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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설화속바다와 남도사람들 관리자 2006/3/2 5398


    신안문화 13호(2003), 신안문화특강

    설화 속의 바다와 남도사람들


    이 준 곤 ( 교수. 목포해양대학교 교양교육원)


    Ⅰ. 머리말
    Ⅱ. 신화시대의 바다 - 새롭고 풍요로운 문화와 문명의 유입로-
    Ⅲ. 전설시대의 바다 - 남도도서민의 애환이 깃든 삶의 터전-
    1. 실패한 영웅- 장사·장군이야기
    2. 용신이야기- 농경신과 해양신의 양면성
    3. 섬지역에 문화를 전파한 인물들의 이야기
    Ⅳ. 글을 마치면서


    Ⅰ. 머리말

    설화는 이야기이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고 전파되는 이야기는 신화, 전설, 민담 등으로 구별되고 있으나 그 한계는 모호한 점이 많다. 신화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창조하고 그 가치를 표현하는 세계창조신화, 건국신화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면 전설은 자신의 질서를 구현시키는 데에 실패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민담은 파괴된 신화의 잔존형태이기도 하면서 새로운 신화적인 가치를 모색하는 이중적인 내용이나 형태를 담고 있다. 한국인의 해양인식을 살펴보는 이야기로는 신화와 전설자료가 주로 이용될 것이다.
    예부터 한국사람들은 바다를 어떤 대상으로 보아왔는가 하는 문제는 여러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으나 전승되는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바다의 모습도 의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로서 바다는 근대나 현재까지도 우리들에게 매우 낯선 대상이며 친해양적인 사고는 요즈음에 와서야 비로소 언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바다는 한국사회에서는 육지에서 쫓겨가는 유배지나 은둔처로서 떠오르는 공간이었다. 새로운 부를 창출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공간으로 바다를 인식하는 것은 고대로 올라가서야 전승되는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의외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Ⅱ. 신화시대의 바다 - 새롭고 풍요로룬 문화와 문명의 유입로 -

    신화시대의 바다는 민족과 민족이 그리고 국가와 국가가 서로 오가는 길이고, 새로운 문화와 문명이 서로 교류하는 상생의 길이었다. 바다를 통해서 들어오는 이국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이국의 사람들과 문물을 개방된 태도로 맞아들이는 열린 길이 바로 바다였음을 전승하는 신화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화시대의 바다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 신화 속의 바다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중요한 문화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주도의 삼성시조신화, 가락국의 수로왕비의 도해신화, 탈해왕의 도해신화, 처용신화, 여인국과 거인국의 이야기, 이여도이야기, 미황사창사이야기 등의 신화적인 이야기 속에서 열린 바닷길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바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가치있고 긍정적인 의미를 바로 해양신화의 바다에서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해양신화들에서 드러나는 바다의 의미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제주도의 삼성시조신화에서 등장하는 바다 나라는 碧浪國이다. 벽랑국은 조선 영조대의 장한철이 지은 표해록(인문과학 6집, 연세대문과대학, 1964)에는 일본의 동쪽 먼 바다에 있다고 기술한다. 삼성시조이야기는 탐라국의 건국신화이면서 제주도입도조의 이야기이기이며, 제주도에서 사람이 살게 된 내력과 역사를 담고 있으므로 제주도 문화의 변화를 의미하는 문화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① 한라산 북녘 기슭의 毛興穴에서 세 사람의 신인이 땅 속에서 솟아나다
    ② 첫째를 良乙那, 둘째를 高乙那, 셋째를 夫乙那라 하다
    ③ 세 사람은 거친 들에서 사냥하고 육식하며 살다
    ④ 하루는 동해가에서 자주빗 목함이 떠오다
    ⑤ 그 속에는 청의를 입은 처녀 3인과 오곡의 씨앗, 망아지, 송아지 들이 있었다.
    ⑥ 동해의 碧浪國의 왕녀로 세 신인의 배필이 되라고 왕이 보냈다 하다
    ⑦ 세 신인은 한 사람씩 처를 삼고 기름진 땅으로 나아가 화살을 쏘아서 거소를 정하다
    ⑧ 양을나의 거소를 第一徒, 고을나의 거소를 第二徒, 부을나의 거소를 第三徒라 하다
    ⑨ 비로소 오곡을 뿌리고 소말을 길러 부유한 나라를 만들다.

