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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흑산도와 유배의 삶 관리자 2006/3/6 14823


    <흑산도 문화탐방>-신안문화 13호(2003년)

    흑산도와 유배의 삶

    김 정 섭(향토사학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지난 여름 신안문화원 최성환 사무국장을 따라서 흑산도 문화탐방을 떠났다. 일행은 근대생활연구가인 민영철 선생, 해남 향토사학자인 정윤섭 선생과 함께였다. 최국장은 앞으로 흑산도의 아름다움과 문화유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책자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번 답사는 그러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과정의 시작인 셈이었다. 네 사람은 각자가 흑산도를 답사한 소감을 글로 써서 문화원에 제출한다는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고 여행을 출발하게 된 셈이었다.

    197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에 당시로서는 굉장히 빠르다고 했던 "향남호"라는 배를 타고 5시간 이상이 걸렸던 흑산도를 생각하며 배에 올랐다. 그런데 2시간이 채 못되어서 흑산도에 도착하게 되자 세상이 변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선착장의 위치도 바뀌었고 새로 즐비한 상가건물하며 항구를 에워싸고 있는 방파제 등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흑산도 지킴이 이영일 선생이 마중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일행은 자산문화도서관에 먼저 들려 흑산도의 자연환경과 지리적인 개관을 들은 후, 이영일 선생이 흑산도 답사안내를 위해 특별히 마련했다는 차량을 타고 흑산도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특히 관심을 두었던 부분은 서남해의 고도와 다름없는 흑산도에 유배되어 외롭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학구적 성취를 이루고 서당을 세워 학동들의 교육에 힘썼던 손암 정약전 선생과 면암 최익현 선생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일이었다. 비록 짧은 여정의 탐방길이었지만, 안내를 맡은 이영일 선생의 고향에 대한 애정과 빠른 기동력 덕분에 꽤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흑산도라는 섬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정약전과 자산어보
    먼저 손암 정약전(巽庵 丁若銓) 선생의 흔적을 찾아보자. 정약전은 1758년(영조 34년) 경기도 마현(지금의 남양주시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 1730-1792)과 공재 윤두서의 손녀 해남윤씨(1728-1770)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삼웅(三雄)이요.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 연경재(硏經齋), 본관은 나주(羅州)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중형(仲兄)이다. 1783년 진사가 되었고, 1790년 증광별시에 급제하여 초계문신이 되었다. 1797년에는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이벽(李檗), 이승훈(李承薰)등과 교유하며 역수학(歷數學) 등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접하고 카톨릭에 입교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교에 힘썼다.
    1801년(순조 1년)봄에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정약전은 신지도(薪智島)로, 정약용은 장기(長 )로 유배되었으며 정약종, 이승훈은 참수되고 이기환, 권철신은 옥사하였다. 그 해 9월에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이 발생하여 황사영 등 관련인물은 참수되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11월 하순 나주성 북쪽 율정점(栗亭店)에서 형제가 이별한 후 정약전은 우이도(牛耳島)에 정착했다. 우이도에 정착한 정약전은 "몽학의휘(蒙學義彙)를 저술하고 송정사의(松政私議)를 저술하였다. 또한 1805년에서 1816년 사이에 우이도에서 살던 어상(魚商) 문순득(文淳得)이 1801년 12월에 표류되었다가 1805년 정월에 돌아온 표해 과정과 유구(琉球; 오끼나와), 여송(呂宋; 필리핀) 지역의 풍속, 가옥, 의복, 선박, 토산, 언어 등에 관한 그의 진술을 토대로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1807년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거주를 옮긴 손암은 모래미(沙邨)에서 서당 복성재(復性齋)를 열어 후학들을 양성하였고, 무엇보다 1814년에는 현산어보(玆山魚譜)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이 밖에 논어난(論語難) 2권과 역간(易柬) 1권 등을 저술하였다고 알려졌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손암은 동생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육지에서 조금 더 가까운 우이도로 다시 돌아가서 살다가 1816년 향년 5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손암의 흑산도 유배생활 중 서당을 세워 학동들을 가르치는 일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우리나라 고수산문헌(古水産文獻) 중의 하나인 현산어보의 저술이다. ('현산어보'는 그간 '자산어보'로 발음되었는데, 최근 학계의 추세에 따라 이 글에서도 현세어보로 표기하였다.) 현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1801-1816)되어 사망할 때까지 15년 간 흑산도(우이도 포함) 연안에서 생산되는 각종 해산물(어패류, 해조류 등) 227종에 대한 생태계를 집중 연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즉 어패류의 생태계와 이동경로, 습성, 맛,방언, 약효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해양백과사전으로 학문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당시 현산어보를 저술할 때 흑산도 주민 장덕순(장창대)이라는 이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장덕순이라는 사람은 대둔도 수리마을 출신으로 현재 그의 직계 손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며 그의 학식과 인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흑산도 사리(모래미)에는 사촌서당 복성재(沙邨書堂 復性齋)가 복원되어 향토사료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당은 마을 뒷편 언덕에 있는데 문간채, 본채, 사랑채, 측간의 기와집 네 채로 되어 있다. 과연 당시에도 이렇게 그럴듯한 집을 짓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본 채에는 사촌서당(沙邨書堂) 다산 정용서(茶山 丁鏞書)라는 다산의 경건(勁健)하고 고아(古雅)한 글씨가 돋보이는 해서로 쓴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사촌서실기(沙邨書室記)를 써서 보내면서 함께 보낸 글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돈독한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로 서당 아래쪽에는 천주교회가 있는데 손암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손암이 천주교의 박해로 서해의 고도 흑산도까지 와서 귀양살이를 왔다는 점만으로도 많은 호기심을 갖게 했다. 또 다른 섬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흑산도에는 천주교회가 두 군데나 있어 손암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서당 맞은편 언덕에는 "손암 학동원 조망대"라는 시멘트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이 서있는 자리에는 원래 커다란 돌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으나 손암이 서당을 운영할 당시 자주 올라가 볕을 쬐면서 사색하던 곳이라고 한다.
    손암은 유배생활동안 두 아들을 두었는데 우이도에서 첩을 얻었고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는 사이 첩과 두 아들을 다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손암이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옮길 때나 흑산도에서 우이도로 다시 옮길 때 살고 있던 고장 사람들이 길을 막고 옮기는 것을 만류했다는 것은 그의 인품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할만하다.
    손암의 부음(訃音)을 들은 다산(茶山)은 이굉부(李紘父)에게 주는 편지에서 "돌아가신 형님은 덕행과 기국(器局)이 넓고 학문과 식견이 깊고 밝아 내가 감히 견줄 수 없지만, 부지런하고 민첩한 것은 나보다 못했다. 그래서 저술한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 이 같은 분은 다시는 없을 것이니,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다. 신문 받은 죄인으로서 압송하던 장교들을 울며 작별케 한 사람은 오직 돌아가신 형님 한 분뿐이었고, 유배된 죄인으로서 온 섬 사람들이 길을 막고 머물기를 원한 사람도 오직 돌아가신 형님 한 분뿐이다" 라고 쓰고 있다.

