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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흑산도 문화탐방(정윤섭) 관리자 2006/3/2 2990


    <흑산도문화탐방-신안문화 13호 2003년>

    국제무역항 서해고도를 찾아

    정윤섭(향토사연구가)

    고도를 찾아서
    80년대까지만 해도 흑산도에 가기 위해서는 망망대해를 5시간 이상 여객선에서 보내야 했다고 한다. 파도 따라 물결 따라 온전히 바다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했던 그때에 비해 바다 위를 거의 날아서 달리는 쾌속선은 2시간도 채 안되어 흑산도 항에 내려놓는다. 지도에 그려진 서해바다의 한복판에 있던 흑산도, 그래서 아주 한참동안 바다 위에서 헤메이다가 그리던 섬에 도착할 것 같은 기분대신 흑산도행은 쾌속선 덕분에 고속버스에서 내리듯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항상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서는 아주 멀고 또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것이 섬이라면 이러한 마음은 더하다. 그곳에 가면 다시는 못 올 것 같은 고도에 대한 생각이 섬을 처음으로 찾는 사람들이 갖는 심정일 것이다. 흑산도 행 쾌속선은 확실히 아득한 그 고도에 대한 생각을 일순간에 깨버렸다. 어쩌면 그것은 문명의 이기 덕분일 것이다.
    섬은 사람들의 마음에 아주 아득하게 기억되어 있다. 나의 머리 속에 있는 흑산도도 마찬가지였다. 흑산도를 가는 배가 하의도, 장산도, 우의도 등 서해에 무수히 흩어져 있는 섬과 섬들의 숲을 헤쳐나가 넓은 망망대해를 떠갈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마치 바다에 섬과 섬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처럼 흩어져 있는 서해의 신안지역 섬들을 보면 섬들의 숲을 연상시킨다. 누군가 고대에는 바다의 이 섬들이 해양의 문화를 연결해주는 고속도로의 톨게이트 역할을 했다고 하는 말이 실감난다.
    아주 오래 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어떤 대상이었을까? 멀리 살길을 찾아 헤매는 민초들에게 아마 섬은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로 각인되지는 않았을까?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작품 중에 이 섬들이 이상향의 세계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같은 꿈이 허구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이를 생각하면 홍길동전의 율도국은 이 서해의 어느 섬 흑산도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한다. 흑산도였나에 대한 사실성의 여부를 떠나 섬은 그만큼 생존의 기로에 서있던 민초들에게는 새로운 이상향의 세계로 생각되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가장 핍박받는 것이 민중들의 삶이고 보면 이상향의 섬에 대한 동경이 꿈이 아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확실히 너무 빠른 것이 주는 실망감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 절해의 고도가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느끼는 실망감이었을까? 흑산도를 가면서 머리 속에는 흑산도가 주는 여러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왔다. 흑산도 홍어,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정약전이 유배했던 곳, 그리고 역사문화 강좌에서 들었던 국제해상교역의 중심 거점항, 이러한 생각들은 흔히 여행자들이 처음으로 찾는 곳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이다.
    사람들은 보통 흑산도를 떠올릴 때 홍도를 가는 곳의 길목쯤에 있는 섬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마 우리나라 최고의 해상비경이라고 말하는 홍도에 비해 흑산도는 홍도의 중간기착지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직 자연의 경치를 최고의 관광지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여행문화 때문인지도 모른다.

