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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하의도 관련논문(이규수) 관리자 2006/3/2 6303


     일본인 지주의 하의도 토지수탈과 토지회수운동


    이규수(성공회대학교 강사)



    1. 머리말
    2. 하의도와 정명공주방(貞明公主房)
    3. 우콘 콘자에몬(右近權左衛門)의 토지매수와 ‘화해조서’
    4. 토쿠다 양행(德田洋行)의 토지매수와 유상구입운동
    5. 하의도 농민조합과 토지회수운동
    6. 맺음말 - ‘해방’ 이후의 하의도 토지문제




    1. 머리말

     일본의 조선침략 이후 조선의 각 개항장에 진출한 일본인 상업자본가는 소작제 농장경영을 통한 고율의 토지수익률을 확인하고, 미곡반출로 상업이윤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차츰 자기자본의 투자대상으로서 토지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일본인 상업자본가의 토지매수는 초기에는 비옥한 삼남지방의 평야지대에 집중되었으나, 토지확보경쟁이 가열되면서 그 범위는 점차 서남해안의 도서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인 『近代朝鮮における植民地地主制と農民運動』(信山社, 1996년, 9월)의 하의도 관련 부분을 수정, 가필한 것이다.

    군산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인 지주의 토지집적과정의 특질에 대해서는 졸고,「日本人地主の土地集積過程と群山農事組合」『一橋論叢』제116권 제2호(一橋學會, 1996년 8월)를 참조.
    . 이에 대해 조선농민은 ‘토지조사사업’ 이전의 사적 토지소유권의 확대․강화를 근거로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이나 ‘부당이익 반환소송’을 제기하는 등 일본인 지주의 비합법적인 토지매수에 맞서 갖가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조선통치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으로서 식민지 지주제의 확립을 옹호한 식민지 권력은 ‘토지가옥증명규칙’(1906년)과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1908年)을 공포하는 등 일련의 토지법제 개정을 통해 일본인 지주의 토지매수를 합법화하고, 최종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토지소유권을 법률적으로 확정지었다.
     이러한 일본인 지주의 조선 진출과정과 이에 저항한 조선 농민운동의 상호관계에 대한 종래의 연구는, ‘토지수탈과 조선농민의 저항’이라는 단순한 도식 속에서 토지수탈로 상징되는 침략성만을 강조하거나 예를 들면 君島和彦「日露戰爭下朝鮮における土地略奪計劃とその反對鬪爭」『朝鮮歷史論集』下, 1979년 3월.
    , 혹은 제국주의적 사관에 의거하여 조선을 피동적인 위치에서 파악하는데 그치는 등 단면적․피상적으로 파악하는데 그쳤다 대표적으로는 淺田喬二『日本帝國主義と舊植民地地主制』お茶の水書房, 1968년.
    . 식민지 지주제에 직접적으로 저항한 토지회수운동은, 조선후기 이후의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른 사적 토지소유권의 확대과정 중에서 농민의 자기 재생산구조의 근간인 토지에 대한 소유의식에 의거하여 전개된 것이며,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전개되는 토지소유권 문제를 둘러싼 분쟁 또한 이러한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재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토지회수운동의 사실규명은 조선 민중의 물적 토대의 변모와 그에 대항한 농민운동의 내용의 총체를 파악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토지회수운동의 전형적인 사례로서는 전남 나주군 ‘궁삼면’과 무안군 하의도가 대표적이다. ‘궁삼면’ 토지문제에 대해서는 졸고,「日本帝國主義下における朝鮮農民運動に關する一硏究 - 宮三面土地回收運動を中心として」『一橋大學 大學院 社會學硏究科 碩士學位論文』(1986년 3월)을 참고.
    .
    이 글에서는 전남 무안군(현재는 신안군) 하의도를 사례로 하의도 토지문제에 관한 선행연구로서는 김종선 「서남해 도서지역의 농지분쟁 및 소작쟁의에 관한 연구 (Ⅱ) - 하의3도 농지분쟁을 중심으로」『목포대학논문집』제7집(인문사회과학편, 1986년 12월)이 있다. 이 논문에서는 현지답사 및 농민으로부터의 청취 등을 토대로 하의도 토지문제의 유래와 일본인 지주의 토지매수의 수탈성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기술하고 있어 여러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문헌자료의 발굴과 분석, 그리고 현지 농민으로부터의 청취 등을 통하여 일본인 지주의 토지매수와 농장경영 그리고 농민층의 대응과의 상호관계를 포괄적이고 세밀하게 규명하려는 시도가 긴요하다.
    , 하의도에서의 민전(民田)의 궁장토(宮庄土)로의 편입과정과 일본인 지주의 토지집적과정의 실태를 파악함으로써 토지회수운동의 객관적인 배경을 분석한다. 그리고 현존하는 약간의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농민과 조선봉건왕조 집권층, 일본인 지주사이의 분쟁과정, 토지소유권 그 자체의 탈환을 추구했던 조선농민의 투쟁과정을 차례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하의도와 정명공주방(貞明公主房)

     하의도는 현재 전라남도 지도군(현재 신안군) 서남해안의 도서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의도, 상태도, 하태도를 중심으로 약 40여 개의 유,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1913년에 시행된 각 부․군 행정구역 개편 이후, 무안군 하의면으로 개칭되었고 33개의 동리로 행정체계가 정비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하의도는 한반도 서남부의 행정편성인 양무군, 뇌산군, 무안군, 압해군 중에서 압해군에 속했는데 고려시대에는 나주목과 영광군으로 나뉘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나주목 해상군도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의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이해준 「장산도․하의도 문화의 배경」『도서문화 - 신안군 장산도․하의도 조사보고』제3집(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5년 11월)을 참조. 하의면은 대동리, 대서리, 전미리, 전광리, 노도리, 웅곡리, 어은동, 피촌, 유호리, 오림리, 북포리, 소포리, 능산도리, 대야도리, 장병도리, 용도리, 문병도리, 개도리, 장재도, 여흘도리, 대리, 모농리, 가락리, 노은동, 기동, 황성금리, 구만리, 언항리, 기도리, 대리, 벌금리, 장치리 등 33개 동리로 구성되어 있다(全羅南道『全羅南道勢槪覽』1912년 12월, 441~442쪽).
    . 하의도에는 소수의 선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17~18세기)에 소위 ‘입도조(入島祖)’가 다수 정착하기에 이른다. ‘입도조’의 대부분은 해남, 영암, 진도 등 인접지역의 주민이었는데, 이주 후 제갈씨, 강씨, 김씨, 정씨 등의 씨족이 집단촌을 형성하였다 ‘입도조’의 성씨, 입도 조상, 입도 시기, 입도전 거주지, 입도후 분산지 등에 관한 조사는 이해준, 앞의 논문을 참조.
    . 하의도의 인구수는 1759년의 통계에 의하면 60호 160명(남 79명, 여 81명)이었는데, 30년 후인 1789년에는 하의도 143호 540명(남 277명, 여 263명), 상태도 80호 311명(남 198명, 여 118명), 하태도 73호 203명(남 112명、여 91명) 등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이해준, 앞의 논문, 17~18쪽.
    . 그리고 1924년에는 하의도 800여 호, 상태도 270여 호, 하태도 230여 호, 총계 1300여 호, 8,500여명에 달했다 『시대일보』1924년 12월 15일.
    .
     하의도에 정착한 ‘입도조’는 수년에 걸쳐 자기 자금과 노동력을 투여해 개간사업을 실시하고 토지소유권을 보유하였다. 정명공주방에 무토사패(無土賜牌)된 1600년대 초, 하의도의 개간 경지면적은 151결 24부 3속에 달했는데 농민은 개간에 의한 소유권 획득에 대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3도에 소재한 전답은 지금(1918년-인용자)부터 500년 전에 공소인(농민-인용자) 다수 주민의 조상이 망망한 초생지를 개간해 소유권을 획득한 것으로 개척지는 점차 확대되어 151결 24부 3속에 달했다. 이후 경지의 소유권은 연면히 도민 각 개인의 조상들에게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京城控訴院法院民事部裁判記錄」)
    , 이후 농민들의 개간작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농지는 계속 증가한다. 다음 표는 1914년 당시의 하의도 경지면적을 나타낸 것이다. 이에 의하면 하의도의 전답 면적은 논 7,552.7두락, 밭 13,622.5두락, 합계 21,175.2두락(4,474필지, 17,300결)이었으며, 더욱이 1924년 말에는 논 8,649두락, 밭 16,213두락, 합계 24,862두락으로 각각 증가하였다 『시대일보』1924년 12월 16일. 하의도는 논 4,675두락, 밭 8,898두락, 소계 13,573두락(2,528,653평), 상태도는 논 2,545두락, 밭 4,589두락, 소계 7,134두락(1,125,256평), 하태도는 논 1,429두락, 밭 2,726두락, 소계 4,155두락(658,650평)이었다.
    .