    - 탐라지 고적조-

    제주양씨, 제주고씨, 제주부씨의 시조이야기이기도 한 이 신화는 제주도에 처음으로 씨족사회가 성립되고 발전해 가는 과정을 신화서사문법으로 풀이해주고 있다. 벽랑국은 원래 상상의 바다 너머에 있는 나라로서 제주에서 전승하는 이야기 속의 波浪島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벽랑국과 파랑도는 고대국어로 바다를 의미하는 "바랄" 또는 "바ㄹㆍㅇ"과 같은 음운소를 지니고 있다. 벽랑국과 파랑도는 "바다나라" 또는 "바다섬"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벽랑국은 정한철의 해도에서 보면 일본의 동쪽으로 일천리 떨어진 바다에 있는 나라이다. 이는 동해바다 아득히 먼 곳에 있는 "神人"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삼성시조신화에서 본다면 이 나라에는 오곡과 소,말 등의 가축들을 기르는 풍요로운 농업사회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 나라에서 탐라의 세 신인들에게 왕녀 세 사람을 보내어 배필을 삼게 하고 탐라를 부유한 나라로 발전시키고 있다.
    수렵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탐라국에 농업사회의 기반을 조성해주는 세 왕녀는 새로운 농업문화와 농업문명의 기술과 이기들을 유입해 들여오는 문화의 전파자들이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영웅들이기도 한다. 세 왕녀가 가지고 온 5곡의 씨앗, 송아지와 망아지 들은 농경사회의 상징이다. 이들의 고향인 벽랑국은 동쪽 바다 너머에 있는 머나먼 바다나라인 것이다. 바다 너머 먼 곳에는 새로운 문명과 문화를 가진 풍요로운 나라, 이상적인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관념이 이 신화 속에 들어 있다. 땅 속에서 솟아난 세 사람의 신인보다 훨씬 더 고급의 문화를 가진 공간이 바다 너머에 존재하고 있다는 관념인 것이다. 바다를 통해서 들어온 이 농경문화를 접촉했을 때에 비로소 탐라국이 한 단계 상승된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벽랑국이라는 풍요로운 동쪽 바다나라의 설정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해양을 통해 유입한 탐라의 도작문화 내지는 농업사회의 출현을 설화문법적인 문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해양을 통해 유입해오는 새로운 문화와 바다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형태로 서술되고 전승되고 있다. 벽랑국과 같은 해양국은 수로왕비 허황옥의 아유타국, 탈해의 용성국과 적녀국 등이 있다.

    수로왕비 허황옥의 도해이야기 (삼국유사 가락국기)

    ① 구지봉에서 하강하여 탄생한 수로왕에게 배필이 없었다.
    ② 신하들이 걱정하자 왕은 하늘의 뜻이 따로 있다면서 신하들로 하여금 바닷가에 가서 왕후를 기다리게 하다
    ③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오다
    ④ 배에서 내린 허황옥은 높은 언덕에 올라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제를 드리다.
    ⑤ 허황옥이 가져온 재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⑥ 왕후가 행재소에서 기다리던 왕을 만나 자신을 소개하다.
    "나는 본래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 이름은 황옥, 나이는 16세. 부왕의 명으로 왕 의 배필이 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 오게 되었다"
    ⑦ 왕과 왕후는 부부가 되어서 금슬이 아주 좋았다.


    제주의 삼성신화와 동일한 신화구조이다. 두 자료는 한 마디로 바다를 건너온 여인과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다. 허황옥이 떠나온 나라는 아유타국으로 현재 인도의 아유다지역이라고 한다. 수로왕릉에 새겨진 雙魚紋은 현재 아유다국의 문장으로 일치하고 있다. 허왕후가 가져온 금수능라, 의상필단, 금은주옥, 보석 등의 예물은 아유타국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며 수로왕은 허왕후를 맞아들인 후로 가락국의 국가제도를 새롭게 정비하여 관직이름을 바꾸고 중국의 주나라 한나라 제도를 본받는다. 이 신화에서도 역시 새로운 문화의 전파자로서 허황옥을 들 수 있으며 가락국이 부족국가 형태에서 새로운 왕권국가로 도약하는 계기를 읽을 수 있다. 허황옥이 배에 실어온 바사석탑은 현재도 그 형태가 남아 있다.
    삼성시조신화와 수로왕비의 이야기는 여성이 바다너머의 나라에서 도해한 이야기인 반면에 탈해신화와 처용이야기는 남성이 바다를 건너 도해한 이야기이다.

    脫解王의 도해 이야기 (삼국유사 탈해왕조)

    ① 탈해왕은 본래 龍城國 사람이며, 용성국은 倭로부터 동북으로 천리에 있다
    ② 용성국의 왕 합달바가 적녀국 왕녀를 왕비로 맞다
    ③ 왕비가 오래 되도록 아들이 없더니 7년만에 큰 알을 하나 낳다
    ④ 대왕은 불길한 징조라 여겨 궤를 만들어 칠보와 노비를 같이 실어 바다에 띄워보내다
    ⑤ 계림 동쪽 하서지촌의 아진포에 이르러 이 알에서 출생한 이가 탈해이다.
    ⑥ 탈해는 후에 신라 제 2대 남해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에 오르다.

    이 신화에서 보는 龍城國, 積女國 등은 상상의 해양신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라에 전파되는 새로운 문화의 발원지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전파자는 탈해이다. 탈해의 어머니 나라인 적녀국은 정한철의 해도에 있는 여인국과 같은 의미로 보며 동해 먼 곳에 여인들의 나라가 있다는 해양관념을 보여주고 있는 예이다.
    처용설화도 마찬가지로 동해 용왕국의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신라조정에 들어와 왕을 보좌하는 예를 보이고 있다. 처용은 당시 신라에서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의식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처용이 처의 간통을 보고서 취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대응을 노래 가사 속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곤
    가라리 네이더라
    둘은 내히었고
    둘은 뉘이었고
    본디 내히이었다만
    앗아날 엇디 하리잇고

    -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 조-

    여인국의 이야기에서 탈해의 어머니나라인 적녀국(삼국사기에는 여인국이라고 기록)은 왜국의 동쪽으로 천리 바깥에 있는 바다의 나라라고 하며, 정한철의 해도에 여인국이 표기되어 있다. 이 이외에 三國志 魏志 東夷傳의 東沃沮傳에는 여인국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① 여인국이 海中에 있으며,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
    ② 그곳은 옥저 동쪽 대해 중에 있다

    後漢書 東夷列傳 東沃沮傳에도 여인국의 기록이 있다.