    섬이 검어서 흑산도
    흑산도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은 섬 전체가 검게 보인다고 해서 흑산도라 불리게 됐다고 말한다. 그만큼 육지와 많이 떨어진 먼 바다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같다. 흑산도는 면적이 19.7㎢, 해안이 41.8㎞에 달하는 꽤 큰 섬이다. 그러나 섬 전체가 산세가 험한 산악지역으로 되어 있어 논농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경사진 지역을 부분적으로 일구어 밭농사를 하지만 이것도 양식업 등 수산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아주 비중이 작아지고 있다. 주민들은 예전에 밭농사의 비중이 컸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양식업 등 어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경제형태가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같은 현상은 최근 관광산업이 새로운 산업으로 떠오름으로 인해 관광이 흑산도의 경제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산업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흑산도의 중심항은 예리항이다. 그러나 처음에 항구가 들어선 곳은 진리였다고 한다. 진리는 이곳에 수군진(鎭)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진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반증한다 할 수 있겠다. 진리는 흑산진영이 있었으므로 진말, 진촌, 대진이라 부르다가 이후 진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또한 '예리'는 산줄기가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온 목이 된다하여 끌미, 예미, 예촌이라 부르다가 이후 '예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흑산도는 새모양으로 생겼으며 '예리'는 새 입에 속하는 마을로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 하여 '예리'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흑산도는 1888년(고종25)에 진을 설치하고 만호를 두었다. 진리는 흑산항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옛 경찰서 파출소 등 관공서가 들어서 있는 것을 보면 그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예리쪽에 신항이 건설되면서 진리는 항구의 기능을 거의 잃어가고 있다.
    흑산도는 동지나해와 서남단 인근 어장의 전진기지로 중국어선들이 많이 입출항한다. 태풍이라도 불면 이들 배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때문에 흑산도는 어업전진기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대흑산도를 중심으로 인근에는 영산도, 다물도, 대둔도, 홍도 등 천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자연은 관광보고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섬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면서 이곳 흑산도 또한 대규모 관광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흑산도는 약 24km에 이르는 흑산도 일주도로가 관통되어 섬을 일주할 수 있다. 아직은 포장되지 않은 곳이 많아 절벽을 깎아 만든 일주도로를 따라가는 것은 거의 모험에 가까운 스릴을 갖게 하여 여행의 느낌을 훨씬 더 느끼게 한다. 일주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흑산도의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정약용, 최익현 유배지 등의 문화유산이 중간중간에 산재되어 있어 그것들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

    역사 속의 흑산도
    흑산도의 역사는 어떻게 이어졌을까? 흑산도의 역사를 말할 때 이곳이 국제해상교역의 거점지였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흑산도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장보고와의 연관성인 것 같다. 당시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이가 장보고였던 것을 보면 흑산도는 아주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에서 장보고의 거점지인 완도의 청해진을 오가는 중간지점으로서 흑산도의 중요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흑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아마도 장보고의 활동시기로 보지만 그보다도 더 오래전 선사시대에 사람이 살았던 것을 증명하는 고인돌과 패총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서남해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패총유적을 볼 때 머나먼 외딴 섬에까지 선사시대에 사람들이 와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자취로만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흑산도의 지석묘는 예리에서 진리로 가는 해군기지의 길옆에 있다. 이곳에 6기의 지석묘가 모여 있으며 타원형의 남방식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것이다. 이곳 지석묘에서 줄무늬, 빗살무늬토기, 돌창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흑산도의 지석묘는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로써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아 94년 1월 31일 문화재 자료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이와 함께 신석기 시대의 패총은 1968년 서울대 한상복 교수팀이 발견하였으며, 가로 25m, 세로 30m의 규모가 큰 고고학계 연구가들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가치가 있어 1990년 2월 14일 지방기념물 제130호로 지정하였다.