    (표) 하의도의 토지면적

    지목
    두락수
    야미수
    결수
    하의도


    소계
    4,115.2
    7,333.5
    11,448.7
    1,038
    1,547
    2,585
    4,454.6
    4,678.6
    9,133.2
    상태도


    소계
    2,233.0
    4,043.4
    6,276.4
    494
    718
    1,212
    1,773.6
    3,141.6
    4,915.2
    하태도


    소계
    1,204.5
    2,245.6
    3,450.1
    312
    365
    677
    1,323.7
    1,927.9
    3,251.6
    합계


    소계
    7,552.7
    13,622.5
    21,175.2
    1,844
    2,630
    4,474
    7,551.9
    9,748.1
    17,300.0

    1. 야미(夜味)수란 필지수를 말한다.
    2. 全羅南道 務安郡『荷衣三島農地沿革及紛爭經緯』에서 작성.

     하의도의 산업으로는 농업을 중심으로 어업, 제염업 등을 들 수 있다. 조선후기 이후 미곡, 면화, 소금 등 상품생산경제의 발전에 따라 토지에 대한 농민의 실질적 권리가 증대되었고, 그 내부에서는 새로이 서민 지주층(경영형 부농층)이 성장했다 이에 관해서는 허종호『조선봉건말기의 소작제 연구』1965년, 김용섭『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 한말․일제하의 지주제와 농업문제 -』일조각, 1992년 등을 참조.
    . 인접한 암태도의 문씨 일가의 경우 박천우「한말․일제하의 지주제 연구 - 암태도 문씨가의 지주로서의 성장과 그 변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1983년 12월을 참조.
    , 17세기에 암태도에 정착한 이래 농업, 어업, 제염업 등에 종사하였고, 특히 입지조건을 이용한 염선상무역을 통해 거대 지주로서의 경제적인 기반을 형성했다. 하의도에서도 영산포와 강경 등지와의 지역간 가격차를 이용한 염선상무역이 증대되어, 문씨 일가와 같은 새로운 서민 지주층이 출현하였다. 예를 들면 뒤에 나오는 농민대표의 한 사람인 박공진(朴公振)은 하의도에 약 1,500여 두락의 전답을 소유한 서민 지주이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에 왕실과 궁가는 종래의 직전제 해체에 따른 생활유지비의 조달방법으로써 대규모의 궁장토를 절수(折受)하기 시작했다. 권력을 매개로 성립된 토지 절수는 원칙적으로 무지주․공한지 등에 한정되었지만, 그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고 처음부터 민전 침탈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후 궁장토의 소유형태는, 정조 때에 급가매득제(給價買得制)와 민결면세제(民結免稅制)가 실시되어 절수지․매득지․민결면세지라는 3유형으로 구분되었다가, 다시 유토․무토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절수지의 일부는 민결면세지로 바뀌어 무토가 되고, 나머지는 매득지와 함께 유토로 되는 등 다양한 구조로 분화되었다 이영훈『조선후기사회경제사』한길사, 1988년의 제3장을 참조. 이영훈은 17세기의 궁장토 성립에 대해 ‘개간지는 법률적으로 무주지의 경우가 많았다. 궁방은 이와 같은 토지를 대상으로 입안을 지급함으로써 법률적 소유권자로서 등장했다’고 한다(같은 책, 141쪽).
    . 그러나 궁방의 민전 침탈은 비옥한 평야지대 만이 아니라 하의도와 같은 서남해안의 도서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나갔다 당시의 민전 침탈 양상에 대해 『숙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前略)壬辰亂後 諸宮家 新歸無所聊賴 其時度支之臣及請給魚․鹽之場 此折受之所權輿也 今則京外衙門․新舊宮家 競受爭占 茫茫大洋 片片小舟 皆有所屬 各處差人 迭來疊徵鷹拏虎」(『肅宗實錄』(58) 42年丙甲11月乙亥條).
    . 하의도에도 정명공주방 면세전이 설치되어, 농민과 궁방 사이에 토지소유권 분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정명공주방 면세전이 하의도에 절수된 경위와 이후의 상황에 대해, 『영조실록(英祖實錄)』 「(諌院)叉啓 全羅道錦城縣荷衣․苔錦上下三島民呈狀 以爲貞明公主免稅田二十結在島中 其後傳給於該宮外裔 稱以宣廟朝 全一島折受 民田百六十餘結 盡數收稅 民人等不勝痛寃 癸卵年間 訟於京兆 終至見屈云 故京兆訟案 取來考見 則大抵此訟肯綮 在於免稅折受之分別 折受與否 在於王牌之有無 而京兆處決時 此等委折 置而不問 反以民人等二百張文書 謂之無官斜 而置之落科 夫奴婢賣買外田畓文書 勿論案外 絶無官斜之事 則以此責之於海外遇珉 巳可爲稱寃之端 而況各家奴輩 假稱宮差 一時下去 倚勢橫拏 鷄犬不寧 民人等之千里越海 □足來訴 非有寃爵之情 則必不至此 請京兆訴案及兩隻 下送本道 使道巨親執明快 俾無更訴之弊允之」(『英祖實錄』28(6年)庚戌12月癸亥條, 김종선,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領議政 金致仁曰 其一荷衣島及上下苔島 俱是貞明公主房折受之地 當初賜與 不過二十結 其後島民 私費物力築堰作畓 而今則勿論 官田民田一例 一例徵稅 至於每結米四十斗 叉納田稅大同二十三斗本官 一地兩稅 極爲免枉事也 折受自折受 民田自民田 況有賜與之結數則宮田民田 豈難辯別 而宮任官差 一例徵捧 至使島民兩應其稅 事之可駭 莫此爲甚函令本道 從實打量定界 母更有疊稅 稱免之弊 如何 上曰 所秦誠是 以此嚴飭」(『備邊司謄錄』第152冊, 英祖44年戊子十月初七日辛酉, 김종선,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 그리고 ‘해방’ 이후의 농지개혁 과정에서 농민들이 작성한 『하의3도 농지연혁 및 분쟁경위(荷衣三島農地沿革及紛爭經緯)』 全羅南道 務安郡『荷衣三島農地沿革及紛爭經緯』. 이 자료는 농지개혁 당시 ‘하의3도 농지해결위원회’의 최고위원인 김기배(金琪培〔背〕, 면장)가 초안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하의3도 농지연혁 및 분쟁경위(荷衣三島農地沿革 및 紛爭經緯)」와 첨부자료인 「경성공소원 법원 민사부 재판기록(京城控訴院法院民事部裁判記錄)」, 「화해조서(和解調書)」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전문은 『성대사림』제5집(성대사학회, 1989년 12월)에도 게재되어 있다.
    의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600년대 초에 선조는 정명공주의 부마 홍주원(洪柱元, 1606~1672)에게 하의도의 민전 합계 약 160결 중에서 20결에 대한 결세 징수권을 자손 4대에 한정하여 무토사패지로서 사여했다. 그래서 농민은 20결에 대한 백미 형태의 결세를 정명공주방 홍씨 일가에 납부했다. 그러나 홍씨 일가는 결세 징수권 기한이 지난 이후(1700년대)에도 160여 결에 대한 전수징수권(全數徵收權)과 전도절수권(全島折受權)을 주장하며 하의도에 대한 결세의 납부를 농민에게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농민은 약 200매의 결세 원부와 양안 등에 의거하여 홍씨 일가의 불법행위를 관찰사와 군수에게 제소했지만, 홍씨 일가와 지방 관청의 결탁으로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1723년(경종 3년)에는 대표자 윤세민(尹世敏) 외 2명이 경조정소(京兆呈訴,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하여 홍씨 일가의 위법행위를 엄금한다는 ‘어제(御題)’를 교부 받았지만, 홍씨 일가는 자기 노복 10여명을 동원하여 대표자를 체포하고, ‘어제’ 및 기타 문권을 탈취했다. 이 결과 농민은 전세와 대동미 23두를 호조만이 아니라 홍씨 일가에도 납부하는 소위 이중 결세(一土兩稅)를 부담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 농민은 여러 번 전라감사 이호준(李鎬俊)에게 이중 결세의 부당성을 탄원했다. 1870년에 이호준은 홍씨 일가에게 120결에 대한 세미 징수를 금지시키고, 또 20결에 대해서도 종래 1부당 3승이었던 결세액을 1승으로 인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홍씨 일가는 관아의 명령을 무시하고 결세 징수를 계속했다.
     그런데 하의도 토지문제는 일제의 ‘역둔토조사사업’의 실시를 계기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일제는 재정정리와 제실재산의 정리라는 명목으로 역토와 둔토 뿐만 아니라 궁장토․목장토․능원묘위토․미간지 등의 토지를 ‘역둔토’에 포함시켜 국유지 면적을 확보하려 하였다 ‘국유지조사사업’에 대해서는 權寧旭「日本統治下の朝鮮における所謂『驛屯土』問題の實體」『朝鮮近代史料硏究集成』제3호, 1960년 5월, 신용하,「일제하 조선토지조사사업과 국유지(역둔토) 창출 및 조사」『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지식산업사, 1982년 등을 참조.
    . 도지부 내장원(度支部 內藏院)은 하의도의 전답을 정명공주방의 유토궁장토로 사정하고 국유지로 편입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종래의 백미 수납제를 현금 수납제로 변경하여 농민으로부터 결당 8원의 결세를 징수했다. 이에 대해 농민은 도지부 내장원과 ‘제실유 및 국유재산 조사국(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에 국유지로의 토지편입의 부당성을 탄원하고 문권 서류를 근거로 이의신청을 제기했다. 그러나 홍씨 일가의 홍우록(洪祐錄, 정명공주의 8대손)은 심의과정에서 ‘제실유 및 국유재산조사국’에 하의도는 홍씨 일가의 사유지라고 주장했다. 홍우록은 목포 재무서의 타케이(武井), 히라시마(平島), 토미나가(富永) 등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허위로 두락 문권을 작성하고 『시대일보』1924년 12월 11일.
    , 1907년 11월 12일에는 내장원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하의도가 홍씨 일가의 사유지인 것처럼 꾸민 것이다 청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本郡所在荷衣上臺下臺三島仁穆大妃賜給本房收納賭租干今三百餘年文卷與量案自在私庄的確巳亥秋自內藏院忽地專管不勝□折事’『全羅南北道訴狀(光武十一年度)』(奎19151)
    . ‘제실유 및 국유재산조사국’은 홍씨 일가가 제출한 문적(文蹟)과 양안을 일일이 조사한 뒤, 하의도 전답의 소유권은 정확히 홍씨 일가의 홍우록에게 있다는 하급증(下給證)을 교부했다 『황성신문』1908년 6월 27일.
    . 홍씨 일가는 1908년 10월에 지도 군수에게 소유증명서의 급부를 신청하여 토지소유권을 획득하게 된다.
     홍씨 일가의 도조는 궁차(宮差)인 김례묵(金禮黙)을 통해 징수되었다 1907년 이전의 궁장토 토지관리는 ①궁방-궁차-감관-사음-소작농, ②궁방-도관-사음-소작농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하의도의 경우는 ①의 토지관리방식이었다(安秉珆『朝鮮社會の構造と日本帝國主義』龍溪書舍, 1977년, 266~267쪽의 그림 참조).
    . 김례묵은 도조징수 시, 목포의 이학범(李學範), 시모야 로우토우(下野浪登) 등 폭력배 60~70명을 무장 동원시켰다 『시대일보』1924년 5월 21일.
    . 농민은 도조의 강제징수에 대해 ‘경작지 소유권은 도민에게 있기 때문에 세금은 물론 한푼의 도조도 지불해야 할 의무가 없다’ 「경성공소원 법원 민사부 재판기록」
    며 도조의 납부를 거부했다. 그러나 김례묵 등은 도조를 강제로 징수하였고 그 과정에서 김준열(金俊烈, 면장)이 사망하는 등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홍씨 일가의 강제적인 도조징수에 대해 농민은 상태도 서리의 박공진(朴公振), 하의도 대리의 이권문(李權文)과 김석찬(金碩燦)을 대표로 선출하고 지도 군수 채수강(蔡守康)에게 홍씨 일가의 불법행위를 탄원했다. 또 농민은 1909년 4월에는 경성 공소원 법원 민사부에 ‘부당이득 반환소송’을 제기함과 동시에 박공진과 신봉현(申奉玄)의 명의로 ‘전남 지도군 하의․상태․하태 3도 토지는 본래 민유지이다. 경성에 살고 있는 홍우록이 이를 정명공주방 사패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 섬의 주민 등이 경성 지방법원 재판소에 제소해 현재 재판중이다. 홍씨가 이 토지를 외국인에게 방매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토지는 민유지일 뿐만 아니라, 현재 재판에 계류 중이므로 국내외인은 이에 속지 말기를 바란다’ 『황성신문』1909년 4월 8일.
    는 신문광고를 게재하고 농민들의 민유지임을 주장했다. 재판 결과 재판부는 ‘피공소인(홍우록-인용자)은 공소인(농민-인용자)에게 1,361원 8전 6리를 지불하라’는 판결과 함께 「경성공소원 법원 민사부 재판기록」
    , 1909년도에 홍씨 일가가 강제 징수한 도조의 반환을 명령했다. 이 판결은 홍씨 일가의 도조징수에 대한 부당이득의 반환이라는 형식이었지만 ‘역둔토조사사업’에 의해 인정된 홍씨 일가의 토지소유권을 법률적으로 부정하고 처음으로 농민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하의도 전답은 ‘입도조’ 자신들의 자금과 노동력에 의해 개간되었지만, 정명공주방에 절수된 이후 농민은 궁방과 도지부 쌍방에 이중 결세를 납부해야만 했다. 그리고 ‘역둔토조사사업’ 시에 ‘제실유 및 국유재산조사국’은 정명공주방을 유토궁장토로 사정해 국유지로 편입했다. 농민의 이의신청에도 불구하고 홍씨 일가가 위조한 문권과 양안에 의거해 홍씨 일가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였다. ‘역둔토조사사업’은 하의도의 사례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듯이 민유지를 약탈하여 방대한 국유지를 확보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은 국유지분쟁의 구체적인 처리과정에서 홍씨 일가의 도조징수에 강력히 저항하면서 경성 공소원 법원 민사부에 ‘부당이득 반환소송’을 제기하는 등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민사부는 부당한 도조 징수액의 반환이라는 판결을 통해 홍씨 일가의 토지 소유권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하의도에서의 국유지 분쟁에서 최종적으로 농민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한 이 판결은, 이후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 소유권을 주장해 나가는데 중요한 근거로 작용하였다.