    최익현과 지장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년(순조 33년) 경기도 포천에서 동중추(同中樞) 대(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익현(益鉉)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이다. 성리학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애군여부 애국여가(愛君如父 愛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855년(철종 6년)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로 출사한 이후 사간원 정언, 신창현감,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관직에 재직할 때에는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자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고, 특히 경복궁(景福宮)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1826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서원의 철폐를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하는 상소(1873년 계유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호조참판에 제수되어 누적된 시폐를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권신들은 반발하여, 도리어 대원군 하야를 부자이간의 행위로 규탄하였다.
    이에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로 민씨 일족의 옹폐(壅蔽)를 비난하였는데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1873년부터 3년 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뒤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을 결사반대하기 위하여 오불가척화의소(五不可斥和議疏)를 올리고 지부석고대죄(持斧席藁待罪)하여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1879년 3년여의 유배에서 풀린 뒤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서 후학양성에 전념 하다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시행, 음력의 폐지 등으로 항일 척사운동에 앞장서서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 할 것을 주장하고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 역시 흑산도로 유배오는 길에 먼저 우이도에 들렸다. 최익현의 문집인 면암집에는 당시에는 우이도를 소흑산도라고 불렀고, 흑산도에 유배 오는 사람은 지금의 대흑산도나 우이도 둘 중에 편한 곳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면암집의 기록을 토대로 최익현의 흑산도로 유배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876년 2월 10일 다경진에 도착
    16일 소흑산에 도착, 文寅周의 집에 관소를 정하다.
    8월 우이 절정에 올라 鐵馬 및  井의 고적을 살펴보았다.
    1877년 4월 대흑산에 들어가서 40일을 지내고 돌아오다.
    7월 다시 대흑산도에 들어가서 書塾에서 거처하였다.
    1878년 3월 선유봉을 유람하다.
    4월 석공에게 명하여 "箕封江山 洪武日月" 8자 및 "指掌 " 3자를 淺村의 석벽에 새겼다.
    1879년 3월 9일 배를 타고 소흑산으로 돌아왔다.
    14일 다경진에 내렸다.