    섬은 육지와 떨어진 곳으로서의 지리적 특징 때문에 수많은 역사의 부침을 겪어왔다. 이러한 역사적 부침의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이 섬에 대한 공도(空島)정책이다. 고려시대 이후로 끊임없이 강요되던 공도정책으로 인해 흑산도 주민들이 지금의 영산포로 강제 이주 당했던 적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흑산도는 옛날에는 흑산현이라 불리었다. 흑산폐현은 나주의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본래 흑산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 남포에 옮겨 살았으므로 영산현이라 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확한 천읍의 이유와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상황으로 보아 다른 신안군의 섬들과 운명의 궤를 같이 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왜구들의 잦은 침략에 대한 거점지역을 없애기 위한 일환이었지만 생활의 터전을 빼앗기고 육지로 쫓겨나야 했던 섬 사들에겐 혹독한 시련이었을 것이다. 흑산도는 고려시대에 나주목에 편입되어 흑산도라 칭하였으며 조선시대인 1888년(고종25)에는 흑산진을 설치하여 만호를 두었다가 1896년에 이르러 지도군에 편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흑산도의 역사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근대유적 가운데는 놀랍게도 1백년이 가까운 년에 건립되왔다는 천주교회가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천주교회와 비슷한 역사의 교회도 서있어 기독교의 전래가 매우 빨랐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회는 화강석을 잘 다음은 돌로 지은 건물로 중세풍의 스테인레스까지 남아있으며 지금도 초창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 천주교가 있는 곳에 서면 수백년 된 소나무 숲 아래로 예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정약전이 200여 년 전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이곳 흑산도에 유배를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정신이 되살아나 서해의 먼 섬 흑산도에 이른 천주교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진리 산신당 전설
    어느 고장이나 산과 들에는 그곳에 얽힌 전설이 따라온다. 아마도 흑산도의 신앙과 전설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진리산신당(처녀당) 전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리에서 상라산성으로 가다보면 해안가의 무성한 숲 속에 당집이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곳 당이 자리잡고 있는 곳의 아래쪽에는 한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던 초령목(招靈木)이 있어 신성성을 더욱 느끼게 한다. 초령목은 가지를 꺾어 불전에 놓으면 귀신을 부른다는 나무로 현재 아깝게 고사가 되고 죽은 나무만 남아있다. 수백년 된 노거수 소나무들과 상록수림들이 빽빽이 감싸고 있어 신성성을 더욱 느끼게 하며 숲이 좋은 때문인지 이곳을 산책로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제는 누구하나 관심 없이 허름한 풀숲에 묻혀 가는 시골의 당집에 비해 이곳은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진리산신당(처녀당)에 얽힌 전설은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해양신앙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먼 옛날 이 마을에 처녀 총각이 결혼하여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부인의 만류를 무릅쓰고 고기를 잡으러 먼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바다로 나간 남편은 갑자기 풍랑을 만나 죽게 되고 파도에 밀려 부서진 배의 파편만 떠밀려 왔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슬픔의 세월을 보내던 부인은 먼바다가 보이는 산위 소나무에 목을 메어 죽고 말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발견하여 제사를 지내고 죽은 자리에 당을 지어 그 원혼을 모셨다. 그리고는 해마다 여자가 죽은 날에 제를 지내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육지에서 옹기를 팔러온 배가 진리에 정박했는데 이 배에는 취사와 잔심부름을 하는 총각 선원이 있었다. 선원들이 옹기그릇을 팔기 위해 마을에 들어가면 총각은 당마을의 노송에 올라가 나뭇잎 피리를 불며 무료함을 달래곤 하였다. 그런데 옹기를 다 판 후에 배가 출항하려고 하자 역풍이 몰아쳐 항해할 수 없게되었다. 그런데 총각이 나무에 올라 피리를 불면 바다가 잔잔해지고, 마을 어부들은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다. 바람이 자고 물결이 가라앉자 다시 배의 돛을 올렸는데 또 다시 역풍이 세차게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이러기를 여러차례 되풀이하자 사공이 점쟁이에게 점을 쳐보게 하였는데 당각시가 총각의 피리소리에 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도사공은 총각에게 거짓 심부름을 시켜 그곳에 떼어놓고는 서둘러 배를 출항하여 떠나버렸다. 총각은 몇 날을 늙은 소나무에 올라 피리를 불다 지쳐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노송 밑에 총각의 시신을 묻어 주고 화상을 그려 당각시 옆에 걸어 놓고 당제를 지내주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진리산신당(처녀당)을 풍랑을 가라앉히는 용신으로 믿고 기원한다고 하는데 이곳 소나무 아래에는 소년의 무덤이 실제의 이야기처럼 남아있다. 잔디가 없이 소나무에서 떨어진 잎에 덮여있는 소년의 무덤은 전설의 이야기에 대한 사실성의 여부를 떠나 섬사람들의 꿋꿋한 신앙심을 느끼게 한다. 당집 앞에는 소나무 위에 올라 피리를 부는 소년의 그림이 안내판에 그려져 있어 전설의 사실성을 느끼게 할 만큼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역사의 흔적들
    흑산도의 오랜 역사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 상라산성과 산성 바로 아래에 있는 무심사지터다. 무심사지터 바로 아래에는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관아터가 있다. 지금도 오래된 기와와 자기파편이 나오고 있으며, 이로 보아 바로 인근에 위치한 사지터와 성과의 관련성을 엿보게 한다.