     3. 우콘 콘자에몬(右近權左衛門)의 토지매수와 ‘화해조서’

     일본인 대지주의 조선진출과 토지투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러일전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의 체결로부터 1907년의 ‘제3차 한일협약’의 체결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식민지 지주로서 성장한 일본인 지주는 총 109명에 달했다 통감부『제3차 통감부통계연보』1910년, 247~256쪽 참조.
    . 일본인 지주의 토지투자는 ‘한국병합’에 의한 식민지 지배체제의 정비를 계기로 개항장을 거점으로 한 비옥한 삼남지방의 평야 지대에 집중되었으나 토지 매수 범위는 점차 하의도와 같은 도서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하의도의 토지도 일본인 지주의 토지투자 대상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의도가 일본인 지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살펴보겠다.
     하의도의 토지는 앞에서 서술한 ‘부당이득 반환소송’의 판결이 내려지기 직전, 조선인 지주를 경유하여 일본인 지주에게로 그 소유권이 전매된다. 홍씨 일가는 재판 심의 도중에 하의도의 전답을 비밀리에 당시 한일은행장이었던 조병택(趙秉澤)과 전북 지역의 대지주였던 백연기(白寅基)에게 1만 5천원에, 또 조병택은 정병조(鄭炳朝) 목포의 거주했던 정병조는 당시의 ‘궁삼면’ 토지문제에도 관여한 소위 토지 브로커였다. 그에 대해서는 졸고, 「日本帝國主義下における朝鮮農民運動に關する一硏究 - 宮三面土地回收運動を中心として」을 참조.
    에게 5만 7천원에 매매하였다. 홍씨 일가는 농민의 도조 납부 거부와 ‘부당이익 반환소송’의 제기 등의 반대운동에 직면하자, 농민이 토지전매를 우려하는 내용을 신문에 게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소판결 직전에 전답을 처분하고 만 것이다. 하의도의 전답은 1911년, 조선에서 토지집적을 도모하고 있었던 우콘 콘자에몬(右近權左衛門)이 정병조로부터 11만 5천원에 사들이게 된다.
     우콘은 오오사카(大阪)에서 일본 해상운송 화재보험 주식회사, 오오사카 상선 주식회사, 우콘 상사 주식회사 등을 경영하고 있었던 상업자본가로서, 러일전쟁 이후 해운업이 불황에 빠지자, 조선에 진출하여 고율의 투자이익을 남길 수 있는 토지에 투자하는 길을 모색한다.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비밀리에 일본 본국에 한 관계자를 파견하여 우콘 일가에게 조선에서의 토지매수를 권유했고, 이 권유에 관여했던 한 사람이 일본 해상운송 화재보험 주식회사의 전 토쿄 지점장(木村英俊)이었다고 한다 淺田喬二, 앞의 책, 129~130쪽 참조.
    . 우콘의 토지매입이 식민지 권력의 비호아래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우콘의 토지소유 면적은 1931년 당시 논 2,059정보, 밭 791정보, 기타 13정보, 합계 2,863정보에 달했다 淺田喬二, 앞의 책, 부표 33 참조.
    . 농장경영의 특질은 매수한 토지를 곧바로 소작제 농장으로서 직접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농장 수익이 예측될 때까지 다른 일본인 지주에게 신탁 관리하도록 하였다. 우콘은 토지매수 후에 서울의 우치야마 상회(內山商會)에 위탁경영을 의뢰하였는데, 우치야마 상회는 곧바로 하의도에 소작제 농장경영을 위한 우콘 농장출장소(주임은 山本嘉次太)를 설치했다 『황성신문』1910년 8월 5일.
    .
     그러나 우콘의 토지매수는 앞의 판결 결과에 의해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우콘은 사전에 목포재판소 판사였던 오오타니 노부오(大谷信夫), 목포 경찰서장이었던 마츠이 노부스케(松井信助) 등과 결탁하여 농민대표의 한 사람인 박공진을 회유함으로써 하의도 전답에 대한 토지소유권만이 아니라, 산림과 택지 및 묘지의 소유권도 획득하려 하였다. 즉 우콘은 박공진에게 이번 공소법원의 승소판결이 부당이득 반환에 대한 판결에 불과한 것이지, 토지소유권을 확정한 판결은 아니라며 곧바로 홍씨 일가의 홍우승(洪祐勝)을 상대로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을 제기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고 우콘은 박공진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의 소유전답 1,500여 두락에 대한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기로 약속하고, ‘부당이득 반환소송’의 판결문과 새로운 제소를 위한 위임장의 교부를 요청했다. 박공진은 전체 농민의 약 25%에 해당하는 상태도의 박응식(朴應植) 외 340명이 날인한 백지 위임장을 우콘에게 건네주고 계획대로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비조인파 농민은 곧바로 3도민대회를 개최하여 도청과 총독부에 소송취하를 진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목포 경찰서는 1913년 7월, 다수의 경찰과 경비선을 동원해 농민의 진정운동의 움직임을 사전에 저지시켰다. 1914년 2월, 진정운동이 실패하자 분개한 농민들이 부녀자 단체인 ‘내여회(內女會)‘를 중심으로 박공진의 가옥을 방화하는 등 위임장에 조인한 자들을 폭행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빌미로 목포경찰서는 우콘과의 사전 계획대로 무장경찰과 헌병 약 700여명을 하의도에 상륙시켜 제갈홍빈(諸葛洪斌) 등 비조인파
    농민 100여명을 ‘가옥파괴죄’ 명목으로 검거하게 된다 검거자 중에 제갈홍빈(諸葛洪斌)과 ‘내여회’의 8명, 합계 9명이 기소되었는데, 2명은 징역 3년, 나머지는 각각 1~2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한다((구술․제갈남출「참으로 한맺힌 곳이요이, 요 쪼깐한 섬이 - 하의도 토지 분쟁 300년」『학원』1, 1985년 여름, 109쪽).
    .
     한편 목포재판소는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의 제소를 계기로 우콘의 불법적인 토지매수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려 하였다. 1914년 4월, 목포재판소는 농민에게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의 제기는 우콘과 소작인 쌍방의 경제적인 손실만을 초래한다는 명목으로 소위 ‘화해조서’에 조인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이 ‘화해조서’는 우콘과 박응식(朴應植) 외 340여명의 농민사이에 체결되었는데, 식민지 지주에 의한 토지집적 과정의 수탈성을 잘 보여주는 16개항으로 이루어진 ‘화해조서’의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제1항 원고(농민-인용자)는 별지 제1호 전답(위의 표-인용자)의 소유권이 주참가인(우콘-인용자)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인도하기로 한다. 전기 전답에 관한 문기, 기타 소유권을 입증할 수 있는 모든 서류는 금일부터 2개월 내에 주참가인에게 인도하기로 한다.
    제2항 주참가인은 소유자로써 원고에게 전기 전답의 영소작권을 부여한다. 전항 소작권은 주참가인이 종래의 관습 및 소작지의 상황 등을 참작하여 금일부터 3개월 이내에 결정하여 승인을 받기로 한다. 이 승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기로 한다. 영소작권의 설정행위에 관해서는 앞의 각 항에 정한 것 이외에는 주참가인이 정하기로 한다.
    제3항 소작료를 정한 날부터 5년 이상 소작인의 의무를 잘 지키고 성적이 우량한 소작인에게는 소작인이 청구할 경우 주참가인의 선택에 따라 그 소작지의 10분의 1을 증여하거나 소작지를 시가보다 1할 낮은 가격으로 매도하기로 한다.
    제4항 주참가인은 금일부터 3개월 이내에 원고 및 비신청인(1914년 화제1호 이상섭[李尙燮] 외 1명)에게 전답에 대한 위로금으로서 30,200원을 지불하기로 한다. 이는 지도 군수의  조사 등을 참작하여 다음 표준을 기준으로 종래 각 소유자가 소유한 두락수에 따라 분배하기로 한다.
       하의도 전  5,900원
           답 10,000원
       상태도 전  3,220원
           답  6,060원
       하태도 전  1,750원
           답  3,250원
    제5항 주참가인은 원고가 종래 소유한 택지, 분묘지의 소유권이 원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주무관청이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장소를 공동묘지로 제공하기로 한다.
    제6항 다음 산림에 대한 지적 보고를 한다. 원고 윤성현(尹成鉉)은 주무관청으로부터 소유권을 인정받은 뒤, 앞 항의 분묘지를 제외하고 1반보당 30전에 주참가인에게 양도하기로 한다.
     一、지도군 하의면 하태후표목산 1정 8반 7무 25보
     一、동면 기동 서사대차서산 1정 2반 8무 7보
     一、동면 동당후산 7반 12보
      지적보고를 하여 소유권을 인정받은 기타 원고도 위에서 정한 바에 따라 소유권을 주참가인에게 양도하기로 한다.
    제7항 앞 항에 의해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한 원고 및 지적 보고를 하지 않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원고는 주참가인의 청구에 응해 산림 양여액을 주무관청에 제출하여 양도를 받아 곧바로 주참가인에게 1반보당 30전에 양도하기로 한다.
    제8항 제6항, 제7항 이외의 산림에 대해 주참가인이 그 대하액을 주무관청에 제출하고자 할 때 원고는 방해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 주참가인이 대하 또는 양여를 받았을 때 원고에게는 부산물 채취권리를 주기로 한다.
    제9항 주참가인은 제6항 내지 제8항의 산림에 식림하기로 한다.
    제10항 주참가인은 산업 개발을 위해 연 8리 이하의 이자로 총 2만원 이내의 자산을 원고 및 전기 신청인에게 대여하기로 한다.
    제11항 주참가인은 관개용으로 금일부터 3년 내에 적어도 하의도에 3개소, 상태도와 하태도에 각각 1개소의 저수지를 건설하기로 한다.
    제12항 주참가인은 앞 항 기간 내에 교통에 필요한 도로를 설비하고 기선을 마련하기로 한다.
    제13항 주참가인은 하의도 외 두 섬에 앞 항 기간 내에 간이학교 및 병원을 설립하기로 한다.
    제14항 주참가인은 1913년도까지의 전기 전답의 소작료를 징수하지 않기로 한다.
    제15항 주참가인은 본건 소송비용으로 원고 대리인인 오카다 사카에(岡田榮)에게 1,500원, 박공진에게 5,000원을 금일부터 2개월 내에 교부하기로 한다.
    제16항 본건 당사자는 위 각 항 이외의 본건에 관해 종래 있었던 권리는 모두 포기하고, 소송비용은 각자 부담하기로 한다.