    ① 해중에 여인국이 있어 그곳에는 남자는 없다
    ② 그 나라에는 神井이 있으며, 이를 엿보기만 해도 문득 자식을 밴다.

    동옥저는 지금 함경도의 동해안지대에 있던 나라이다. 중국측 기록에 오른 것을 보면 동해중에 여인국이 있다는 이야기는 동아시아전지역에 널리 유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정한철의 해도에 보듯이 우리 나라 전역에도 전승 내지는 전파되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인들만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마존 여인국처럼 전세계적으로 광포되고 있으며 별계의 나라가 바다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는 상상의 나라이기도 하다.
    정한철의 해도에 있는 거인국 역시 중국의 淮南子, 博物誌 등에 나오는 大人國과 같은 관념적이고 상상의 나라가 바다에 있다는 해양인식을 보여준다.

    뱃사람들이 난파당하여 돌아올 수 없는 상상의 섬으로 "이여도"이야기가 전승하고 있다. 이여도이야기는 제주에서 전승하고 있는 설화로

    ① 이여도는 제주도 남서해 중국으로 가는 뱃길에 있는 섬이다.
    ② 제주도의 진상선이 중국으로 가던 도중 이 섬의 파랑으로 난파되는 일이 흔했다.

    는 이야기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이여도는 아득히 먼 해상에 있는 섬으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죽음과 이별의 섬이며 저승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섬으로 민요의 소재가 되고 있다. 죽음의 섬으로 한 번 가면 돌아 올 수 없다는 것과 연꽃 구경하느라고 돌아올줄 모른다는 내용으로 불교적인 내세관을 보이고 있다. 바다 속에 이여도 섬이 있으며 그 섬 속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 속에 연꽃이 피어있다는 저승세계의 형상에 대한 상징을 띠고 있다.

    이엿문은 저승문이네
    이어도 길은 저승길이네
    가니 돌아올 줄 모르더라
    신던 버선에 볼 받아 놓고
    입던 옷에 풀하여 놓아
    애가 타게 기다려도
    다시 올 줄 모르더라

    이어도 문은 대문이네
    대문 뒤엔 방축이네
    방축 뒤엔 연꽃이라
    연꽃 구경 좋더라마는
    연꽃 구경 하려하니
    못 돌아 오더라

    - 김영돈, 제주도 민요연구 상, 일조각 -

    미황사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들어오는 불교의 이야기다. 바다가 바로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유입통로가 되고 있음은 백제불교가 마라난타에 의해서 영광의 법성포로 들어오는 것을 필두로 한국의 해안가에 널리 구전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만도 해남의 진불암, 해남의 은적사, 무안의 목우암, 옥과의 관음성덕사 등이 있다. 미황사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전형적인 설화구조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① 신라 경덕왕 8년 8월 12일 홀연히 달마산 사자포구에 석선이 도착하다
    ② 범패소리가 나서 어부가 접근하려고 하자 배가 멀리 사라지고 다시 가까이 오다
    ③ 의조화상이 듣고서 목욕제계한 후에 상좌, 향도 들과 함께 가서 제를 올리니 석선이 해안으로 오다
    ④ 배 속에는 금인이 노를 잡고 있으며 수많은 불적들이 실려있었다.
    ⑤ 향도 들이 배안의 불적들을 내리니 검은돌이 깨지더니 청흑색의 암소가 한 마리 나 왔다.
    ⑥ 그날 밤 꿈이 금인이 의조화상에게 현몽하여 불적을 암소에게 실리러 멈춘 곳에 봉 안하라 하다
    ⑦ 화상이 암소를 끌고 가니 암소가 눕고는 "아름답다(美)"하고는 죽어버렸다.
    ⑧ 그곳에 불적들을 봉안하고 "미황사"라고 부르다. 이는 소가 죽으면서 "아름답다(美)" 고 울던 소리와 금인의 색이 노란 것을 본따서 지은 절이름이다.

    해남군 달마산 미황사의 창사이야기는 불적들이 바다를 건너서 인도에서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바다가 새로운 종교문화의 유입처라는 것을 이야기하여 주고 있다. 해양으로 통해서 이 땅에 들어온 불교의 이야기가 한국의 전해안가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Ⅱ. 전설시대의 바다 - 남도도서민의 애환이 깃든 삶의 터전 -