    이곳 상라산성은 반월성이라고도 부른다. 멀리서 보면 산 능선에 영락없이 반달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주민들이 반월성으로 부른 듯 하다. 지난 2000년 목포대학교에서 이곳 상라산성에 대한 조사를 벌인바 있었다. 이를 통해 이곳 상라산성이 서남해지방의 거점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밝힌바 있다. 이곳 사지터에는 지금 높이가 1.5m 가량 된 삼층석탑이 남아있다. 당시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 석등과 함께 세워져 있다.
    탑의 아래부분이 고목나무 아래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로 전체적인 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또한 석등이 남아있는데 석등의 등부는 행방이 묘연하고 탑 밑에는 기와로 만들어진 문패 비슷한 기와가 발견된 바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탑과 석등을 속칭 숫탑, 암탑, 탑영감, 안탑님 등으로 부른다고 하여 마을사람들이 신앙의 대상물로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흑산도 전망대와 노래비
    관광지로 발돋음 하고 있는 흑산도에 가면 이제 반드시 가쳐가는 곳이 있다. 일주도로를 만들면서 상라산성을 끼고 구불구불 아흔아홉구비를 돌 듯 올라가는 길이 정상까지 뚫려 있는데 이곳의 정상에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흑산도를 오는 사람들은 거의 상라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를 오른다. 대관령의 아흔아홉구비처럼 구부러진 길을 따라 오르면 정상에서 멀리 구름사이로 떠있는 홍도와 주변의 섬들 그리고 예리항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곳의 전망대에 이미자의 노래인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서있다. 노래는 1천원권 지폐를 내야 나온다. 흔히 민요 속에 들어있는 가사가 모두 사람들의 힘든 여정과 애환이 숨어 있듯이 흑산도 아가씨 노래 또한 흑산도 사람들의 마음이 들어있는 듯 하다. 섬이라는 갇힌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여자의 몸이라면 아마 더욱이 평생에 한번 이 섬을 떠나 육지를 나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외로운 섬을 떠나 더 큰 세계가 기다릴 것 같은 육지를 향해 그렇게 흑산도아가씨들의 마음 또한 어쩔 수 없는 갈망을 업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자의 흑산도아가씨노래는 그렇게 이제는 흘러간 전설처럼 아스라이 흘러나오는 곡조 속에서 옛날을 기억하게 만든다.
    흑산도아가씨 하면 여러 생각들이 스쳐간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가 돈을 벌러 이곳까지 온 한 술집아가씨도 떠오르게 한다. 만선이 되고 한때는 파시가 열려 돈이 모이면 흥청 되던 흑산항, 뱃사람들의 너털거리는 웃음과 함께 바닷바람에 젖은 그들의 피로감을 풀기 위한 행선지였던 술집, 그곳에는 육지에서 이곳 섬까지 온 흘러온 아가씨들의 애환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흑산도는 옛날부터 어선의 중간 기착점이자 폭풍이 심할 때 피항지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뱃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더불어 술집, 다방 등의 종업원으로 외지에서 많은 아가씨들이 들어찼다. 원래 본토박이 아가씨들은 이들과 함께 흑산도 아가씨로 불리는 것이 조금 떨떠름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 인생유전 속에서 이곳 흑산도에 거처를 마련한 사람들이었으니 딱히 말하기도 어렵다.

