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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안 역사문화개관 관리자 2006/3/2 6098


    이글은 전국문화원 연합회에서 발간한 향토문화자원 중 신안관련 내용임.

    역사적 사건과 현장
    ◈하의3도 농지분쟁 조선 14대 선조왕의 장녀 정명공주를 이조참의를 지낸 홍이상의 손자인 홍게원에게 하가시킨 후인 1624년경에 내린 사전이 하의3도 농지 24결이다.
    이 땅은 공주의 5대손까지만 한정하여 결세를 받도록 하고 이후에는 국가의 호조에 납부토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5대 이후에도 결세를 요구하므로 주민들이 항의하자 홍씨 측에서는 농지를 강제로 빼앗아 버림으로 주민들이 결사 항쟁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주민들이 사상자가 나고 투옥이 되었다. 이 사건은 해방후인 1950년 5월에 와서야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으로 해결을 보게 되므로써 사건이 난지 300여년이 걸렸다.



    하의3도 농지분쟁 기념비
    ◈암태도 항일운동 1922년 8월 암태도 소작인들은 일본 지주들의 수탈을 견디지 못해 약자가 살길은 단결과 쟁의라는 기치아래 서태석을 회장으로 하는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였다. 이조직은 1922년 추수기로부터 부당한 소작료 불납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고 부당한 소작료를 인하하라고 당시 일본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던 지주측에 요구하였다. 1923년에 접어들면서 지주측의 소작료 납부 독촉이 심해졌고 이 과정에서 소작인회와 지주측의 충돌이 일어나 7월말 경에는 소작인들 1천여 명과 지주간에 폭력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일경 100여 명과 헌병들이 암태도에 출동하여 군중을 해산시켰으며, 주동자 12명을 체포하여 목포형무소에 수감하였다. 이에 소작인들의 흥분은 절정에 이르렀고 범선 수십 척을 동원하여 목포로 건너가 목포경찰서를 둘러싸고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날은 재판소로 몰려가 3일 동안 단식농성을 하였다. 당황한 일제는 부윤, 재판장, 서장, 도경찰부 고등계장이 나와서 뒷수습을 했다. 그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석방되었지만, 서태석 만은 1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 투쟁으로 인해 소작조정령이 생기고 전국의 소작료 비율이 지주와 소작인 7대 3에서 4대 6으로 바뀌게 됨으로써 농민들은 다소 나은 삶을 찾게 되었다.

    ◈한국전쟁과 자은면 1950년 6·25 때 자은면도 완전히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이때 좌익폭도들은 면내 우익인사와 유지, 면민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모진 고문을 하고 죽창 등으로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10월 5일 목포지구 수복경찰서 박형근 대장의 지휘 하에 송용철경비대장이 도서지방 수복명령을 받고 민간인들의 협조 하에 동년 10월 7일 압해면을 시작으로 수복작전을 개시하여 전도서를 수복하고 마지막을 10월 20일 아침 8시 30분에 자은면에서 발악적으로 무력항거하는 폭도들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가장 늦게 수복된 자은면은 인명피해가 컸으며, 살해 방법도 상상을 초월한 잔인한 방법으로 500여 명이 살해되었다.

    ◈압해면의 대몽항쟁 다른지역과 달리 해상교통로인 신안지역은 강화도로 연결되는 서해상의 해상운송로를 놓고 격전을 벌인 곳이다. 고려 고종 43년(1256)에 몽골 차라대가 침입해왔을 때 압해도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압해도는 목포시와 무안군의 서해안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연안도서로서 섬을 몽골군이 장악하게 되면 서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아가 강화도 정부와 전남지방의 곡창지대를 차단시킬 수 있는 전략적 중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는 이에 충분한 대비를 하였고 군관민이 합심하여 몽골군을 물리쳤던 것이다.