    바다는 고대로 갈수록 더 새롭고 풍요로운 문화와 문명의 유입통로이며 개방적이고 새로운 것을 주저없이 받아들여 자기것으로 소화시켜서 더 고차원의 사회와 국가로 발전시킨 동기르 부여하는 열린 공간이었다. 이 지역 남도 섬주민들 사이에서 현재 전승하고 있는 해양전설은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게 이런 바다의 속성과는 다르게 막막하게 막히고 고립된 바다의 이야기가 형성되어 오고 억압받고 기를 펴지 못하고 도서민이라는 피해의식에 찬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바다로 나가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새로운 가치와 부를 창출해 내기보다는 기를 펴지 못하고 눌려지내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배인 이야기들이 형성된 이야기의 역사는 무엇 때문일가? 섬은 내륙의 중앙권세가들의 착취에 시달리고 열악한 자연조건으로 고립되고 소외받은 공간으로 추락하고 이에 따라 섬주민들은 저항과 분노의 몸짓과 목소리를 표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도서주민들의 입도시기가 대부분 임란 전후였다고 한다. 입도의 동기로는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서, 해산물 채취를 위해서 또는 드물게 은둔처나 은신처를 찾아서 유배자의 현지후손이거나 인근연안지역에서 통혼으로 인해 입도한 사례들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도서민의 입도동기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라는 점에서 도서공간은 사실 암울한 땅의 역사를 지닐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전하는 현장의 도서민의 생활도 이런 섬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1. 실패한 영웅- 장사·장군의 이야기 -

    실패한 영웅은 전설적인 인물의 주인공이다. 이 실패한 주인공들은 물론 사람들이 생활하는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언제나 존재하고 있듯이 도서지역에서도 어김없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실패한 영웅-장사·장군들의 이야기는 뛰어난 재능이나 용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대개가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고 자신의 뜻을 펴보지 못하고 반역자의 이름으로 또는 도적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관군에게 접혀 죽는 이야기이다. 이 유형의 이야기는 형성단계의 모티브를 기준으로 4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제1단계 - 장사발자국·장군바위이야기
    제2단계 - 아기장사이야기
    제3단계 - 송징장군. 나송대장군. 고이도의 왕장군. 유달산의 장사이야기 등과 같이 민중영웅적인 인물의 이야기. 거의 익명성에 가까운 인물들이다.
    제4단계 - 역사적인 인물이야기(능창. 견훤. 장보고. 이순신 등등)

    제1단계는 가장 단순한 이야기구조로 익명의 장사·장군의 발자국이나 손자국이 바위에 새겨져 있어서 그 바위를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바위에 새겨진 작은 구멍이나 자국을 장사·장군의 것으로 유추하고서 힘과 용기를 지닌 장사와 장군에 대한 숭배감을 표현한다. 이 이야기유형은 바위의 지명유래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장군바우- 신안군 비금면 고서리. 신안군 비금면 광대리.
    장사바우 - 신안군 지도읍 태천리. 완도군 체도. 신안군 도초면 발매마을. 신안군 암태도
    제2단계는 익명의 아기장사이야기다. 날개돋은 아이가 태어나서 바위에 발자국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아이가 죽고나자 용마가 나오고 샘에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기장사가 바위에 발자국을 남겼다는 설화는 바위에 난 작고 앙징스러운 발자국 형태의 자국을 보고서 아기장사의 것이라는 이야기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아기장사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양한 변이가 있으나 일반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① 아이를 낳았더니 옆구리에 날개가 돋고 비늘이 있으며 힘이 장사다
    ② 아이가 크면 역적이 되어 삼족이 멸망당할가 보아 죽이기로 하다
    ③ 아이가 자기를 죽이지 말고 바위 속에 묻어달라고 하다
    ④ 아이를 바위에 그의 부탁으로 묻으면서 콩 한 말 녹두 한 말을 함께 묻다.
    ⑤ 나라에서 장사가 났다는 말을 듣고 그를 죽이러 찾다
    ⑥ 아기장사의 엄마가 관리에게 유혹당하여 가르쳐 아기장사가 묻힌 바위를 가르쳐 주다
    ⑦ 바위 속을 열어보니 검은콩과 흰콩들은 군사가 되려고 하는 중이었다.
    ⑧ 아기장사와 그 군사들을 다 죽이다.
    ⑨ 아기장사가 죽자 근처의 못에서 용마가 나와 죽다.

    이 아기장사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는 도서지역은 신안군 안좌면 시서리, 신안군 안좌면 마명리, 완도군 보길면 여항리,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완도군 청산도, 완도군 신지도 송곡리 등이었다. 아기장사의 이름은 웃더리(시서리), 웃돌네(청산도) 등이었다. 완도군 보길도의 예송리에 났다는 아기장사는 부모가 절구통으로 눌러 죽여버렸다는 결말을 보이고 있으며, 예송리 앞에 있는 섬들의 이름이 기섬(군기를 흔들고), 말섬(또는 역마섬으로 불리고 있음. 말이 아기장사가 죽을 때 울었다는 이야기), 투구섬(군사들이 투구를 쓰고)이 있어서 아기장사이야기에 의해서 섬들의 이름이 명명되고 있었다.
    제3단계는 이름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는 민중영웅의 이야기들이다. 이들은 어쩌면 살아남은 아기장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압해도의 송장군, 유달산의 나송대, 고이도의 왕장군, 유달산의 장사 들처럼 분명하지는 않으나 점점 구체적인 인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압해도의 송장군이야기를 보면 마치 아기장사출현의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① 송장군이 압해도의 송공리 굴 속에서 땅위로 출생하다
    ② 굴 속에서 나오면서 짚은 손자국가 발자국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③ 역섬에서 나온 역마를 나고 가다
    ④ 송장군이 관군의 세곡선을 털어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다
    ⑤ 송장군이 짚고다닌 지팡이가 지금도 대창리 너머의 땅에 박혀있다.

