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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우봉 조희룡의 생애(고경남) 관리자 2006/3/6 6366


    신안문화 13호(2003년)-신안의 문화인물

    유배지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우봉 조희룡의 생애

    고경남(목포대 대학원 민속학전공)


    1. 서 론
    2. 조희룡 어록
    3. 조희룡 초상화
    4. 조희룡은 누구인가
    5. 대표작
    1) 홍매도 대련
    2) 유배지 그림
    3) 물가 구름집 겨울(淄雲館冬日-치운관동일)
    4) 천하의 노동하는 사람을 위하여(慰天下之勞人)'과
    추사의 '난을 그리지 않았다(不作蘭圖)'
    6. 결 언

    1. 서론
    조희룡은 여러 종류의 글을 썼다.
    그러나 어렵기 그지없고 내용들도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다. 우연이 아니라 감추려 함이었을까? 그의 삶을 알려면 일단 일목요연한 일대기 구성이 선결과제였다.
    본 일대기는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에서 역주한 '조희룡 전집' 내용 중 화구암난묵, 우해악암고, 수경재 해외적독, 한와헌 제화잡존, 석우망년록, 호산외기, 일석산방 소고, 우봉척독 중에서 연대기와 관련된 부분을 해체, 새로이 구성한 것이다.
    거기에 학자들의 연구결과, 평양조씨 족보, 후손들과의 면담결과, 최근 발견한 임자도내 적거지 만구음관의 이야기를 추가하였다. 그러나 내용의 변경을 최소화하여 자료로서도 손색이 없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 조희룡 어록
    검속이 일변하여 환락에 이르고, 기쁨이 일변하여 취함에 이르고, 취함이 일변하여 글씨에 이르고, 글이 일변하여 그림에 이르고, 그림이 일변하여 돌에 이르고, 난에 이르고, 미친 듯 칠하고 그어댐에 이르고, 권태에 이르고, 잠에 이르고, 꿈에 이르고, 나비의 훨훨 날음에 이른다.
    많은 이가 묵매를 공부했다. 하지만 '양무구'라는 사람만이 매화 그리는 법을 창안하였다. 그 법을 이어받은 '석인제'는 "40년만에 비로서 원숙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모여원' 등이 매화그림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꽃이 드문 것을 구하고 번잡한 것을 그리지 않았다. 천 송이 만 송이의 꽃을 그리는 법을 황회계로부터 시작하여 근래에 이르러 극성하였다. 나의 매화그림은 청나라 화가인 '동이수'와 '나양봉' 양인 사이에 위치한다. 그것이 나의 매화치는 법이다.
    매화를 그릴 때 얽힌 가지, 오밀조밀한 줄기에 만개의 꽃잎을 피게 할 곳에 이르면 나는 용의 움직임을 떠올리면서 크고도 기이하게 굽은 변화를 준다. 용 그리는 방식을 매화그림에 도입하여 그리는 것이다. 그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은하수로 알 것이다.(호암미술관 보관-홍매도대련)
    강설재에 비바람이 불었다. 대룡과 소룡이 연지에서 일어나 푸른 산호를 다투어 움켜쥐며 붉은 여의주를 토해내고 있었다. 어리석은 꿈속에 황홀이 빠져 있다가 깜짝 놀라 깨어보니, 크고 작은 홍매화가 작은 방안에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3. 조희룡 초상화
    - 1861 유숙이 그린 '벽오사 소집도'에서
    - 조희룡의 모습은 30대 이미 대머리가 되었고 네모얼굴에 성긴 수염과 칠척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엉성 삐쭉한 그에게서 휘적휘적 학 나린 들판의 가을구름이 연상되었다 한다.