     즉 ‘화해조서’의 주요 내용은 우콘에게 전답의 소유권을 인정하고(제1항), 그 대신에 농민에게는 영소작권을 부여한다(제2항)는 것이었다. 또 산림의 양도에 대해서는 우선 농민이 주무관청에 지적보고를 하고 획득한 소유권을 우콘에게 반보 당 30전에 양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7항). 그리고 ‘화해조서’ 중에는 소작지 일부의 증여나 매도(제3항), 위로금의 분배(제4항), 더욱이 산업개발 자산의 대여(제10항), 저수지의 건설(제11항), 도로와 기선의 설비(제12항), 학교와 병원의 설치(제13항), ‘화해조서’ 조인 이전의 소작료 면제(제14항) 등의 항목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러한 항목은 ‘화해조서’의 조기 조인을 위한 기만적인 항목에 불과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우콘은 전답과 산림에 관한 문기 등의 서류를 손에 넣자 ‘화해조서’의 의무사항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콘의 토지집적과정은 ‘선 토지확보-후 문제해결’이라는 극히 약탈적인 것이었다. 우콘은 농민과 홍씨 일가와의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분쟁 경과를 잘 알고 있었으며, 재판소와 경찰서 등 식민지 권력을 동원하여 우선 토지매수에 착수한 뒤, 농민에게 ‘화해조서’를 강요하는 형태로 하의도의 대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우콘의 불법적인 토지집적 과정은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에 의해 법률적으로 확정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의도 농민은 ‘부당이익 반환소송’에서 승소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지주 우콘은 토지매수를 감행하고, 그의 책략에 의해 제기된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의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화해조서’를 강요함으로써 하의도 토지소유권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매수 시기 전후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우콘의 토지소유권을 최종적으로 인정하였다. 즉 ‘토지조사사업’은 하의도의 경우와 같이 농민들 스스로가 개간한 민전을 식민지 지주 우콘의 소유로 승인함으로써 식민지 지주제의 확립을 옹호한 것이다. ‘토지조사사업’ 자체의 반농민적 성격은 하의도의 사례 하나만을 보더라도 극명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4. 토쿠다 양행(德田洋行)의 토지매수와 유상구입운동