    이들 민중영웅들은 중앙조정에 반역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잡혀 죽는 운명이다. 유달산의 나송대, 고이도의 왕장군, 유달산의 장사들이 모두 그런 운명이다. 아기장사이야기와 같은 구조인 것이다. 고이도의 왕장군은 죽음 뒤에 고이도 주민들이 당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당제를 지내고 있다.
    제4단계로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사·장군이야기다. 이들도 역시 불행한 최후를 마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압해도의 해적 능창, 완도의 해상왕 장보고, 후백제의 왕 견훤, 조선의 이순신 등이 그런 인물이라고 본다. 이들은 역사적인 실재성을 가지면서 민중의 이야기 속에서는 더욱 영웅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으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 하고 있다.

    2. 용신이야기 - 농경신과 해양신의 양면성 -

    서남해 도서지역마다 용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전승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용이야기는 이 지역에 보편적인 이야기로 전승되고 있으며 섬마을, 굴, 연못 등의 지명이 용과 관련되어 있는 곳이 많다. 도서지역에 전해오고 있는 이 용이야기는 용신신앙적인 의미를 띠고 있어서 용신이야기라고 부르고자 한다. 각 섬에서 개별적으로 산재한 용신이야기의 각편들은 용신신앙의 단편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 각편들을 종합하여서 서남해지역의 용신신앙의 전체적인 양상을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서남해지역의 용신이야기의 내용상의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설화의 각편들도 이 세 부분에 해당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제1부분: 용의 거처와 용신의 신체
    제2부분: 용의 승천과 그 증거물
    제3부분: 용신제의의 실행과 용신의 신력

    각 섬들에서 채록되는 자료들은 부분적으로 탈락하거나 부연되는 변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그 각편들을 종합하여 용신이야기의 복원이 가능할 것이다. 각개의 도서지역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이 서로 달라서 그 특수한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변이를 보이고 있다.

    제1부분: 용의 거처와 용신의 신체
    이야기 속의 용이 살고 있는 장소와 용의 모습에 관한 부분이다. 용의 거처는 여러 이름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서남해 도서지역이 용신이야기에서 용은 바다에서 살기보다는 주로 섬의 내륙에 있는 못에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곳은 섬의 해안에서 가까운 못으로 담수가 용출하고 있으며 섬의 농업생산에 필수적인 수자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비금도, 자은도, 임자도 등의 섬에 이런 못이 있으며 그 명칭은 용소(비금도 용소리), 용지샘(자은도 백길리), 용둠벙(완도군 고금도 용목골), 용새미 (하의도), 용담새미(하의도 봉도리), 용방죽(비금도 용소리)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용이 거처하는 못의 크기나 형태 또는 기능에 따라 명칭의 구분이 세분되고 있다. 용소, 용방죽, 용둠벙 등은 상당히 큰 못이며, 하의도의 용담새미는 바위아래에서 한 바가지 분량의 물이 일정하게 솟은 샘이며 청산도의 용지샘은 용지산 봉우리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에 사용하는 祭井이다. 이들은 모두 식수나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있는 담수이고 위치는 주로 해안가나 산봉우링 있으며 물이 귀한 섬에서는 주민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생활요소이다. 주민들이 섬에서 거주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것이 식수라는 점에서 이 연못이나 샘들은 주민들의 성소와 다름없는 공간인 것이다. 바다 속의 섬에서 담수가 용출하여 커다란 못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신비한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비금도와 자은도의 용소는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고 물결이 쳐와 해안의 모래가 용소를 짐식해 들어오므로 방호림을 조성하고 있다.
    이 못 속에 사는 용의 모습은 큰 뱀, 구렁이, 이무기, 새끼용 등으로 불리는 파충류인 뱀의 형태로 구술되고 있다. 이무기는 용이 되려다 어떤 저주에 의해서 되지 못하고 다시 천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큰뱀이다. 설화전승자의 구술을 들으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큰 뱀의 모습으로 형용되고 있다.

    " 큰 소락이라는 냇가에 배아지 비늘이 꼭 손바닥 둘만씩 해"
    "아 거기 가서 휘어댕긴 태를 보니까 꼭 이런 놈이 (한아름) 해가지고 아 저배가 지나가 면 파도를 갈고 가듯이 가는데"
    " 용이 아니라 일단 구랭이에 불과하다 이랬거든. 용이라면 씨염이 난데 왜 씨염이 없나 그랬단 말이여"

    냇가에서 용을 보았다는 제보자의 경험담들이다. 완도군 청산도의 용진산에 있는 용지샘의 용은 수염이 있다고 한다. 용신이야기의 전승자들은 섬의 못에 있는 용을 때를 기다리면서 잠룡의 형태로 숨어있는 뱀종류의 동물로 인식하고 있으며, 두려움을 가지고 외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금도 용목골의 용둠벙에 있는 용은 일본사람들이 용을 잡으려고 작살을 들고 물 속으로 들어가자 두 눈은 양은그릇으로, 몸둥이는 밧줄로 변신하여 위험을 피하고 있다. 용이 은신술을 쓴다는 것은 용신의 능력이 출중하는 것이다.
    한국의 서남해지역의 용은 승천한 때를 기다리면서 못 속에서 은신하고 있으며 위험의 순간에는 변신술로 극복하는 큰 뱀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주민들은 이 큰뱀의 존재를 모두 알고 있어서 직접 보기도 하고 간접적으로 뱀의 실존을 느끼는 이야기들이 형성되어 전하고 있다. 못 속의 용은 신안군 지도읍 감정리나 자은도의 용소처럼 부부용으로 암수 두 용이 있는 경우도 전하고 있다.

