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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의인 아사히미즈이(김학윤) 관리자 2006/3/6 2701


    신안문화13호-역사수필

    義人 아사히 미즈이(朝日見瑞)
    --하의도 농민운동 지도자--

    島蓮子 金 學 允(하의3도농민항쟁기념관 건립위원회장)

    인간의 탐욕(貪慾)은 무한한 것일까!
    탐욕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인생은 유한한데 끝이 없는 탐욕을 다 채울 수 있을까. 탐욕을 채우다 보면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때로는 탐욕이 채워지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리해서 채운 탐욕은 허무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나라 서남해 섬 중에 이름이 참 아름다운 연꽃섬(荷衣島)이 있다. 이 섬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탐욕을 부려 보았으나 결국은 빈 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1905년 을사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는데 주모자인 이완용(李完用)의 횡포 때문에 하의도 농민들은 나라 잃은 것도 통탄스러운데 자기들 소유 농토마저 빼앗겼었다. 선조들이 피땀으로 일구어 놓은 섬 전체 농지를 홍우록(洪祐錄)과 협잡하여 하급증서(下給證書)라는 공문 한 장으로 넘겨 버렸으니…. 조선조 14대 선조왕의 맏딸 정명공주의 8대손이라고 자처한 홍씨는 각종서류를 위조하여 이완용과 협잡을 부렸던 것이다. 하급증서를 거머쥔 홍씨는 관권을 등에 업고 폭력배를 하의도에 투입하여 소작료 징수에 나섰다. 농민들은 자기소유농지라고 주장했으나 관권과 폭력을 이겨내지 못했었다. 마지못해 소작료를 군청에 납부하고 법정투쟁에 나섰다. 농민대표 세사람을 뽑아 경성공소원에 홍우록을 상대로 부당이득반환소송을 제기했으나, 일심에서는 변호사의 무성의로 패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등공소원에 항소하여 삼 년이나 걸린 끝에 "농민들 농지소유권을 인정하고 강제징수한 소작료를 되돌려주라"는 승소판결이 나왔었다. 하의삼도 농지는 농민들의 소유임을 법적으로 인정받는 쾌거였었다. 홍씨는 소송진행과정에서 자신이 조작한 소유권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감지하였다. 소송판결 직전에 하의도 농지 4백31만여 평을 당시 한일은행장이었던 장안갑부 조병택(趙秉澤)과 땅부자 백인기(白寅基)에게 1만5천 원의 헐값에 재빨리 팔아 넘겼다. 조병택은 목포갑부 정병조(鄭炳朝)에게 5만7천 원에 매도했고, 정병조는 일본 오사카의 거상 우콘 콘자에몬(右近權左衛門)에게 11만5천 원에 넘겼다.
    농민들은 재판에 이기고도 홍씨의 농간 때문에 일본인 지주와 싸워야하는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본인 지주는 패소하자 이사태를 뒤엎을 음모를 꾸미었다. 목포재판소장, 경찰서장과 결탁하여 농민대표 세사람중 박0진(朴0振)에게 농지 1천5백두락과 공작금 수만원을 건네고 하수인으로 매수하였다. 박씨는 일본인 계략대로 자기와 가까운 농민들에게 '승소는 하였으나 소유권확인소송을 다시 해야한다'고 달래어 소송위임장에 도장을 받아 소송을 제기했다. 농민들은 경성고등공소원 승소에 안도하고 있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하고 만다. 농민총회를 열고 박씨와 일본인을 성토하였다.
    울분을 참지 못한 부녀자들이 박씨와 추종자들 집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박씨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가해자들을 경찰에 고발해 버렸다. 경찰에서 7백여 명의 병력이 하의도에 상륙하여 부녀자 1백 여명을 연행 해다가 목포형무소에 수감했다. 벼랑끝에 몰린 농민들은 섬안에 있는 배를 총동원하여 목포로 나갔다.