     1919년 9월, 우콘은 오오사카의 토쿠다 양행(대표는 토쿠다 야시치, 德田彌七)에게 우콘과 농민간의 ‘화해조서’를 이행한다는 전제 위에서 논 1,869평 외 1,054필, 밭 4,028평 외 1,616 필, 합계 약 400만평의 하의도 토지를 전매한다 「예심종결결정(豫審終結決定)」(1928년, 豫第4, 6, 8, 9號)」. 일부 자료에 의하면 우콘은 시마네현(島根縣)의 국회의원인 카미나미 노부죠우(神波信藏)에게 19만원에 매각했는데, 카미나미는 토지매수자금 19만원 중 17만원을 토쿠다에게 하의도 토지를 저당하고 60일간 차용했으나 기일내에 갚지 못하자 토쿠다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고 한다.
    . 매수 가격은 그간의 체납 소작료인 벼․보리 합계 약 5천석과 현금 25만원이었다. 우콘은 11만 5천 원에 구입한 전답을 1911년도 이후의 체납 소작료는 물론이거니와 약 2배가 넘는 가격으로 토쿠다 양행에 팔아 넘긴 것이다.
     한편 우콘의 토지매수 이후, ‘화해조서’에 날인하지 않은 비조인파 농민은 우콘에게 소작료를 납부하지 않고, 새로 김응재(金應才) 외 2명을 농민대표로 선출하여 목포지방법원에 ‘부당이익 반환소송(1916년 7월)’을, 또 대구복심법원에 ‘토지소유권 반환소송(1918년 3월)’을 제기하는 등의 토지회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하의도의 토지소유권이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이미 우콘의 소유지로 인정되었으며, 또 사정 공시 당시 농민이 이에 불복한다는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송을 기각하고 만다. 토쿠다 양행의 토지매수가 적법한 것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토쿠다 양행은 토지매수 이후 농장경영의 본부로 목포에 토쿠다 양행 지점을 설치하여, 전 육군 중위인 미야자키 켄지(宮崎憲之)를 주임으로 파견하고, 하의도의 농장사무소에는 예비역 헌병 보조원이었던 신기빈(申奇彬), 전 순사였던 장고묵(張考黙), 김영두(金榮斗), 장운경(張雲耕)을 사무원으로 채용하였다. 또 마름으로는 농민 중에서 고태진(高泰珍), 이상섭, 김자욱(金子郁) 등을 채용하여, 주임-사무원-마름-소작인이라는 농장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시대일보』1924년 12월 13일.
    . 이상섭은 앞의 ‘화해조서’ 제4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하의도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서민 지주층으로 추측되는데, 우콘이 ‘화해조서’ 조인 시에 농민 대표를 회유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토쿠다 양행 또한 농장경영에 있어서 유력 농민층을 농장 측으로 끌어 들였음을 알 수 있다.
     농장설립 후인 1921년 8월에 농장은 두 곳에 ‘평화기념비’를 설치하고 표면적으로는 소작료의 인하를 선전하였다. 그러나 농장주임 미야자키는 우콘이 소유했던 때의 미납 소작료를 징수한다는 명목으로, 목포경찰서의 무장 경찰 20여명과 집달리 등 60여명을 동원하여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였다. 토쿠다 양행은 우콘에게 토지를 매입했을 당시의 체납소작료를 농민에게 전액 전가시켰던 것이다.
    이에 대해 농민은 ‘소작료 불납 동맹’을 결성하였지만, 미야자키는 평균 논 1두 당 벼 7승, 밭 1두 당 대두 3승을 추가로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소작료가 부족한 경우에는 부업 생산품인 면화, 더 나아가 가재도구 마저 강제로 차압하기도 하였다. 또 면화는 부녀자들의 부업으로 경작되었는데, 농장 사무원은 면화무역을 통한 이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농민으로부터 강압적으로 군청의 낙찰시가보다 근당 3전 5리 싸게 구입했으며, 마름 고태진(高泰珍) 등과 공모해 상태도 동리에서는 면화 수 천근을 근당 4~5전 싸게 사들이기도 했다. 이에 농민들은 박형천(朴亭天), 김응재를 농민대표로 선출하여 이들을 고소하기도 했다 『시대일보』1924년 12월 14일.
    .
     한편 농장은 1923년도부터 종래의 소작료 환산방식이었던 ‘두락제’를 폐지하고, 새로 ‘평제’를 도입해 평수의 증가에 따른 소작료의 추가 징수를 획책하였다. 예를 들면 ‘평제’의 도입에 의해 상태도 서리의 김화정(金化正)의 소작지는 20평에서 24평으로, 김용심(金用心)의 소작지는 60평에서 164평으로 각각 증가하였으며 『시대일보』1924년 12월 14일.
    , 상태도 서리의 임문순(任文順)의 소작료 납입 고지서에 의하면 『시대일보』1924년 12월 15일.
    , 1923년도에는 소작지 면적 2,013평, 소작료 2석 5두 4합이었던 것이 ‘평제’ 도입 이후인 1924년도의 사정에서는 소작지 면적 2,713평, 소작료 3석 5두 9합으로 증가되었다. 또 농장 소작료율은 계약상 3할 5분이었지만, 농경지 이외의 황무지와 휴간지 등이 평수에 계산되어 실제 납부해야 할 소작료율은 6~7할에 달했다. 농장의 토지측량의 원래 취지는 측량의 단위를 두락에서 평으로 바꾸어 효율적인 농장경영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위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실측 토지면적보다 넓게 측량하는 등 지주의 소작료 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한 교묘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이에 농민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대대적인 토지의 재측량을 요구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토쿠다 양행은 매수시의 이행조건이었던 ‘화해조서’ 중의 제반 시설의 설치 등의 항목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음은 물론, 우콘 소유시의 체납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제’ 등의 도입을 통해 실납 소작료율을 증가시키는 등 지주경영의 강화만을 도모하였다. 이중, 삼중고를 견뎌내기 힘들었던 농민들 가운데는 ‘화해조서’에 의거해 영소작권을 타인에게 매매하고 국외로 이주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소작권의 매매가격은 상답 60~70원, 하답 20~30원 정도였는데 『시대일보』1924년 12월 13일.
    , 농민은 곤란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영소작권을 타인에게 전매하고, 그 자금으로 일본의 오오사카 등지로 건너 가 노동자로 생활하는 길을 택하였다. 1927년 당시 오오사카에 거주하고 있었던 하의도 출신의 노동자는 약 70여명에 달했다.
     한편 영소작권의 매매 현상은 농민 내부에 새로운 중간지주의 등장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영소작권의 매매는 소수의 유력 농민층에게 영소작권 권리를 집중시켜, 하의도에는 토쿠다 양행의 매수 당초의 ‘농장-소작인’이라는 계층구조로부터 ‘농장-중간지주-소작인’이라는 소위 이중 소작구조로의 변모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계층구조는 농장 측의 유력 농민층 포섭책의 추진을 통해 강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소작인은 농장과 중간지주에게 이중의 소작료를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토지회수운동은 이러한 농민 내부의 복잡한 당면 이해관계를 반영하면서 전개된다.