    2. 용의 승천과 증거물
    은신하고 있는 물 속의 용이 승천을 해야 비로소 용신으로서의 위력과 신격을 얻을 수 있다. 때를 기다리던 뱀이 용으로 승천하는 이야기들이 가장 많이 유포되어 전승하고 있다. 용의 승천은 대개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에 이루어진다.

    " 그 뱀이 올라간 지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됐을란가? 용이 간디 어덯게 올라가나 하며는 날이 이렇게 암시랑 안한 날인디 청명한 날인디.... 바루섬이라고 그 아래 독섬이라는 사이에서 올라가는디 아주 좋던 날이 뜬금없이 우중충하지만은 그랑께 이 근방은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고 그 올라간 쪽으로 비는 많이 떨어져. 그란디 파도가 많이 쳐 거기는... 이런디는 파도가 안 친디 거기는 물결이 확 일어나더라고. 그래 가지고는 인자 요놈이 싸악 올라가는디 아주 겁이 나게 흐칸 물질이 올라갔다는 , 그 놈이 올라갖고는 뒤로는 날도 좋아져 버리고 그 안 하더라고" - 용호리 바구, 보길도의 구비문학자료, 도서문화 제 8집, 2000-

    제보자가 용이 승천하는 광경을 직접 보았다는 구술이다. 좋은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는데 용이 올라가는 장소인 바루섬과 독섬 사이는 더욱 파도가 치고 비가 쏟아지고 물결이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이 발새아고 하얀 물기둘(흐칸 물질)이 올라가는 상황으로 구술되고 있다. 이 현상은 마치 동해상에서 가끔 일어나는 "용오름"현상과 흡사한 광경이다. 용오름현상은 일종의 기상이변으로 바다에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거대한 물기둘이 솟구치는 현상으로 동해에서 볼 수 있다. 용이 승천하는 광경으로 보았다고 구술하는 화자들의 표현은 신비체험을 경험한 사람의 격정적인 열기에 차 있음을 본다.

    " 봄에 해어름 참에 막 올라가는데 용 올라간다고 그러드먼. 그런디 막 도구태만 해, 이만하드만, 송공이산 고랑에서 올라간다고 그러드만. 막 이렇게 이렇게 막 헤치믄서 올라갑디다. 저그 용 올라간다고 송고이 저 거시기 당사골 꼬랑에서 용 올라간다고"

    구술자 (박금단. 여 70세, 압해도 송공리)는 용의 승천을 아주 실감있게 손으로 하늘을 가르키면서 이야기하였다. 신비체험을 한 사람만이 가지는 긴장되고 열딘 표정과 자세를 보이면서 박금단은 자기 뿐만아니라 주위사람들이 모두 보았다고 하였다. 용신에 대한 숭배가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의 승천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용의 승천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을 보고서 간접경험을 한다. 용이 날아오른 장소에는 용의 흔적들이 남는다. 용이 날아올랐다는 섬과 바위굴 등은 그 명칭이 용과 관련되어 명명된다. 용남섬(완도군 생일도), 용출동(신안군 가거도 대리), 용출암(신안국 임자도 광산리), 용난굴(신안군 임자면 광산리), 용난끝(신안군 하의도 농산1리), 용호리바구(용오리바구)(완도군 보길도 여항리), 용구멍(신안군 비금도 용소리 성치산) 등으로 이름지어져 용이 승천의 증거물로 전승한다. 용호리바구, 용난끝의 지명은 해안가나 산이 정상에 있는 암벽에 용의 발자국과 몸이 스쳐간듯한 흔적이나 자국이 나 있거나 바위 암벽에 뚫린 굴이기도 하다. 해안가의 암벽에 난 용의 흔적은 붉은 색깔의 바위가 깨어져 있으며 암맥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이런 지형을 "불등(뿔등, 불치, 뿔치)"로 부르고 있다. 바위의 색깔이 붉어서 그런 이름이 명명되었을 것이다. 불등이 있는 지역은 용이 승천하면서 암벽을 꼬리로 쳐서 바위가 부셔졌다는 이야기가 전승한다.