    ◈신안군의 독립만세 신안군의 3·1운동은 3월 18일 장산도에서 처음 일어났다.
    3월18일 정오경에 장산도의 유지 30여명은 도창리에 있는 높은 언덕 위에 모여 민족자결주의 움직임과 서울에서 일어났던 독립선언 및 만세시위에 대한 설명을 들은 다음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선두로 하여 마을을 일주하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도서지역이므로 일제의 감시가 미치지 못하여 방해도 없었기 때문에 시위 행렬은 평화적이었고,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약 1시간 반 동안 시위 행열이 있은 다음 오후 2시쯤에 만세삼창을 끝으로 독립 경축회를 마쳤는데 이 사실이 늦게 일경에게 알려져 4명이 검거되었다. 장산도와 무안 읍내에서 거사가 있은뒤 군내 여러곳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있었는데 연해한 각지방에서는 3월말과 4월 초에 걸쳐서 야간을 이용하여 산위에 불을 피우거나 어선에 등불을 높이 달고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염원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흑산도 간첩 침투사건 흑산도 대형 간첩선 침투사건은 1969년 12월 12일 밤11시 50분 경 이미 남파되어 있는 간첩과 접선하기 위해 신안군 흑산도 남쪽 해안으로 접근해 오는 75톤급 북한 무장간첩선 1척을 육해공군합동작전으로 나포하고, 무장특공대원 15명을 완전히 소탕한 사건이다. 이 간첩선은 동년 5월 30일 검거된 북한 중앙당 연락국 소속 대남 무전간첩 김용구를 대동 월북하기 위한 것이었다. 6월 11일 진남포를 출발하여 12일 밤 11시 50분경 흑산도에 도착한 3명의 무장공비가 고무보트를 타고 섬으로 올라와 접선을 꾀하자 육해공군은 긴밀한 합동작전을 펼쳐 공비들을 전원 소탕하였다. 6월 13일 나포된 간첩선에 승선했던 15명중 달아난 잔당 소탕을 위해 흑산도 경찰지서에 수사본부를 둔 군경 및 예비군 합동수사대는 6월 16일 오후 4시 흑산면 비리에서 도주한 북한 무장공비 6명을 전원 사살하였다.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고응만(高應萬) 본관은 장흥이요, 자는 주빈(周彬), 호는 강헌(剛軒)이며, 1878년 도초면 외남리 세칭 빗터골에서 옹기와 소금 등의 생활필수품을 사다 섬지방에 팔아 생활을 꾸려오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 어느 날 부친과 함께 배에 소금을 싣고 부안 줄포에 정박했을 때 길가 담벼락에 붙어 있는 격문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내용은 고창(高敞)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고창으로 달려가 김준 부대장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곧장 장성(長城)에 본부를 둔 의병 기삼연대장 휘하에 들어가게 되어었다. 험난한 의병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최초로 세운 공은 그해 10월 21일 이었다. 왜병이 고창골에 들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병은 고창에 숨어 들어갔다. 주빈도 의병이던 정·황포수와 함께 길목에 은신했다. 수많은 왜병이 고창에 들어와 거드름을 피우자 때를 놓치지 않고 발포했고 은신해 있던 의병들은 일제히 협공, 왜병을 거의 전멸시켜 버렸다. 이를 시점으로 장성 분파소, 광주, 영광, 법성포, 담양 등 왜병의 본거지를 습격해 사살하고 창고에 쌓아둔 양곡을 꺼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1908년에는 김준 부대장 지휘로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수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했으며, 담양 무등산 무등촌 전투에서는 왜병 부대장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해 봄 함평 어등산 혈전에 참가했던 의병들은 김준부대장이 전사하는 비통을 겪기도 했다.
    김준 부대장이 전사한 후 이기손 부대에 들어 갔으나 왜병 대부대들의 호남의병 토벌이 시작되자 병력이 약세로 대접전을 벌이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결사대로 지원, 지도읍과 칠발도 등 해안지대의 왜병을 급습, 섬멸했다. 그러나 1910년 유격전 때에 불행히도 등에 총상을 입고 흑산도로 피신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치료하면서 동지들의 유격전을 은밀히 지도했다. 그 후 상처가 계속 악화되어 고생하다가 조국광복도 보지 못한 채 1937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장병준(張柄俊, 1893∼1972년) 독립운동가로 신안군 장산면 대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학중인 일본에서 급히 귀국하여 3월18일 신안군 장산면에서 대한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잡혀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에 힘썼다. 1920년초 군자금 조달 목적으로 귀국하여 3·1운동 1주년 만세시위를 계획하다 일경에 붙잡혀 다시 3년의 옥고를 치루었으며, 1929년에는 신간회 목포지회장에 취임하고 뒤에 중앙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또다시 광주학생항일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민중대회운동에 관련되어 붙잡혀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박복영(朴福永, 1890∼1973년) 호는 동명(東明) 본관은 밀양으로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에서 박윤규(朴允圭)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이로 인해 일본관헌의 추적을 받게 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해서 임시정부 고위층에게도 인정받아 경무부 경무주임에 발탁되어 일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3년 고국에 잠입, 향리인 암태면으로 돌아와 향리민들과 청소년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고 정신계도에 노력했다. 1922년 발생했던 암태면 소작쟁의 사건의 다음해인 1923년 7월말께는 지주측과 소작인들간에 큰 충돌이 번져 주동자들이 투옥되는 사태가 일어나자, 이 사건을 수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1935년 주거지를 이웃 섬인 자은면으로 옮겼으며,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무안군 건국준비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서태석(徐邰晳, 1884∼1958년) 호(號)는 해사(海舍), 본관은 이천이며, 암태면 오상리 옛 구룡동에서 1884년 6월 17일 서홍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생을 배일사상의 선구자 역할을 해왔으며 3·1독립만세와 신간회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수차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왜정의 식민지 수탈정책을 더 이상 볼수가 없어 소작농을 구하기 위하여 10여 명의 구농 동지들을 규합하여 소작료 인하운동에 앞장서서 투쟁 하였다.
    이 투쟁으로 인하여 종전의 지주중심의 8할의 소작료를 4할로 인하시켰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영웅적인 인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3·1운동 당시에는 목포경찰서 앞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다 왜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독립 운동가이기도하다. 1958년 7월 20일 타계하였다.