     토지회수운동은 3․1 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922년 소작인은 ‘하의소작인회’를 결성하고 토지회수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의소작인회’의 지도부는, 회장에 박장환(朴庄桓, 앞의 ‘화해조서’ 시의 박응식의 아들), 부회장은 김기배(金棋背), 간사는 강신재(姜辛才), 김향균(金享均), 최용도(崔龍道), 박종숙(朴鍾淑), 박중선(朴仲宣) 등이었다. 이에 대해 농장주임 미야자키는 목포경찰서와 결탁하여 소작인회의 간부 수십 명을 검거하고, 토쿄 상애회(東京相愛會) 총본부 부회장인 박춘금(朴春琴)을 매수하여 소작인회의 활동을 방해했다. 또 회장 박장환에게 소작인에 대해 3,000원의 저리 영농자금을 융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등 박장환은 농장으로부터 받은 저리영농자금을 혼자서 유용했다고 한다(제갈남출, 앞의 구술, 110쪽 참조).
    조합 지도부의 분열을 기도하였다. 이 결과 3․1 운동 이후 결성된 ‘하의소작인회’는 얼마 되지 않아 해체되고 말았다.
     토지회수운동은 1924년 1월에 다시 토쿠다 양행으로부터 농지를 유상 구입하는 형태로 재현된다. 당시 토쿠다 양행은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김국태(金局泰)에게 토지를 매도하려고 하였다 토쿠다 양행의 토지매도계획은 1924년 5월에 황해도에 거주하고 있는 이 모씨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 모씨는 하의도의 조경열(曹京悅) 외 3인과 연락을 취하면서 자기가 토지를 매수해 5년 내지 10년의 연부상환법에 의거해 토지를 분배할 것이라고 선전했다고 한다(『동아일보』1924년 5월 22일).
    . 이를 계기로 농민대표 9명은 총독부에 토쿠다 양행의 ‘화해조서’의 불이행을 고발함과 동시에 합계 22만원에 토지를 농민에게 유상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아일보』1924년 1월 31일․2월 1일.
    . 그리고 1924년 4월에 이영환(李英煥) 등 농민 670여명은 도민대회를 열어 하의도 토지의 유상 구입을 위한 4개조 결의문을 가결했다. 4개조의 결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1924년 5월 20일.
    .

     ① 토지대금은 22만원으로 결정해 매수할 것
     ② 토쿠다 야시치(德田彌七)가 매도를 거절할 시에는 최후의 결사적 행동을 취하고 또 한편으로는 소송을 제기할 것
     ③ 소위 구지주 우콘 콘자에몬에 대한 화해조건과 토쿠다 야시치에 대한 화해계약은 그들 스스로 이를 무시하고 있으므로 도민도 이를 해제할 것
     ④ 실행위원은 김응재(金應才)․김향균․이영환․박인권(朴寅權)․최병인(崔炳寅)․신자홍(申子弘)

     이와 같은 농민의 유상구입운동에 대해 미야자키와 마름 이상섭, 김자욱, 우자환(禹子煥) 등은 재차 농민 중에서 김경진(金京振) 외 6명을 이용해 농민 내부를 분열시키려 하였다. 즉 농장은 ① 농경지 1두당 상토 50원, 중토 35원, 하토 25원에 5년 연부로 각 개인에게 매각한다 ② 합계 2만원의 저리자금을 융자한다 ③ 소작료를 인하한다 『동아일보』1924년 6월 2일.
    는 등의 조건을 농민에게 선전하였으나, 이는 농민들의 토지 구입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허위 약속에 불과하였다.
     농장은 농민 내부의 분열책 뿐 아니라, 또 1924년 8월에는 다시 박춘금을 동원하여 농민과의 조정 공작에 나섰다. 이 결과 양자 사이에는 ① 소작인에 대한 보리 소작료는 7월 31일까지 완납한 사람에게는 종래의 4분 7리를 3분 5리로 낮춰주기로 한다. 정조(定租)는 납입 기한까지 완납할 경우 기정률보다 100평당 3합을 낮추기로 한다. ② 농장 사무소의 사정에 의거하여 불모지, 교통지로 인정된 것은 그 지적을 감소하기로 한다. ③ 각 연도 소작료를 완납한 자에 한해서만 1921년 1월 20일 토쿠다 양행과 소작인 사이에 체결되어 있는 소작 계약 이전의 체납 소작료는 독촉하지 않기로 한다 ④ 소작인에게 이익이 되는 부업을 하는 데에 자금이 필요할 경우, 농장 사무소가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사업에 대해서 금품을 대여할 수도 있다는 내용의 각서가 조인되었다 「예심종결결정」
    . 농장은 저리 부업자금의 합계 약 1만원과 벼․보리의 종자를 대여하고 비료대의 3분의 1을 보조하는 등 농민과의 의견 조정에 나서 농민들의 유상구입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상과 같이 3․1 운동 이후의 하의도 토지회수운동은 ‘하의소작인회’의 결성과 해체, 그리고 유상구입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지만, 농장 측의 탄압․회유책 때문에 모두 좌절되고 말았다. 당시 다른 지역에서는 청년 지식인의 주도로 수많은 소작인 단체가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의 보장, 그리고 지세 공과금의 지주 부담 등을 요구한 소작쟁의가 전국적인 범위로 전개되었는데 예를 들면 大和和明「1920年代前半期の朝鮮農民運動-全羅南道順天郡の事例を中心に-」『歷史學硏究』(제502호, 1982년 3월) 등을 참조.
    , 하의도에서는 그러한 소작관행의 개선 문제보다 토지 소유권의 회수를 위한 유상구입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운동과의 질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조선 헌병대 사령부는 1927년도의 하의도와 ‘궁삼면’의 토지회수운동의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즉 ‘소작쟁의는 24건, 쟁의 연인원 4천 명에 달한다.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악질적인 것이 있다. 즉 전남 무안군 하의도에서와 같이 생산분배 범위를 넘어 토지탈환을 목적으로 한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과거 부패한 권력이 토지소유권을 확보하여 한 지방, 한 섬이 모두 개인의 소유로 돌아 간 결과이다. 앞으로 농민운동의 발달과 함께 이와 같은 분쟁은 점점 심각해 질 것이라 판단된다. 또 전남 나주군 영산면, 세지면, 왕곡면 등 5개 면의 일부에 걸친 소위 궁삼면 토지탈환 계쟁사건은 1926년4월 1일, 소유자인 동척으로부터 일부의 토지를 무상 양도받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그러나 대표라고 칭하는 박규양(朴奎陽), 채기두(蔡基斗) 외 1명은 1927년 말부터 서울-토쿄간을 왕복하며 은밀하게 토지회수 운동의 재연을 획책하고 있다. 또 1928년 1월에는 소송을 제기한다는 소문이 있어 엄중히 사찰중이다.’(朝鮮憲兵隊司令部「輓近ニ於ケル鮮內勞働農民運動ノ情勢(朝第1279號)」1928년 5월 15일).
    . 농민들은 토지회수를 위해 ‘소작료 불납 동맹’을 결성하고 토쿠다 양행의 토지매수 이후의 벼 소작료 합계 2,000석, 보리 소작료 합계 2,700석의 납부를 거부하였으며, 토지 소유권 그 자체의 회수를 추구하였다.
     또 하의도의 소작인은 자제들의 교육을 통해 토지회수를 위한 새로운 인재를 육성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하의도에는 1924년 당시 일본 유학생 2명, 서울의 각 전문학교생 3명, 고등 보통학교생 10여명, 보통학교 졸업생 30여명이라는 청년 지식인층이 분포되어 있었다 『시대일보』1924년 12월 15일.
    . 조선 농민은 식민지 지주제로 대표되는 현실 상황의 극복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준비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 후반기의 토지 회수운동은 이러한 청년 지식인층과 일본 오오사카의 하의도 출신의 이주민의 주도로 등장한 농민운동의 새로운 국면이라 할 수 있다.