    흑산 홍어와 파시
    흑산도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맨 먼저 홍어를 떠올릴 것이다. 전라도의 상가집과 잔칫상에 홍어가 빠지면 그것은 상차림이 아니다. 수요가 많아지고 잘 잡히지 않아 한때 홍어잡이 배가 끊길 뻔했다는 이 홍어가 최근 그런 대로 잘 잡히는 모양이다. 홍어를 잡는 그물도 거리에서 가끔씩 눈에 띄고 철이 아닌 여름에도 관광객들은 홍어를 찾는다고 한다.
    홍어는 주로 겨울철에 잡고 철이 겨울철이라 여름에는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관광철인 여름에도 홍어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유명세를 알 수 있다. 가격이 오를 때는 홍어 한 마리가 50만원까지 호가하는 것을 보면 홍어의 맛을 즐기려는 전라도 사람들의 유별남을 알 수 있다.
    조금은 전라도적인 이 맛은 타지역 사람들에게 조금 오해의 소지를 만들기도 한다. 한번은 이 홍어를 사간 사람이 상한 고기를 주었다고 항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고기 중에서 유일하게 삭혀서(썩혀서)먹는 것이 홍어이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중국어선들의 진출로 씨도 안 남아 거의 홍어가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 한중 어로협정에 의해 중국의 배들이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되자 최근 홍어가 다시 잡히기 시작한다고 한다.
    부둣가에는 홍어를 잡기 위한 그물과 낚시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흑산홍어의 특징을 보여주듯 상가에는 홍어를 파는 가게들이 쉽게 눈에 띈다. 관광객들을 부르는 홍어이다.
    그래서 흑산의 특산물인 홍어안주에 막걸리가 일품이라는 홍탁집들이 눈에 자주 띤다. 막걸리 안주로 먹는 것을 홍탁이라 하고, 삶은 돼지고기를 얇게 썰어 배추김치와 함께 먹는 것을 삼합이라 하는데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수 있다.
    홍어를 즐겨 먹는 사람들은 생것을 옹기그릇에 담아 놓았다가 며칠 후에 꺼내면 화끈한 냄새가 나도록 약간 상하게 되는데 이것을 썰어 먹으면 입안에 매운맛이 확 퍼진다. 이런 짜릿한 미각에 자극되어 많은 사람들이 홍어를 찾게 된다. 흑산 홍어가 우수한 것은 군산이나 인천근해에서 잡는 것 보다 그 맛이 좋고 육포자체에 착 달라붙는 찰진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리항 주변은 음식점과 함께 주점, 다방, 클럽, 여관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왠만한 도시의 유흥가를 방불케 한다. 밤이 되면 항구에 비친 불빛과 골목길까지 환하게 밝혀진 밤의 야경이 그럴 듯 하다. 외딴 섬이지만 없는 것이 없어 섬이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단지 이곳이 섬이라는 공간일 뿐 생활에 불편함이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이곳은 수천 척의 고기배들이 모여들어 불야성을 이루고 주막마다 질펀한 술판이 벌어지던 파시의 중심지였다고 생각해 보면 갑자기 흥겨워 지기까지 한다. 파시(波市)는 풍어기에 바다 위에서 열리는 어시장으로 파시를 맞아 예리항 부두에 몰리는 어선은 많을 때는 2천여 척에 달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어선들이 방파제 안으로 빽빽히 들어서면 갑판을 타고 바다를 건너다닐 수 있었으며, 밤이 되어 수천 여 척의 배들이 한꺼번에 불을 밝히면 해상에 큰 도시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뱃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 배를 건너다니면서 고깃값을 흥정하는 소리, 이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의 흥청거림을 상상해 보면 분명 파시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때에 상인들이 생필품과 어구 등을 팔려고 모여 들였고, 각종 물건을 파는 떠돌이 행상들, 술집이나 식당, 숙박업소들도 한몫 하였다고 하니 파시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흑산파시는 어기에 따라 년 3회 벌어졌다고 한다. 제 1기는 1월∼4월에 걸친 중선파시와 2월∼5월에 걸친 포경파시가 있는데 속칭 조기파시, 고래파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조기잡이 어선들은 3월경에 몰려들었다가 고기가 북상함에 따라 비금도 송치, 자은도 소월포, 임자도 전장포를 거쳐 전북 위도까지 새로운 파시를 벌이며 북상한 뒤 겨울동안 잠깐 쉬고 다시 흑산에 모여드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한다.