    " 지금 저- 뒤에 산봉아리 보믄은, 여그 용방죽에서 살다가 용이 그 바우를 히쳐서 요리해서 나갔는디, 바우가 거녕이 동-그마나게 뚫어져 갖고 가운데가 여그 있는 돌모양으로 동그맣게 산 모양으로 있어. 또 그 구녁이 용구녁이여." (비금도 용소리)

    비금도 용소의 용이 성치산의 정상에 있는 바위를 뚫고 승천하였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용이 승천하면서 남긴 흔적의 형태에 따라서 용굴이나 용바위 등으로 불리운다. 용이 승천하면서 바위를 꼬리로 쳐서 바위에 남은 흔적이나 땅에 남은 흔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승하고 있다. 용이 마지막 힘을 다해서 꼬리로 바닥을 치고 하늘로 솟구치는 광경을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산위의 바위에 뚫린 동굴은 흔히 돌맹이를 던지면 물소리가 난다는 화소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용의 거처이던 용소와 굴이 이어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이 승천할 때 도와주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갚고 방해하는 사람에게는 복수를 하기도 한다. 승천하기 위해서 나와 있는 용에게 "용님"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서 승천할 수 있게 된 용은 수많은 재산을 주어 부자가 되게 하고,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고 소리쳐 용이 승천할 수 없게 만든 처녀에게는 평생을 섬에 늙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도록 보복하는 할미섬이야기가 신안군 장산면 다수리 할미섬에서 전승하고 있다.

    3. 용신제의의 특성
    승천한 용은 인간들이 신앙하는 용신으로 승격되어 신력을 발휘하고 제의의 대상이 된다. 용신이야기는 용신신앙의 신화제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용신이야기는 용소나 바다의 뱀이 용신으로 좌정하기까지의 신화적인 성장과정을 담고 있다. 신안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서남해의 용신제의에 관한 이야기는 기우제이야기와 풍어와 항해안전을 기원하는 용왕신이야기가 있다. 현장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기우제자료가 더 우세한 것은 서남해주민들의 생활이 설화형성 당시에 어로보다 농경생활이 주라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도서지역의 용신이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기보다는 도서내륙에 있는 못, 샘, 방죽, 소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신의 농경적 성격이 짙다.
    일반적으로 신안군의 비금도, 암태도, 도초도, 안좌도, 장산도, 자은도, 하의도, 임자도 ,지도 등의 주민들이 농경생활을 주로 하고 있으며 어로작업은 오히려 부업에 가까운 생활이었던 점은 도서지역의 용신을 해양신보다는 농경신으로 더 신앙하게 되었다고 본다. 도서지역의 입도조들이 섬에 들어온 동기가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이주해 온 사례가 일반적이었다. 도서지역의 용신이야기가 두봉산과 최치원의 기우제에서 보듯이 농경신의 성격이 짙다. 어로와 해양안전에 관한 해신으로서의 용신은 농경신적인 신격에서 확장되어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부들이 올리는 선왕제, 풍어제, 용왕제 등이 모두 마을의 당신이나 산신에게 먼저 행제한 후에 그 다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도서민들이 일반적으로 主農從漁의 생활을 해왔음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완도 청산도의 용진산의 용지샘 기우제는 가뭄이 들면 청산면 주민들이 모두 나서서 제비를 염출하고 산돼지를 제물로 바치면서 거도적으로 지냈다고 한다. 신안군 비금도의 성치산 기우제, 우이도의 기우제, 자은도의 두봉산 기우제 등 도서지역의 산봉우리는 거의 기우제터이다. 섬주민들에게 농업용수와 식수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현재도 가뭄이 들면 목포항에서 신안지역으로 식수를 실어가는 행사가 연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남해의 용신이 해양신보다는 농경신적인 성격이 강한 점은 의외이면서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3. 섬지역에 문화를 전파한 인물들의 이야기

    신안군 자은도에 두사춘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히 광범하게 전승되고 있다. 두사춘은 이여송 휘하로 조선의 임진전쟁에 참가하였다가 이여송의 막하에서 탈출하여 영광, 지도 쪽으로부터 표류하여 와 자은도의 한운리에 표착한 후에 자은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풍광을 보고 마을이나 산의 지명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일부 설화전승자들은 두사춘이 오기 전에는 자은도에 이름이 없이 지내다가 그가 처음으로 본섬이나 마을 이름 들을 지어 주었다고 하기도 한다. 이처럼 서남해의 다른 도서지역에서도 외부로부터 들어아 섬지역에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는 문화전파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형성되고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들의 면모를 보면 입도조, 유배인, 승려, 지사(지관), 상인 등이다.
    입도조는 특정한 섬에 맨 처음으로 들어와 개척하여 정착한 인물을 말한다. 어느 섬에나 입도조에 대해서는 존경스러운 태도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입도하게 된 동기는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서 인근의 해안지역에서 이주하였으며, 역적으로 몰려 관의 눈을 피해서 도피해 오기도 하였으며, 난을 피해서 들어온 경우도 있으며, 유배오기도 하였으며, 혼인으로 인해서 들어오기도 하였다. 현재 서남해 도서들의 입도조들은 17세기초에 왜란이 종식된 후에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이해준, 도서지방의 역사문화적 성격, 도서문화 제7집, 1990) 입도조이야기는 마치 시조신화의 주인공같은 정서로 구술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는 경상도 동해안 지역에서 골매기신이 마을을 창시한 인물이나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인물을 신격화한 것으로 마을 수호신으로 삼고서 매년 음력 정월 15일이나 10월에 골매기동제를 지내는 경우와 흡사하다. 입도조는 각 섬의 최초의 문화창시자라는 점에서도 주민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으로 인식될 것이다.
    섬에 유배온 인물들이 주민들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주고 주민들을 훈도하여 새로운 문화전파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신안군에서 대표적인 유배인으로 조선말에 흑산도에 유배온 최익현과 정약전을 들 수 있다.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에 서당을 만들어서 주민들에게 신학문과 천주교를 가르쳤으며, 우이도에서 표해록,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최익현 역시 흑산도에 유배와 천촌리에 오두막을 짓고서 유학적인 충효의 질서를 주민들에게 훈도하여 흑산듸 혼인장제의 예의범절이 서울에 못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상 그분은 놀 때도 잠을 잘때나 편히 좀 쉴 때도, 임금님이 계신 북쪽으로는 절대 발은 뻗지 않고, 꼭 북쪽으로 이렇게 머리를 두르고 지내신 이런 분이었습니다." (최덕원, 최익현설화, 한국구비대계 전남편 Ⅱ, p533)