    ◈권수동(權壽童 일명 권오송, 1908∼1949) 신안군 안좌면 에서 출생하였다. 광주농업학교에 재학당시 일제의 차별교육에 대하여 분개하던 중 광주고보에서 맹휴가 일어나자 일인교사의 민족적인 차별교육을 성토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재학생 115명의 날인을 받아 교장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교장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되자 1928년 6월 27일 동맹휴학을 주동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1929년 5월 무등산에서 항일독립운동과 사회개혁을 위한 사회과학연구회 및 독서회를 조직하고 그는 조사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조길용·송동식 등 동지들과 함께 선두에서 시위를 주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결국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받았으나 대구복심법원에서 1931년 6월 13일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6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 되었다.

    ◈서상열(徐相烈, 1920∼1977)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에서 출생하였다. 1944년 7월 5일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일본군에서 탈출, 광복군에 입대하여 총 사령부에서 기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임정 경위대 대원으로 임시정부 고위요원들의 경호담당 등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1월부터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처에서 군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80년에 건국포장이 수여 되었다.

    ◈김대중(金大中) 제15대 대통령 이곳 신안군 하의면 후정리에서 출생하였다.

    ◈ 강주범(姜周範, 본관:진주(晋州), 출생지:신안군 비금면 내월리 월포마을) [상세보기]
    ◈ 김경하(金擎河, 본관:김해, 아호:청송, 생존시대:1889년 출생, 출생지: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유적지:안좌면 안좌초등학교 옆 효자각) [상세보기]
    ◈ 김권일(金權一, 본관:김해, 아호:노악(露岳), 생존시대:1836년 출생, 출생지:도초면 만년리) [상세보기]
    ◈ 김옥광(金玉光, 출생지:비금면 내월리 내촌마을) [상세보기]
    ◈ 이은석(본관:원주, 아호:애송, 생존시대:1888년 출생) [상세보기]
    ◈ 김희중(金喜重, 본관:김해, 출생지:장산면 팽진리) [상세보기]
    ◈ 밀양박씨(密陽朴氏, 생존시대:1833 ∼ 1907) [상세보기]
    ◈ 열녀김씨() [상세보기]
    ◈ 광산김씨(본관:광산) [상세보기]
    ◈ 고응만(高應萬, 본관:장흥, 아호:강헌(剛軒), 생존시대:1878 ∼ 1937, 출생지:도초면 외남리) [상세보기]