     5. 하의도 농민조합과 토지회수운동

     1927년 1월 30일, 오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던 최용도(崔龍道), 고장명(高長明) 등의 하의도 출신 노동자 약 60여명은 ‘하의노동청년회’를 조직하고, 동년 6월에는 일본 노동농민당 오오사카 지부의 집행위원인 아사히 미즈이(朝日見瑞)에게 하의도 농민조합의 조직을 위한 원조를 요청했다. 그래서 일본 노동농민당은 동년 9월에 최용도를, 그리고 10월에는 강성사(姜誠思)와 김병안(金炳安)을 특파해 농민조합을 조직하려 했으나 농장 측과 관헌의 방해 때문에 실패했다 『동아일보』1928년 2월 27일.
    . 또 동년 11월에 일본 노동농민당의 대표 코가 사다오(古賀貞雄)와 토쿄 신간회의 대표 강소천(姜小泉)은 하의도 실지 조사에 나섰고, 더욱이 조선 공산당 사건의 변호를 위해 조선을 방문한 변호사 후루야(古屋)도 하의도 토지문제의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동아일보』1927년 11월 11일.
    . 하의도 토지문제는 토지로부터 유리된 하의도 출신 노동자의 활약에 의해 조선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한편 농장 측은 1927년도의 소작료 징수 시 2회에 걸친 강제 차압을 단행했는데, 이를 계기로 다시 하의도 농민조합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의도에 돌아와 있던 최용도는 오오사카의 고장명, 아사히 등에게 조합 조직을 위한 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12월 27일에는 아사히가 농민조합 특별활동위원으로, 이로카와 타로우(色川太郞)는 조합 고문으로, 니시나 유우이치(仁科雄一)가 조합 상무위원으로서 「예심종결결정」
    하의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1928년 1월 2일에 최용도 외 약 300여명은, ‘앞으로 일치 단결하여 조선 전 무산계급의 모든 운동과 결합하고 전세계 무산계급의 절대적인 응원 하에, 탐욕스러운 지주의 압박과 관헌의 간섭을 용감하게 돌파하고 열악한 소작제도로부터 해방되어 광명의 큰길로 나아가기 위해 전진하자’고 선언하며 「예심종결결정」
    하의도 농민조합의 발대식을 개최하였다.
     하의도 농민조합의 조직은 집행위원회와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구호부, 농사부, 교육부, 조사부, 외교부, 선전부, 부인부, 회계부 등이 설치되었다. 집행위원장은 장정태(張正泰), 선전부장은 최용환(崔龍煥), 교육부장은 고장명, 집행위원은 변인옥(卞仁玉), 공유범(孔有凡), 최용도 등이 선출되었다. 조합원은 약 800여명에 달했다. 조합 강령으로는 단결을 통한 생활개선, 합리적인 소작조건의 획득, 토지개량, 농업기술 및 농업 경영방법의 개선, 조합의 조직과 활동에 의한 농민의 문화적 생활의 완성을 내걸었고, 농장 측에게는 경작지 재측량의 실시, 생산고 결정 시 소작인 대표의 참가, 불법 차압 절대반대, 학교, 병원 등 문화적 시설의 완비, 관개 설비의 완비, 체납 소작료의 완전 면제 등을 요구하였다 「예심종결결정」
    .
     이와 같이 하의도 농민조합은 다른 지역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던 국내와 국외 농민운동가 사이의 연대를 통해 조직되었다. 일본 노동농민당이 직접 관여한 이유는, 우선 하의도 출신의 노동자가 오오사카에서 ‘하의노동청년회’를 결성하고 일본 노동농민당과의 연대관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 또 박춘금 등의 상애회가 앞에서 서술한 유상구입운동 시 방해공작에 나섰던 것에 대해 조직적으로 대응한 측면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1928년 2월 2일, 조합은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토쿠다 양행 목포 지점과 소작문제에 관해 교섭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2월 6일에 최용환, 고장명을 목포의 토쿠다 양행 지점에 파견하여 교섭일을 결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토쿠다 양행은 상애회의 박춘금과 총무 간사인 하시모토 키요시(橋本淸), 김용상(金鎔常), 박래수(朴來洙) 등 6명을 다시 목포로 불러, 목포에 체류하고 있던 최용환과 고장명을 권총와 흉기로 협박하였고, 또 2월 19일에는 목포 경찰서의 고등계 주임인 나가타(長田)와 함께 하의도로 건너가 조합의 해산을 강요하였다 『동아일보』1928년 2월 26일, 27일.
    . 이에 대해 조합 측은 ‘하의도 농민조합과 상애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상애회는 하의도 소작문제에 대해 관여해서는 안 된다. 상애회는 지난번에도 하의도 소작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상애회는 이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예심종결결정」
    며 하의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농장 측에는 재차 경작지의 재측량, 소작료 결정 시 소작인 대표의 의향 존중, 미납 소작료의 면제, 부업 자금의 대부, 학교, 병원의 설립, 저수지의 건설 등을 요구하였다.
     한편 조선농민총동맹은 1928년 2월말에 총동맹의 검사위원이자 암태도 소작투쟁의 지도자였던 박복영(朴福永)을 하의도에 파견해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또 조선농민총동맹은 ①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에 이 사실의 통고문를 보내 상애회를 근본적으로 박멸할 것 ② 일본노동농민당에 아사히의 특파 여부를 조회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한 통고문 및 조회문을 각각 발송하는 등 하의도 토지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1928년 2월 26일.
    . 이에 대해 농장 측은 조합 측의 요구를 전면 거부하고, 다시 박춘금 등을 동원하여 조합을 강제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소작인은 ‘박춘금이 지주로부터 은밀하게 금전을 받았으면서도 소작인을 위해서는 전혀 활동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비참한 상황에 있다. 박춘금의 말은 신용할 수 없다. 박춘금을 죽여야 한다’ 「예심종결결정」
    며 박춘금 등을 폭행하였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경찰은 조합의 간부인 최용환, 고장명, 최용채(崔龍彩), 변인옥, 공유범, 우정윤(禹正倫), 공화범, 우정선(禹正先), 김찬배(金贊培), 최옥종(崔玉宗), 최용도를 ‘소요 및 공무집행 방해죄’로, 아사히를 ‘치안 경찰법 위반죄’로 검거했다 「예심종결결정」. 1928년 10월 26일의 판결에 의하면 고장명과 아사히는 무죄, 그 외는 전부 징역 6개월․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
    이상과 같이 하의도 출신의 청년 지식인층과 국외의 하의도 출신 이주민의 주도로 재개된 하의도 토지회수운동은 결국 박춘금과의 충돌사태 발생과 관헌의 철저한 탄압으로 인해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이후 조합 간부의 출옥을 계기로 토지 회수운동이 간헐적으로 지속되었으나, 일제의 대륙침략 이후 파쇼체제가 강화되자 토지를 회수하려는 농민들의 집념은 겉으로 드러날 수 없었다. 내부로 침잠해 있던 이러한 집념이 다시 표면화된 것은 ‘해방’ 이후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나서이다.