    4. 조희룡은 누구인가
    조희룡은 1789. 5. 9 (정조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평양조씨 첨추공파로서 조선 개국공신 조준의 15대 손이다. 조상연과 전주 최씨 사이 삼남일녀 중 장남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조덕인은 인산 첨사를 지냈고 그의 아버지는 '풍요삼선'이라는 문집에 시가 오를 만큼 집안이 독서와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이력으로 보아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된다. 그는 어릴적 때 키만 크고 비쩍 마르고 약하였다. 옷조차 못이길 정도였다.
    조희룡은 생애를 관류하는 기본정신으로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으리'라는 '불긍거후(不肯車後)'의 정신을 갖고 있었다. 이 정신에 따라 그는 자신의 스승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스승으로 모시지 않되 동시에 모든 이를 스승으로 삼아 화리를 학습해 나갔다. 그는 얻은 지식을 그대로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타인의 업적을 수용, 자신만의 독창적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시서화 분야에서 남이 열어놓고 닦아놓은 익숙한 길을 편안히 가지 않은 것이다.
    조희룡이 활약한 시기는 소동파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문인화관의 회화이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시와 글과 그림을 별개로 보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조희룡도 시서화 일치라는 문인화관을 갖고 앞시대 선인들이 집착하였던 풍속화나 진경산수화라는 우리나라만의 지나친 특수성을 배척하고 선진문화이론을 수용하는 등 문화예술의 보편적 세계화를 선도하였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따라 시서화에 모두 능한 '시서화 삼절'이 다수 배출 되었으며 조희룡도 조선말 대표적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진다. 조희룡은 시로는 '우해악암고', 글로는 '화구암 난묵'과 '수경재 해외적독', 그림에 관한 것으로는 수많은 그림을 그리고 화제집인 '한와헌제화잡존' 까지 썼다.
    조희룡은 시서화 일치를 추구하는 가운데서도 특히 매화그림에 발군의 역량을 보였다. 그는 매화그림에서는 따라갈 자가 없던 천재였다. 이전까지 간략하면서도 정돈되어 있던 매화도의 구도가 그에 이르러 복잡해지고 웅장해졌으며 기존의 단아하고 소박한 꽃잎과 단순한 줄기의 표현은 그의 그림 속에서는 활달하면서도 섬세한 기교로 변해갔다. 고목등걸에 연분홍 입술연지 같은 꽃을 피워 올린 그의 묵매도는 먹이 피워 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황홀하게 이르러 있다. 그가 자신의 벼루에 새긴 "한 조각 검은 돌로 천하에서 가장 흰 매화 그려낸다."는 명문(銘文)처럼 그의 매화는 검은 곳에서 피어오른 순결한 백색과 도가의 상징색인 붉은 홍의 세상이었다.
    특히 홍매화의 홍은 단순한 색깔이 경지를 넘어섰다. 그의 매화에서는 내면에 가득 차 있는 그윽한 향기와 발군의 색감과 고결한 영혼이 느껴진다. 현대 미술 평론가 최열은 "조희룡 이후 조희룡만큼 흐드러진 매화그림을 그린 이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19세기 중엽 화단에 우뚝 서서 화려하고 섬세하며 풍요로운 양식의 매화를 그렸고 그것은 '조희룡 고유의 양식'이라고 평한다. 조희룡의 중국화가들인 '동이수'와 '나인봉'의 화법을 배워 그들의 중간지점에 주조된 하나의 세계로서 '정륙매화'를 창안하였다. '천개 만개의 꽃이 핀 조희룡의 장륙매화'는 조희룡 앞에서는 누구도 가까이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다. 그 역동적이고 풍성함이 어느 누구의 매화와도 획을 달리한다. 그만의 감각적 세계가 난만하게 살아서 움직인다.
    조희룡은 중앙무대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고금의 화풍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열어갔다. 당대 문화예술인들은 규합 조직화하였고 시서화 운동의 변혁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적 역할을 자임하였다. 화단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조희룡에 대해 후대 인사들은 그를 '묵장의 영수'라고 평하였다. 오늘날의 말로 문화예술계의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조희룡을 빼고 19세기 후반 문화를 이야기 할 수 없다.
    조희룡의 활동으로 당시 최고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집단적 규합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비록 정치적 성향은 짙지 않았으나 조희룡과 추사 김정희, 오규일 등 문화예술계의 중심인물들이 당시 양대 세도정치가문 중의 하나였던 풍양 조씨 지지자였던 영의정 권돈인과 밀착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의구심을 가진 안동김씨 가문은 1851년 권돈인, 김정희, 오규일 등을 각각 유배 조치하게 된다. 조희룡은 이들과 함께 1851. 8. 22 신안군 임자도 이흑암리 은동에귀양갔다가 1853. 3. 18 풀려났으며 1866. 7. 11 사망하였다.
    조희룡은 주요한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임자도 유배전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전기를 기록한 호산외기, 유배일기인 '화구암난묵'과 유배시집 '우해악암고' 그리고 유배지 서간문집인 '수경재해외적독', 화제모음집인 '한와헌제화잡존', 산문집 '석우망년록'을 저술하였다. 이들 저서에는 당시 19세기 여항인의 모든 것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기에 그의 저서들은 중생대 쥬라기의 공룡화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화석을 통해 공룡의 모든 것을 연구할 수 있듯이 조희룡이 역사에 있어서 기록의 중요성을 십분 의식하고 남긴 저술을 통해 19세기 문화계 전반과 당시 인사들의 사상체계를 샅샅이 알 수 있다.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가 진도출신의 제자를 두었음을 의식하였음인지 유배지인 신안군 임자도에서 홍재욱과 주준석을 공식제자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섬 지방에서 자시의 시서화 유파를 번성시키라는 '해외공안(海外公案)을 주었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 허련이 진도에 운린산방을 짓고 스승의 화맥을 이어 남종화를 꽃피운 것과는 달리 조희룡이 '물고기와 새우의 고장에서 얻은 아름다운 젊은이'라 부르며 혈육 보다 더욱 사랑했던 그의 제자들의 뒷이야기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만구음관)