    포경파시는 일제시대에 번성했지만 포경업이 금지되면서 완전히 맥이 끊기고 말았다. 제 2기는 6월부터 10월까지 계속되며 가라지와 고등어를 주로 잡았기에 고등어 파시라고도 불렸다. 지금도 예리항구 동편에 고래를 잡았을 때 그것을 묶어놓고 작업을 했다는 시멘트 구조물이 남아있다. 바로 그 옆에 있는 '고래휴게소'라는 간판의 작은 가게가 이제는 먼 추억이 되 버린 고래 파시를 기억하게 해준다.

    유배의 섬
    흑산도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는 정약전이 이곳 흑산도에 유배를 와서 살며 '현산어보(자산어보)'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흑산도는 유배지라는 이미지가 짙게 베어있는데 유배인 중에서도 가장 중죄인이 흑산도로 왔던 것을 보면 이 섬이 얼마나 절해의 고도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흑산도 예리항에서 동부지역의 일주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최익현 유배지와 정약전 유배지를 만나게 된다.
    최익현 유배지는 예리 천촌리마을 도로가에 있다. 섬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하천 옆에 큰 바위가 자리하고 그 바위 벽면에 최익현이 썼다고 하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을 댐으로 막아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하는데 식수는 필요한 일이나 이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가 물 속에 잠긴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더 안타까워진다.
    조선말 학자이며 의병장이기도 했던 면암 최익현선생은 이곳에 "基封江山 洪武日月(기봉강산 홍무일월)"이라는 글귀를 남기는데 이 글이 바위(지장암)에 새겨져 있다. 지장암 앞에는 후일 그의 문하생들이 면암 최익현 유허비가 세워져 있어 선생의 고매한 애국정신과 후학양성을 위한 뜻을 후손에게 전하고 있다. 1924년 9월에 그의 문하생인 오준선, 임동선 등이 뜻을 모아 지장암 바로 앞에 세웠다고 한다. 최익현은 이곳 천촌리로 오기 전 흑산항 진리에 일신당(日新堂)이란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고, 천촌리에 옮긴 뒤로도 서당을 건립하여 마을 사람들의 개화는 물론이고 많은 후학들에게 애국애족의 자주정신을 심어 주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도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는 나이든 촌로들이 있었으나 이제 하나둘 돌아가시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다. 처음에 도착해 살았던 진리 집 앞에는 그때 사용했다는 조그마한 샘(일명 서당샘)이 지금도 남아있다.
    최익현은 오직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곧은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고 적지인 쓰시마섬에 갇힌 몸이 되어서는 적군이 준 쌀한톨,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순절한 지조 깊은 선비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유배자들이 그랬듯이 그 또한 시대를 잘못 태어나 대쪽같은 정신이 유배지로 향하게 했고 결국은 죽음까지 이르게 했으니 이 곡절의 역사가 그를 있게 했는지, 그 곡절의 역사가 한 지조 있는 선비를 죽게 했는지 말하기 힘들어진다.