    농민 1천 여명이 재판소에서 경찰서에 이르는 해안통 양측에 솥을 걸어놓고 노숙하면서 '화해 결사반대, 승소판결문 돌려달라'는 구호를 내걸고 농성했었다. 이 농성사태가 호남지방 최대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극렬분자들이 재판소와 경찰서 기물을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수백명이 체포되었다. 관에서 수감자 처벌을 볼모로 농지소유권 포기를 조건으로 화해를 강요하므로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체포된 수백명의 농민들은 석방되고 8명의 부녀자들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4년 2월 28일 하의도 농지소유권을 양도하는 화해조서가 조인되었다. 이로써 농민들은 농지소유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홍씨가 외부강도였다면 섬안에 날강도가 있었으니 농민대표 박0진이다. 재물에 눈이 멀어 제고장 형제들을 배신하고 섬 전체 농지를 통째로 일본인 입에 넣어 줌으로써 땅주인들을 생머슴(農奴)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양이한테 생선 맡긴 꼴이 되고 말았다'. 1916년 7월 화해조서 날인을 거부한 비조인파 농민들은 법정투쟁에 나섬과 동시에 '소작료 불납동맹'을 결성하고 내땅 되찾기 운동을 전개했었다. 1919년 9월 우콘(右近)은 농민들의 끈질긴 저항이 골치 아팠던지 일본 대의사 가미나미(神波信藏)에게 17만원에 넘기고, 1920년에 도쿠다 야시치(德田彌七)에게 넘어갔다. 새 지주 도쿠다는 악랄한 수법으로 농민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하의도에 농장 사무소를 개설하고 군 헌병출신과 경찰출신을 사무원으로 채용하여 농민지배체제를 더한층 강화했다. 소작료를 6-7할 까지 수탈해 갔으며 체납소작료는 가차없이 가산을 차압하고 세간을 빼앗아 목포로 실어 갔다.
    3.1운동을 계기로 제땅 되찾기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법적 투쟁으로는 가망이 없으니 차라리 '제땅을 되사버리자'는 방안이 제기되어 총독부와 도쿠다에게 22만 원에 경작자에게 반환하라고 요구했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했으나 그때마다 일본정부와 도쿠다의 방해공작에 무산되곤 했었다. 악덕지주의 탄압을 견디지 못한 청년들은 제고장을 일본인에게 내어주고 그 일본인의 경내(오사카)에 가서 노동자 생활을 하는 가슴아픈 상황이었다. 1927년초에 '재일 하의노동청년회'를 결성하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생존권 확보를 위해 똘똘 뭉쳤었다. 특이한 것은 자기 고향 하의도 농민들 생존권 보전에 관심을 갖는 애향심이었다. 그해 6월에는 일본 노동농민당 오사카 지부의 집행위원인 아사히 미즈이(朝日見瑞 一名 朝日俊雄)선생에게 하의도농민조합 창립을 지도해 주도록 간청했었다. 그해 12월27일에는 일본농민조합 특별활동위원인 아사히 미즈이, 고문 이도카와 타로우(色川幸太郞), 상무위원 나시아 유우이치(仁科雄一)등이 농민조합 결성 지도차 하의도에 도착했다. 1928년 1월 2일 하의면 대리 구학교 강당에서 3백 여명의 농민이 참석한 가운데 하의농민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정식 발족했었다. 농민조합 가입자는 8백 여명에 달하여 명실상부한 하의도 농민을 대표하는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보기 드문 국내외 농민운동가들과 연대를 통해 발족했었다. 농민들은 아사히선생을 상임고문으로 추대했었다. 농업소득증대와 농민권익보호를 위해 일치단결 하여 일본인 지주와 투쟁해 나갔다. 지주는 관권과 폭력배를 동원하여 농민운동을 억압했다. 그러나 하의조합은 아사히 선생 지도하에 농민들을 조직화하여 효과적으로 투쟁했었다. 또한 조선농민총연맹과 일본농민총연맹의 적극적인 지원도 큰 힘이 되었다.
    1928년 2월 친일조선인 테러조직인 상애회 부회장 박춘금(朴春琴)일당이 농민조합을 해산시키기 위해 하의도에 출동하여 농민들과 충돌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경찰에서는 조합간부 10명과 아사히 선생까지 검거하고 소요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했었다. 이들은 법원에서 징역 6개월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아사히 선생은 일본인이므로 무죄방면 되었다. 이 사건은 도하 각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조선농민총연맹, 신간회본부, 경성변호사단, 조선기자동맹 등 사회단체들도 진상조사를 위한 특파원을 파견한 유명한 농민항쟁사건이었다. 사실상 하의농민조합운동은 일본에 건너간 청년들이 주도해 왔는데 간부들이 검거된 후로 투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하의도 농민운동사상 잊을 수 없는 인물은 아사히 미즈이 선생이다. 농민조합 창립이래 2년동안 조합사무실에 주재하여 한복을 입고 농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 지도해 주었다. 