    5. 대표작
    조희룡의 모든 시서화의 핵심은 즐거움의 추구라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즐거움을 찾고 시를 감상함으로써 즐거움을 찾고 글을 읽음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즐거움의 추구는 조희룡에 있어서 화두에 해당 된다 할 것이다.

    1)홍매도 대련
    호암미술관에는 '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 145X42.2 cm)'이라는 걸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두 폭으로 마주보게 그린 역작이다. 이 그림은 수천 수만 송이의 홍매화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화려한 매화줄기, 그림에서 쏟아져 내리는 이질적 규모감을 갖고 있다. 이 대련은 매화꽃이 그림의 주제인가 줄기가 주인인가에 대해 헷갈린다. 눈을 떼어 멀리서 보면 줄기가 살아 꿈틀거리고 가까이 다가서 보면 붉은 꽃송이들이 천 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래된 등걸이 핀 몇송이의 일반적 매화도와 홍매도 대련 사이에는 커다란 차별의 강이 흐르고 있다.
    조희룡은 매화그림의 변천과 자신의 위치에 대해 '모두들 단촐하게 몇 송이의 매화만을 그렸으나 '황회계'라는 화가가 수천수만송이가 핀 매화그림으로 발전시켰다. 나의 매화도는 이 범주에 속하고 정확히는 동이수와 나양봉이라는 두 호가 사이에 위치한다.'라는 말로 정리하였다.
    조희룡은 매화줄기를 격렬히 요동치는 용의 형성에서 따왔고 꽃은 매소이 마다 소우주인 부처님의 마음을 담아 형상화하였다. 우주로 비상하는 용의 역동성과 모든 이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천수관음과 같은 부처의 자애로운 마음을 형상화함으로써 철처럼 강한 육신과 500년이 넘는 壽가 세상의 수고로운 이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랐다.
    홍매도 대련은 조희룡의 자부심이다. 과거 어느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한 것으로서 새로움이 창조이다. 홍매도 대련이 주는 닿지 못한 것으로서 새로움의 창조이다. 홍매도 대련이 주는 당혹감과 이질감의 실체는 기존의 것을 모두 수렴하고 자기의 것을 창조해낸 조희룡의 예술세계가 던져주는 새로움으로부터 온 자극이다. 145X42.2 cm의 크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규모감은 부처와 용이 살아 움직이는 삼라의 공간감으로부터 온 것이다.