    해방이 되고 나서 최익현 제자들의 후손들이 면암을 기리는 비를 천촌리에 세운다. 이처럼 유배인들이 도서주민들에게 학문이나 도덕과 윤리 측면에서 영향을 끼치고 직접적인 교육을 통해서 훈도하여 도서민들의 문화적인 욕구을 충족시키고 그 위상을 높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이 높은 유배인들은 유배지 섬의 문화적인 지도자가 되고 주민들은 그 영향으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유배인들은 설화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이야기의 형성자라고 할 수도 있다.
    승려들도 도서지역 주민들을 만나서 불법을 전파하고 주민들의 생활에 여러 조언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려에 대한 이야기가 도서지역설화에 상당한 빈도를 가지고 나타난다. 제방을 막으면서 인신공희를 하라고 가르쳐 주기도 하고, 묘자리의 혈을 끊어서 악덕부자를 징치하기도 하면서 도서지역의 문화에 충격을 신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항해하다가 기항하는 어부, 옹기배 상인, 항해자 등도 섬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정보를 교환하고 섬지역에 새로운 문화적인 충격을 주는 이야기들도 있다. 청산도 어부들이 홍도에 가서 그물에 들어올린 두 개의 묵적돌을 미륵돌로 삼고 미륵제를 지내는 이야기는 불교적인 신앙의례를 홍도에 전파한 이야기다.(미륵당골전설, 구비대계 전남편, 신안군 흑산면 설화) 흑산도 진리당에 옹기를 팔러온 옹기배의 화장인 총각이 당각씨에게 접신되어 종내를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 당에 묻힌 진리당이야기는 옹기배상인이 흑산도 주민들에게 민간신앙적인 영향을 끼친 경우이다. 최치원이 항해자로서 중국으로 가는 길에 서남해 도서지역을 경유하면서 비금도에 가뭄이 들자 고운정이라는 샘을 파고, 우이도에서 기우제를 지낸 이야기들도 그의 학문적인 영향을 이 섬들에 끼친 예라 할 수 있다. 비금도의 고운정은 현재도 실존하고 있다. 이들 이외에도 섬 밖의 내륙인이나 표류해온 이국인 항해자나 이웃 도서민들이 왕래하면서 도서의 문화는 더욱 다양해졌을 것이다.

    Ⅳ. 글을 마치면서

    "바다를 지배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이고, 이 말은 해양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 자주 인용되곤 한다. 바닷길을 타민족이나 타국을 지배하기 위한 통로로 삼았던 시대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침략과 수탈의 길로 바다를 이용하던 시대, 금과 향로와 갖가지 보화를 탈취하기 위한 대항해시대의 컬럼버스, 마젤란, 바스코다가마와 같은 모험가의 시대에 통용되던 말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바다는 더 이상 험한 길이 아니다. 바다는 육지처럼 안전하고 가는 길이 뻔히 보이는 통로가 되었다. 바다는 더 이상 침략의 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항해시대의 바다는 타민족을 지배하고 타국을 점령하기 위한 침략의 길이었다. 전설시대의 바다가 막막하고 막혀버린 공간으로 묘사되고 힘없는 사람의 눈물이 가득한 바닷길이 되었던 것은 침략의 길로 바다가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신화시대의 바다는 민족과 민족이 서로 오가면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교류하던 평화의 바닷길이었다. 그 바닷길은 상대방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문화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았던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통로였다. 제주도의 삼성신화, 수로왕비 허황옥의 도해이야기, 탈해왕의 도해이야기, 미황사창사이야기 등에서 그런 예를 볼 수 있었다. 농경문화의 전래, 새로운 국가제도의 도입, 새로운 종교인 불교의 도해 등이 바다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우리는 해양신화에서 볼 수 있다. 해양전설에서 보는 막혀버린 바다, 쫓기는 사람이 가는 바다가 아니라 해양신화의 바다는 교류와 발전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열린 바다였다.
    이제 다시 바다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띠어야 하는가? 새로운 해양신화의 창출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침략과 수탈이 아니라 문명과 문화가 교류되고 사람과 물자가 오가면서 부를 이룩하는 발전의 바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비롯한 동양의 역사에서 海禁의 시대가 있었다. 침략세력을 막기위한 고육책이었다. 오늘의 바다는 육지와 다름없는 활동공간이 되었다.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출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바다는 인류문명의 전파길이며 막대한 부를 이룩하는 무역의 길이다. 한국의 새로운 해양신화가 탄생하는 21세기의 바다를 기대한다. 21세기의 바다에서 새로운 탈해, 새로운 허황옥, 벽랑국에서 온 새로운 세 처녀의 이야기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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