    우이도를 거쳐 흑산면 진리마을에 온 면암은 일신당(日新堂)이라는 서당을 열어 아동들을 가르치다가 흑산면 천촌리(淺村里; 여트미)로 거처를 옮겨 마을아래 바닷가에 오두막을 짓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살았다고 한다.
    천촌리 손바닥 바위에는 세로로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면암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아래쪽으로는 세로로 지장암(指掌 )이라고 새겨져 있다. 지장암이라는 바위의 이름은 최익현이 명명하였는데, 이는 주자(朱子)의 '위아중지장'(爲我重指掌)이란 시구에서 지장(指掌)을 따서 붙인 것이라고 면암집에 저하고 있다.
    그의 문집 "지장암기(指掌 記)에 따르면
    "이 고장은 서울에서 수천리나 떨어져 날씨가 무더운 해양가운데 있기 때문에 직방(職方;토지·지도를 관장하는 관청)의 판도에는 그 존재가 그리 중시되지 않는 듯하지만, 모두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흘러 들어온 구족(舊族)들이고 그 풍속도 소박하고 검약하여 사치스러운 태도가 없을 뿐 아니라 서당을 세워 교육에 힘써서 준수한 사람이 많았다. 그 밖에 산수(山水) 어가(漁稼)의 즐거움과 분전(墳典)·도사(圖史)의 비축으로 이미 스스로 자족하고 탄식하거나 원망하는 소리가 없으니 아름다운 고장이 아닌가?
    한 시대의 문인과 명사들이 이 고장에 노닌 것 또한 적지 않았는데 그 지행(至行), 의문(懿文), 고운(古韻), 신적(新蹟)이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 고사(古事)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적료하지 아니한가?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이래로 오랑캐의 풍속이 변하였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태조대왕이 명태조 고황제(高皇帝)와 동시에 즉위하여 무궁한 발상의 터전을 닦자 명신(名臣)과 석보(碩輔)들이 그 지극한 교화를 도와서 치모(治謨)와 문물(文物)이 당우(唐虞)와 낙건(洛建)의 성대에 비교할 만큼 되었다 한다.
    낭주(朗州)에 사는 친우 김형배(金衡培), 서당선생 김성용(金成鏞)과 그 생도 정석중(정석中) 등과 함께 석면(石面)을 살려서 주자(朱子)의 위아중지장(爲我重指掌)이란 시구(詩句)에서 지장을 따다 계시하고 또 선사(先師-華西 李恒老)의 유지(遺志)를 따라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8자를 쓰고 크고 깊게 새겼다. 이 일을 맡아한 자는 같이 귀양은 동청동(董靑同)이다."라 하고 있다.
    이는 면암이 왕도정치의 명분이 상실된 현실에 우리나라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지장암기의 동청동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지장암 앞에는 그의 문하생들이 세웠다는 면암 최선생 적려유허비(勉菴崔先生 謫廬遺墟碑)가 서있다.
    또 진리의 일신당터에 집을 짓고 사는 원 지주의 후손 촌로를 만나 자료나 일화를 들으려 했지만 전혀 아는 바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서당에서 음용했다는 「서당샘」만은 그대로 있었다. 면암집에는 최익현이 일신당이라는 서당을 연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글이 남아 있다. 「문암에서 다시 지음(更賦門巖)」에 "다시 대흑산도에 들어가서 서재를 정돈하고 현판을 일신당(日新堂)이라 했다. 마침 예닐곱 동자들이 조석으로 와서 글을 물으니 심히 귀양살이에 위로가 되다(再入大黑 定頓書塾 扁其楣曰 日新堂 有六七冠童 朝夕問字 頗慰湘 之懷)"라 하고 있다.

    손암은 현산어보를 비롯하여 몇 가지 저술이 남아 있다. 물론 귀양살이의 기간이 길었고 동생 다산과 서신으로 학문을 논하고 훌륭한 제자가 있어 큰 저술을 남겼지만 면암이 남긴 자취는 없을까 생각했는데 마침 흑산면사무소 부근의 상점에서 음료수를 마시면서 상점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할머니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그 할머니의 할아버지가 남긴 고문적을 어느 대학 교수가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면에서 소개해서 보여달라기에 보여 주었더니 복사하고 돌려주겠다고 가져가서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괜히 우리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하니 오히려 당신의 아들이 사정을 알고 있으니 찾을 수 있다고 우리를 위로하는 듯한 말씀을 해서 더욱 송구스런 마음으로 가게를 나왔지만 결코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일신당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혹시 면암의 흑산도 생활과 관계되는 문적이 아니었나 생각하니 아쉬움이 더욱 컸다.

    언제쯤이었을까 흑산도에 일주도로를 건설한다고 들었을 때에는 자연을 훼손하는 일을 한다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흑산도에 와서 보니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예리 선착장에서 여트미(淺村里) 면암 적려유허지를 가면서 정말 길을 잘 만들어 놓았음을 절감하였다. 흑산도에는 구미마다 마을이 있고 마을은 깊은 골짜기를 끼고 있는데 옛날에는 마을과 마을을 배를 타고 다니거나 산을 넘어 다녔을 것으로 보이니 얼마나 불편했고, 농경지도 별로 없는데 먹을거리는 어떻게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더구나 귀양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그동안 귀양살이에 대하여는 '위리안치다', '유배다', '장배다' 해서 서울을 떠난 한적한 시골에 일정기간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는 형벌쯤으로 단순하게 생각하고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손암이나 면암과 같은 큰선비들은 절해의 고도인 흑산도에 유배되어 원주민들의 숭앙과 존경을 받고 있었을 것이고, 따르는 제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빠져나갈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물 막힌 섬 안에서 귀양살이가 옥살이와 같았을 것이며,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그 어려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런 어려움과 외로움을 학구적인 욕구와 후학을 지도하는 열정으로 극복해 나갔을 것으로 생각되어 숙연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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