    2)유배지 그림
    조희룡의 '거친산 찬구름'과 뭉크의 '절규'는 조희룡 자신의 적거지 만구음관에 대한 그림을 두 점 남기고 있다. 유배 초기에 '거친산, 찬구름 그림'(124cmX26cm, 개인소장)을 그렸다. 그는 이 그림에 "외로운 섬에 떨어져 살다. 눈에 보이는 것이란 거친산, 고목, 기분 나쁜 안개, 차가운 공기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필묵에 담아 종횡으로 휘둘러 울적한 마음을 쏟아놓았다. 화가의 육법이라는 것이 어찌 우리를 위해 생긴 것이랴" 하고 써두었다. 화법에 매임없이 마음껏 휘둘렀다는 뜻이다. 임자도 유배기간 중에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조희룡이 갖고 있던 두려움과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림 전체가 공포에 휩싸여 있다. 피할 수 없는 무서움이 그림 전체를 감싸고 있다. 위안이라면 조희룡이 거주하는 자그마한 집뿐이다.
    조희룡의 '거친산 찬구름 그림'을 보는 느낌은 서양화가 뭉크의 '절규'(1893)를 볼 때 느끼는 감정과 흡사하다. 이 작품에 대해 뭉크는 "어느날 해질녘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한족으로는 시가지가 펼쳐져 있고 다리 아래로는 강줄기가 돌아나가고 있었다...... 구름이 핏빛으로 물들어 올랐다. 그때 나는 하나의 절규가 자연을 꿰뚫고 지나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나는 절규를 들었다."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두 화가의 공통적 정서가 그림에서 묻어나온다.

    3)물가 구름집 겨울(淄雲館冬日-치운관동일)
    마음의 평온을 찾은 유배 후기에는 "물가 구름집 겨울'(淄雲館 冬日, 22.0X27.6cm)을 그렸다. 서울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방운림산수도( 雲林 山水圖)라고도 한다. '운림 예찬'이라는 사람의 산수화 기법을 모방하여 그렸다는 뜻이다. 피마준과 미점을 사용하여 표현된 산과 낮은 언덕, 간단하게 처리된 가옥의 모습은 전형적인 남종화 풍을 보여주고 있다. 간결한 필치로 쓸슬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잘 살려내었다. 앞에 두 그루의 큰 나무를 세워 근경을 이루고 있으며 집 뒤로는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있다.
    하천하나에 양쪽 언덕구도에 나무와 초옥을 배치하였다. 근경의 나무와 촐옥, 중견의 강, 원경의 나지막한 산으로 특징 지어진다. 이러한 산수도는 중국에서 원말에 예찬에 의하여 그 전통이 확립된 아래 청나라 시대에는 문인을 중심으로 하여 그려졌다. 조희룡의 이 그림은 중간의 강이 생략되어 원경의 산과 근경의 나무와 초옥이 겹치게 그려져 있다. 또 이 당시의 예찬식 산수도에는 초옥뒤에 대나무가 의도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이 특이하다. 황산냉운도의 위기감과는 달리 이 그림에서는 평화감이 풍겨나온다. 이러한 마음의 안정은 그가 유배 2년째부터 얻은 것으로 보아 1852년 겨울에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치운관 겨울'은 현재 임자면 이흑암리에서 확인된 만구음관의 위치와 가옥구조, 나무형태, 주위 경치, 지형이 놀랄만큼 닮아 있다. 나무 두 그루는 팽나무이며 지금은 늙어 없어지고 말았다. 진경산수화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4)천하의 노동하는 사람을 위하여(慰天下之勞人)'과 추사의 '난을 그리지 않았다(不作蘭圖)'
    조희룡과 추사 김정희는 경쟁 대립관계의 있었다. 두 사람이 나이 차이는 세 살 터울로 추사가 형뻘이다.
    조희룡의 그림과 추사의 그림은 지향하는 포인트가 달랐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청나라의 시서화 일치라는 화법을 도입한 점이었다. 요즘말로 말하면 예원의 세계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공통점은 거기까지였다.
    중앙무대에서 호라동하던 조희룡은 창조를 강조하였고 유배중이던 추사는 극기를 강조하여하였다. 조희룡은 봄날의 연분홍 매화를 그렸고 추사는 겨울을 이겨내는 솔의 푸름을 그렸다.
    추사는 10여년의 귀양생활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그는 '시련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를 최고의 가치로 보게 되었고 그의 예술 작품에 이를 형상화하였다. 제주도에서 의제 겨울 속 추위에 떨고 있으며 세한도를 그리고 있던 추사의 눈에 조희룡 일파의 작품들은 온실 속에서 자라는 장다리꽃으로 보였다. 제주 유배시절 추사는 그의 아들 김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희룡과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쏘아댔었다. 비밀스러운 겨울비평에 그의 심정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난초를 치는 법은 역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치는 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畵法)이 있다면 그 화법 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과 같은 이들이 내 난초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氣)가 없기 때문이다."