    최익현 유배지를 지나 깎진 비포장 도로를 지나다 보면 흑산도의 향토시인인 박도순씨가 썼다는 조그마한 시비들이 고개 마루마다 서있다. 어쩌면 최익현의 정신이 후대에 이런 향토시인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정약전 유배지는 그렇게 해안도로를 따라 계속 달리다 끝나는 곳에 위치한 사리마을에 있다. 이 사리마을을 막 넘어오기 전에 흑산도의 비경이 한 곳 있다. 설악산을 옮겨논 듯한 이곳은 흑산도에서 가장 높은 선유산의 계곡이 만들어 놓은 절경이다. 아마 홍길동전의 '율도국'이나 누군가가 이상향의 세계를 찾아 나섰다면 이곳을 보고 정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흑산도는 산이 높고 산세가 험해서인지 계곡이 크고 이 계곡에서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물이 귀한 섬에서 물이 풍부하다는 것은 분명 사람이 살기가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이곳 마을에는 주로 멸치잡이를 하는 주민 10여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멸치를 삶기 위해 만든 굴뚝같은 높은 기둥이 이국적인 풍경까지 만들고 있어 이채롭다. 멀리 선유산 정상으로 흰 구름이 걸쳐있고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깊은 계곡에서 맑은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그 자체인 것이다.
    이곳에서 머리를 식히고 다시 깍진 고개 하나를 넘으면 사리가 나온다. 고개를 막 넘으면 사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리 흑산항을 뺀다면 흑산도에서 가장 큰 마을에 속한다. 이곳에 초등학교까지 있는 것을 보면 꽤 큰 마을에서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넓은 분지처럼 들어서 있는 사리마을은 어업이 주업이기는 하지만 주변의 산 능선에 밭들이 경작되고 있어 밭농사도 무시 못한 듯 하다. 정약전의 유배지라는 것 외에도 이 마을은 돌담들이 마을의 골목을 끼고 잘 남아 있어 섬의 원형을 잘 느끼게 한다. 작은 공간을 이용해 만든 돼지막, 소를 키웠던 마굿간 등 지금은 빈자리로 남아있는 이들 공간을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다.
    정약전의 유배지로 거창하고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는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남아있는 돌담들이 그래서 훨씬 정답고 멋스럽게 까지 보인다. 복원이 항상 본래보다는 더 거창하기는 하지만 이곳 또한 너무 깨끗하게 잘 정비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당시 정약전이 살았던 때의 그 느낌을 조금 떨어지게는 하지만 그나마 이렇게 복원해 놓은 것도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조선후기 문신인 정약전 선생은 이곳에서 15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며 근해에 있는 물고기와 해산물 등 155종을 채집하여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한 '현산어보(자산어보)'를 남겼다. 그의 동생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하며 3백여권의 저서를 남긴 것을 보면 두 형제의 고난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유배라는 것이 아주 생산적인 고급유산을 남기기도 하였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이곳 흑산면 사리에 유배되어 복성제란 서당을 개설 후학을 양성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안내판에는 복성제라고 씌어있다.
    흑산도의 기록상 확인되는 최초의 유배자는 고려 의종2년(1148)에 정수개(鄭壽開)였다고 한다.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밝히고 있듯이 흑산도에는 "나라에 큰 죄를 지어 사형을 받아야할 정도"의 죄인이 많이 유배되던 곳이었다. 고려 고종45년(1258)에 최씨 정권의 마지막 실권자인 최의가 유경, 김준 등에 의해 살해되는 과정에서 최은이 흑산도에 유배되어 오고 이어 박선이 최항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고, 원종10년(1269)에는 유경, 조경 등이 유배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기에 들어오면 한동안 기록에서 흑산도 유배는 확인되지 않는다. 흑산도 유배 기록은 조선 후기인 숙종대에 들어서야 나온다. 흑산도 또한 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배자들이 이 고도의 땅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은 목포에서 2시간이면 도착하는 흑산도를 보면 이제 모든 것이 시간을 통해 그 공간이 설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해 먼 바다 외로운 섬으로 떠있던 흑산도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는 것 같다. 비록 아직도 날씨가 좋아야만 쾌속선이 이 곳 섬과 육지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지만 이제 흑산도는 매우 가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섬에 흑산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유배의 섬, 육지를 그리며 살던 흑산도 아가씨들의 마음이 이제는 더 이상 외로움이나 서울만을 그리는 동경으로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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