능창이었다. 궁예에게 잡아 보내었더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말하기를 “해적(海賊)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목베었다.」(ꡔ高麗史ꡕ 卷1 太祖世家1 즉위전 기사)
    윗 기록은 912년에 능창이 압해도를 근거로 왕건과 대립하다가 결국 왕건에게 생포되어 제거되는 과정을 전하는 내용이다. 능창이 왕건과 대립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능창을 견훤의 부하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능창은 견훤과도 대립한 압해도의 독자적인 해양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왕건이 능창에 대해서 정면승부를 하면 “승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라 하였고, 궁예가 “海賊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라고 과장된 언사로 호언한 것으로 보아 그의 위세가 대단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능창을 ‘적수(賊首)’ 혹은 ‘해적의 우두머리’라 표현하고 있고, 또한 ‘수전(水戰)을 잘하여 수달(水獺)이라고 하였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모으고 드디어 갈초도(葛草島)의 소적(小賊)들과 결탁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능창은 서남해 도서해양세력을 결집하여 강력한 해양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능창은, 서남해지역의 해양패권을 장악했던 장보고가 841년에 암살 당한 후 반세기만에 장보고를 대신하여 서남해지역의 해양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왕건 및 견훤 등과 쟁패를 벌인 유력한 독자적 해상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고려말 몽고군 함대를 퇴치한 압해도인의 해상 투혼

    막강 군단을 자랑하는 몽고군이 1231년 이후 고려를 집요하게 공격하였으나, 강화도의 고려정부는 20년 넘게 버텨내고 있었으니, 그 힘의 원천은 바닷길을 사수한 고려의 해양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결국 몽고가 이를 눈치채고서, 바닷길을 차단하기 위해 서남해 해로의 요충지인 압해도 공략에 나섰다. 1256년 당시 몽고의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는 전함 70여척이라는 대규모 함대를 직접 동원하여 압해도에 대한 공격에 나섰던 것이다. 다음 기사에 나타나듯이 압해도의 대몽고 항쟁은 매우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낭장 윤춘(尹椿)이 몽고군으로부터 돌아와서 … 말하였다. “… 차라대(車羅大)가 일찍이 주사(舟師) 70척을 거느려 성하게 기치를 늘어 세우고 압해를 치려하여 저와 관인을 시켜 다른 배를 타고 싸움을 독려하게 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은 대포 두 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두 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차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저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고 하고, 다시 배를 옮기어 치게 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이 곳곳에 대포를 비치하였기 때문에 몽고 사람들이 물에서 공격하는 모든 준비를 격파하였습니다.」(ꡔ高麗史節要ꡕ 卷之17 高宗安孝大王4 高宗 43年 6月條)
    이 기사는 몽고의 장수 차라대가 주사 70척이라는 대규모의 함대를 조직하여 압해도를 치려 했지만 압해도민의 치열한 항쟁에 직면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몽고에 투항했다가 돌아온 윤춘이 증언한 것이다. 차라대가 이처럼 대규모의 병력으로 압해도를 공격하려 했던 것은 그만큼 압해도가 서남해 도서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압해도민들은 큰 배에 대포 2대를 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섬 곳곳에도 대포를 비치하여 몽고의 압해도 공격을 결국 포기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방어 장비가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강화도 최씨정권의 각별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당시 압해도의 군세(郡勢)가 막강했음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2) 고이도(古耳島)와 해양사

    (1) 고이도(高移島) : 엔닌(圓仁)의 바닷길 = 장보고의 바닷길의 거점

    9세기 일본 천태종의 대성자(大成者)였던 엔닌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835년에서 847년까지 12년 동안 중국 유학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의 귀국선은 장영(張永) 등 재당신라인들이 마련해주었다. 엔닌이 탄 배는 한반도 서남해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즉 엔닌 일행은 847년 9월 2일 정오에 산동반도의 적산(赤山) 막야구(莫耶口)를 떠난 이후 2일 만인 9월 4일 새벽에 충청도 서해에 이르고,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그날 오후에 고이도(高移島)에 이르렀으며, 다시 9월 6일에는 구초도(丘草島, 진도 거차도로 추정됨)에 이르렀다. 그리고 동행(東行)하여 9월 8일 오전에 안도(雁島, 여수 남쪽의 안도로 추정됨)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동남행(東南行)하여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규슈에 도착했다.
    엔닌 일행이 택한 이 항로는 그 이전에 장보고 선단이 즐겨 다니던 항로이자, 당시 동아시아 무역선이 줄을 이어 다니던 주요 항로였다. 여기에서 고이도가 바닷길의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이도(皐夷島) : 왕건의 서남해지방 패권 장악의 거점