    조희룡은 이러한 추사란의 외골성과 엄혹성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난은 구김살 없이 성정하는 그윽한 아름다움이었다. 간송미술관 소장 조희룡의 묵란도 화제에 그의 이러한 생각이 과장하게 표현되어있다. '20년 동안이나 난을 치지 못하다가 우연히 그렸다'는 추사 부작란(不作蘭)의 과장법과 조희룡이 마치 반발하듯이 써놓은 '부작란을 조롱하는 과장법'이 멋있게 대조된다. 당대 예원을 주도하던 양웅의 진검승부라 할 수 있다.
    "난초가 반이나 피었네. 화분의 보살핌 덕에 물난리라고는 모르네, 말라서 비틀림도 겁내지 않네. 연지물 남았기에 난초 그려 구경하세. 묵보배를 빼내듯이 주보배를 감싸듯이 몇 번이나 병든 잎을 도려냈나. 새줄기 쭉쭉 푸른 비취가 돋아 오르듯 봄의 꽃모습을 그려내지. 추위가 어떻던가는 못 그린다네. 가을 길가 들난초 묶음이야 난초라는 이름 뿐. 다섯 푼 값도 못되고 말고."

    추사란을 평가절한 한 것이다. 부작란과 같이 말라비틀어진 가을 들난초의 아름다움은 특수한 아름다움이었지 보편적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조희룡의 난은 거울을 바투어 흐트러지지 않은 단아한 연인의 보편적 아름다움이었다. 조희룡의 난에는 '분노하는 기운으로는 대를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는 난을 그린다'는 즐거움이 있으며 집착을 깨며 희열을 느끼는 따스한 봄날의 열린 유희가 있는 것이다.

    6. 결언
    추사 김정희가 진도출신의 제자를 두었고 친하게 지내던 형 이재관이 일본에 화조도의 유파를 두었음을 의식하였을까? 그는 임자도에 두 명의 제자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섬지방에 자신의 시서화파를 번성시키라는 임무를 주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른다면 '해외공안'(海外公案)을 맡긴 것이다. 그와의 대칭점, 조희룡과는 달리 조선의 앞마당에서 고관대작으로 활약했던 김정희의 제자 허련은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스승의 화맥을 이어 이 땅에 남종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조희룡이 '물고기와 새우의 고장에서 얻은 아름다운 젊은이'라 부르며 혈육 보다 더욱 사랑했던 임자도 두 제자의 이야기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정희와 조희룡, 김정희의 대표작인 '부작란도(不作蘭圖)'와 조희룡의 대표작 '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그린 '세한도(歲寒圖)'와 조희룡이 임자도에서 그린 '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 진도와 신안군, 허련 이후 번성한 호남 남종화와 두 제자의 역사공간으로부터의 실종. 이처럼 마주치는 대칭점은 맞꼭지각처럼 선명한데 두 제자의 영역만이 안개 속에 흐릿하다. 은하수가 되어 흐르는 천만송이 홍매(紅梅)화 중 스승과 제자의 꽃별은 어느 것인가? 홍재욱, 주준석 ! 그대들은 그대들이 받은 해외공안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듣고 싶다. 두 제자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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