지금도 하의도 사람들은 선생을 은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의인(義人)이 더 적정한 호칭이다. 당시 선생은 일본정부로부터 수차 경고와 주의를 받았다고 한다. 아사히 선생은 국가를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한 인권 지도자였다. 자기나라의 여러 눈총을 받으면서도 도쿠다의 불의를 단호히 배격했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하의도 농민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농지소유권을 찾아 주기 위해 혼신을 다해 투쟁했었다. 가정과 직장을 버리면서까지 작은 섬 하의도에 묻혀 농민들의 등불이 되어 주었다. 하의도 농민의 은인이며 의인이신 아사히 미즈이선생은 우리들 마음속에 영생(永生)하리라.
    1945년8월15일 해방이 왔다. 악랄하게 핍박하던 도쿠다는 밤 봇짐을 싸고 빈손으로 물 건너갔다. 조선땅을 차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려보려던 탐욕은 종말을 고했다. 역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원칙대로 심판해 주었다. 땅주인이 아홉번이나 바뀌는 수난을 겪고도 최후 승리자는 농민들이었다. 비로소 제주인이 제자리를 지킨 것이다. 하의도 땅은 주인들의 한(恨)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하의도 농민들의 고난사는 너무도 애달프다. 임진왜란 이후 16세기초 자기땅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던 사람들이 무인도에 들어가 터를 잡고 논·밭을 일구었었다.
    싶은 사람들이 섬에 들어가 터를 잡고 논,밭을 일구었었다. 선조왕이 맏딸 정명공주에게 하의도 농지 20결(약 8만평)에서 세미를 4대손까지 받아먹도록 해주었었다. 4대손이 죽은 1729년이 지나도 홍씨 일가가 조정의 요직에 있는 것을 기화로 한술 더 떠서 섬전체 농지에 대한 절수권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세미징수를 강행해 나갔다. 농민들은 저항했으나 관권에 짓눌려서 번번이 눈물을 삼켜야 했었다. 1870년 고종조에 와서야 농민들의 민원이 받아들여져 140결 농지는 농민들 소유임을 확인하고 홍씨가 에서는 24결에서만 세미를 받도록 판결해 주었다. 그런데 1908년에 홍우록의 농간과 이완용의 횡포로 농민들은 제땅을 빼앗기고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었다.
    어느 시대나 악과 선이 공존하여 세상사의 균형을 이루게 마련인가 보다. 홍우록이 이완용과 협잡하여 하의도 땅을 통째로 삼켰을 때 일본인 변호사가 3년간 지성껏 변론한 결과 승소하게 되었었다. 박0진이 하의도 땅을 일본인에게 넘겨주어 제 땅을 빼앗기고 억압을 당하고 있을 때 아사히 미즈이 선생이 농민운동을 통해 일본인 지주와 대항해 주지 않았는가.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성실하게 살고자 노력하였으나 선행하신 분들을 떠올려보니 내 자신이 작아지면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탐욕은 인간에게 독이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의로운 삶이 돋보인다. 여생을 분수에 맞게 살면서 작은 일이라도 베풀어야 하겠다. 내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3세기에 걸친 섬사람들의 고난사를 글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내 소명이라고 자임해 본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긴 세월동안 혹독한 핍박을 받으면서 처절하게 저항한 농민운동사를 세계에 알려야 하겠 다. 희생하신 선인들과 의인들의 음덕으로 아름다운 연꽃섬이 지상낙원이 되기를 조용히 기원해 본다.

    < 작자 소개 >
    * 1936년 신안군 하의도 출생
    * 광주농고, 전남대 농대 졸업
    * 고향마을에서 협동조합운동 시작(조합장 피선)
    * 고흥,해남,승주군 농협지부장. 농협중앙회 공판부차장.영등포공판장장역임.
    * 하의삼도 농지탈환운동기념사업회장(현)
    * 창작수필에< 조계산정상표지석 >으로 등단.
    주소/ 서울시 관악구 신림본동 409-179
    전화/ (02) 885-7778. 011-9756-0909
    E-mail; kimhy@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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