    6. 맺음말 - ‘해방’ 이후의 하의도 토지문제

     ‘해방’과 더불어 남조선에 진주한 미군은 1945년 11월 12일 과거 일본인 지주의 소유 농지를 관리할 목적으로 신한공사를 발족시키고, 12월에는 소위 ‘남조선내 소재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법’을 공포하여 일본인 지주의 소유지와 기타 재산을 미군정에 귀속시켰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일제시대의 토지대장과 지적도에 의거해 신한공사 조직을 총동원하여 일본인 소유의 농지를 철저히 추적, 하의도와 같이 소유관계를 둘러싼 분쟁지역의 농지 등을 ‘적산’이란 명목으로 무조건 미군정의 소유로 전환시켰다. 이 결과 하의도의 토쿠다 농장 관리 사무소는 새로이 신한공사의 지부로 탈바꿈하였으며, 신한공사는 1946년 추수기에 소위 ‘3․1제’ 소작제에 의거하여 소작료 징수에 나섰다.
    1946년 7월 하순부터 신한공사 사원 5명은 돌연 하의도에 와서 소작료 납부고지서를 농민에게 교부하고 두 번에 걸쳐 소작료를 징수하려 하였지만 농민들의 저항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8월 2일에는 신한공사 사원 4명과 목포경찰서 공안과장 외 11명이 하의도 주재소 경관 5명과 합세해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려 했다. 이에 대해 농민은 ‘소작료 불납 동맹’을 결성해 신한공사의 소작료 징수에 저항하는데, 이를 계기로 소위 ‘칠석 투쟁’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해방정국 초유의 사건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었는데, 당시 민전 조사부가 조사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조선인민보』1946년 8월 21일.
    ,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하의도에 상륙한 신한공사 사원과 경관 등은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기 위해 2개조로 나뉘어, 제1대는 오림리, 제2대는 대리로 향했다. 오림리에 도착한 제1대는 곧바로 가택 수색을 하고, 노인과 부녀자들에게까지 ‘소작료를 내지 않으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농민들을 폭행했다. 농민 200여명이 경관의 행위에 항의하자, 경관대는 실탄을 장전해 농민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는데 그 과정에서 박종채(朴鍾彩)가 중상을 입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은 자위수단으로 경관 4명과 신한공사 사원 2명을 구금하고 권총 1정과 장총 3정을 빼앗았다.
    한편 대리에 도착한 제2대는 구장 2명을 김세배(金世培)의 집으로 불러 소작료 납부를 강요했다. 이에 구장들은 토지를 둘러싼 그간의 정황을 설명했으나 경관들은 이를 무시하고 농민들을 향해 위협 발포하면서 농민 6명을 체포해 오림리로 향했다. 오림리에서 경관대는 제1대의 무장해제 소식을 접하고, 농민 10여명을 검거해 신한공사 사원들과 함께 웅곡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철수하려 했다. 농민들이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자, 경관대는 선상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 농민들을 해산시키려 했다. 경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김전배(金田培)가 즉사하고 김봉남(金奉南)은 중태에 빠졌다. 이에 격분한 농민 700여명은 8월 3일 웅곡리의 하의도 경찰 분서와 신한공사 출장소를 습격하고 창고를 불태웠다.
    이와 같은 농민의 저항에 대해 경관대는 ‘공산도배의 책동’으로 간주하면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에 나섰다. 8월 4일 목포 경찰서 수사과장의 지휘하에 경관 50여명이 오림리에서 농민 200여명을, 나주 경찰서장의 지휘하에 광주 특경대 30여명이 서리에서 농민 40여명을 각각 체포했으며, 또 5일에는 무장경관 70여명이 대리에서 농민 200여명을, 또 6일에는 무장경관 40여명이 대리에서 청년 15, 6명을 체포했다. 더욱이 8일에는 미군부대(특파원 2명, 의료하사관 1명, 한국어 통역 및 사병 15명)가 ‘총력적인 전투태세’로 상륙하여 하의도는 무장경관과 미군의 경계 속에 대다수의 농민이 체포되고 폐허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E. Grant Mead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New York : Kings Crown Press, 1951), pp. 230-233.
    .
    이후 하의도 토지문제는 미군정이 종료되고 나서야 일정한 결론을 찾게 된다. ‘하의3도 토지투쟁위원회’가 전남도청과 국회에 진정운동을 벌여 토지가 농민에게 환원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1949년 7월 전남도청은 투쟁위원회의 진정을 받아들여 중앙정부 및 국회에 건의하였고, 8월에는 정부와 국회 산업분과위원회의 조사단이 하의도에 파견되었다. 이 결과 1950년 2월 국회에서는 하의도 토지의 무상환원이 가결되고, 5월에는 농림부에서 토지행정청 귀속농지 관리국에 명하여 경지환원 대상자 세부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하의도 토지문제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관련서류가 소실되는 등 해결에 난항을 보이다가, 1956년 ‘나주 궁삼면, 무안 하의도 귀속농지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어, 하의도의 농지는 정보당 200원의 가격으로 농민들에게 유상 환원된다. 이는 무상환원에서 유상환원으로 후퇴한 것이어서 농민들의 의지와는 반한 것이었으며, 이후에도 분쟁의 불씨를 남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 식민지 지주의 토지 집적과정과 그에 대항한 조선 농민의 움직임을 전남 무안군 하의도의 사례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았다. 하의도 지역의 농민운동은 일본인 지주의 불법적인 토지집적에 대항하여, 토지 소유권 그 자체의 반환을 목표로 한 토지회수운동으로서 농민 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위치 지울 수 있다. 수 세대에 걸쳐 전개된 농민과 지주, 농민과 관헌 사이의 분쟁, 그리고 지주와 관헌의 폭력성 등 당시 조선 농민의 모든 문제가 하의도 농민의 기나긴 투쟁으로 압축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의도 농민의 300여 년에 걸친 토지회수운동의 역사는 농민들 자신의 노동력과 자본으로 개간한 토지를 권력층과 그 비호세력으로부터 지켜내려던 피와 한의 역사이다. 하의도 농민들은 정명공주방에서 식민지 지주를 거쳐 미군정하 신한공사로 바뀌어 간 지배세력과의 기나긴 분쟁을 겪어왔다. 농민들은 식민지 권력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찾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해방’을 맞이했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하의도 토지의 농민에게로의 귀속이 아니라 외양만을 바꾼 지배권력의 폭력뿐이었다. 미군정이 종료된 후 무상환원에의 꿈이 유상환원으로-그것도 아주 불충분하게-종결된 것만을 보더라도 지배권력의 의지가 농민의 의사를 어떻게 배반해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의도 토지를 둘러싼 분쟁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한다. 토지대장에는 여전히 토쿠다 양행 소유로 되어 있는 토지가 있고, 그 토지는 소유주체인 농민의 이해와는 무관하게 내용을 아는 몇몇 권력자의 처분에 맡겨진 채 제멋대로 처리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 온다. 하의도 농민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토지, 그 땅의 의미와 역사를 온전히 전승하기 위해 후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정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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