    ꡔ고려사ꡕ에 의거하여 왕건의 서남해지방 패권 장악 과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912년에 서남해 원정에 나선 왕건은 서남해지방의 중심 도서 중의 하나인 진도군을 점령하고, 이어서 영산강하구의 압해도 인근에 있는 작은 섬인 고이도(皐夷島)를 위복(威服)시켰다. 이로써 왕건은 영산강구로 진입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한 셈이 되었다.
    이에 견훤은 직접 진두지휘하여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함으로써 왕건이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세력과 연결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난관에 봉착한 왕건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을 써서 견훤의 전함을 거의 전소시키고 후백제군 500여급을 목베는 완승을 거두었다. 견훤은 작은 배에 갈아타고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ꡔ고려사ꡕ에서는 이 해전에 대해 “삼한 땅의 태반을 궁예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평하였다. 이로써 고이도는 영산강구로 통하는 해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3. 압해도 해양 역사문화자원의 활용방안

    1) 압해도 역사문화자원의 연계성을 주목하자 : 고읍촌 군치-흙성안 토성-송공산성

    압해도 번영의 비결은 해로의 요충지라는 점과 군치(郡治)의 연계망이 치밀하게 갖추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군치(고읍촌)와 토성(흙성안)과 산성(송공산성)으로 이어지는 연계망의 초점은 당시 바닷길의 감시와 관리에 맞추어져 있었다. 바닷길의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적절히 활용한 압해도는 서남해 도서지역의 행정 중심지이자 국제 교역의 주요 거점의 하나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군치의 자리로 비정되는 고읍촌 일대에서 수습되는 유물들의 수준으로써 압해도 번영의 정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압해군의 군치로 비정되는 고읍촌 일대가 최근에 도로 공사 때문에 훼손되고 있다. 압해도는 신안군의 역사적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미래의 군청 이전 예정지로 이어질 곳으로서, 고려시대까지 압해군으로서 번영을 구가한 군 치소를 조사하고 정비하는 일은, 압해도의 시대를 준비하는 신안군의 미래 비전을 모색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 분명하다. 고읍촌의 군치와 흙성안 토성과 송공산성으로 이어지는 옛 압해군의 연계망을 복원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이 일대에 대한 고고학적 지표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단순한 지표조사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고, 더 나아가 압해도 역사문화자원의 연계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종합적인 문화컨설팅이 절실히 필요하다.

    2) 해양 역사문화와 해양 자연경관을 만나게 해주자 : 송공산

    압해도의 해양사적 영광과 옛 압해군 시대의 번영을 집중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송공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송공산에는 군치와 연계되는 산성이 있어, 바닷길을 감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1500년전에 중국으로부터 송씨 성을 가진 장수가 난파당하여 송공리에 들어와 살면서 송공리 앞 바다에 있는 역도란 섬에서 말을 기르며 송공산과 매화도의 산을 말을 타고 날아다녔다는 설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또한 송공산에 올라 동쪽 방향을 바라보면 흙성안 토성과 고읍촌 군치(郡治)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또한 송공산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매화도-당사도-암태도-팔금도-안좌도-장산도」로 에워싸인 신안군 다도해의 절경과 환상적인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다. 이는 해양 역사문화와 해양 자연경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흔치 않은 명소라 할 수 있다.
    최근 송공산에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적지 않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압해도가 연륙이 되고 이곳으로 군청이 이전된다면 더욱 많은 이들이 송공산을 찾을 것이다. 송공산에서 자연스럽게 압해도의 역사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송공산성-흙성안-고읍촌」으로 이어지는 옛 군치(郡治)의 역사문화적 연계망을 답사하는 것은 물론, 「매화도-당사도-암태도-팔금도-안좌도-장산도」로 에워싸인 송공산 서쪽 바다에서 해양 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구상한다면, 신안군의 미래 군청 소재지 압해도의 품격과 위상은 크게 떨칠 것이다.

    3) 압해도의 해양 명소 만들기를 위한 강조점

    압해도가 “수달장군 능창의 섬”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능창을 중심으로 압해도의 강력한 해양 이미지를 창출할 것을 특히 강조하여 제안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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