    ◈ 장병준(張炳俊, 생존시대:1893 ~ 1972, 출생지:신안군 장산면 대리) [상세보기]
    ◈ 박복영(朴福永, 본관:밀양, 아호:동명(東明), 생존시대:1890 ∼ 1973, 출생지:암태면 단고리) [상세보기]
    ◈ 서태석(徐邰晳, 본관:이천, 아호:해사(海舍), 생존시대:1884 ∼ 1958, 출생지:암태면 오상리) [상세보기]
    ◈ 권수동(權壽童, 생존시대:1908 ∼ 1949, 출생지:안좌면) [상세보기]
    ◈ 서상열(徐相烈, 생존시대:1920 ∼ 1977, 출생지:암태면 기동리) [상세보기]
    ◈ 김상수(金祥洙, 생존시대:1894 ∼ 1945, 출생지:지도읍 둔곡마을) [상세보기]
    ◈ 문두생(文斗生, 아호:석촌(石村), 출생지:암태면 신석리) [상세보기]
    ◈ 박인현(朴麟鉉, 아호:월단(月 ), 생존시대:1850 ∼ 1877, 출생지:암태면 도창리) [상세보기]
    ◈ 김성욱(金聖旭, 생존시대:1860년 출생, 출생지:압해면 대천리) [상세보기]
    ◈ 김연(金鍊, 아호:초암(草菴), 생존시대:1883 ∼ 1959, 출생지:하의면 대리) [상세보기]
    ◈ 임행제(任行帝, 아호:눌헌(訥軒), 출생지:임자면 광산리) [상세보기]
    ◈ 문여옥(본관:남평, 아호:학우당, 출생지:암태면 수곡리) [상세보기]
    ◈ 김진채(본관:김해) [상세보기]
    ◈ 김환기(金煥基, 아호:樹話, 생존시대:1913 ∼ 1974, 출생지: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유적지: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김환기 생가(지방기념물 제146호)) [상세보기]
    내 고장의 문화유산
    ■사적
    ◈송원대 유물매장지역 제274호, 신안군 증도면 도덕도 해역

    ■천연기념물
    ◈홍도천연보호구역 제170호, 흑산면 홍도리

    ◈칠발도해조류번식지 제332호 비금면 고서리 산3칠발도

    ◈구굴도해조류번식지 제341호, 흑산면 가거도리 산2

    ◈진리 초량목 제369호, 흑산면 진리 77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읍리3층석탑 제71호, 78.9.22 / 팔금면 읍리350-1

    ■무형문화재
    ◈장산들노래 제21호, 기능보유자 강부자

    ◈가거도 멸치잡이노래 제22호, 기능보유자 김명후, 최월산, 임동채

    ■기념물
    ◈도창리 노거수 제100호, 장산면 도창리278

    ◈도창리 고분 제107호, 장산면 도창리93-1

    ■문화재자료
    ◈지도향교 1곽 제111호, 지도읍 읍내리12

    ◈방월리지석묘 제117호, 안좌면 방월리 186-3

    ◈가거도 패종 제130호, 흑산면 가거도리 산4


    ◈ 송원대 유물매장해역(宋元代 遺物埋藏海域) [상세보기]
    ◈ 홍도 천연보호구역(紅島 天然保護區域) [상세보기]
    ◈ 칠발도 해조류 번식지(七發島 海藻類 繁殖地)
    ◈ 구굴도 해조류 번식지(九屈島 海藻類 繁殖地) [상세보기]
    ◈ 흑산도 진리 초령목(黑山島 鎭里 招靈木)
    ◈ 신안 읍리 삼층석탑(新安 邑里 三層石塔)
    ◈ 장산도 들노래(강부자)(長山島 들노래)
    ◈ 가거도 멸치잡이 노래(김명후)(可居島 멸치잡이 노래) [상세보기]
    ◈ 신안 도창리 노거수(新安 道昌里 老巨樹) [상세보기]
    ◈ 신안 도창리 석실고분(新安 道昌里 石室古墳) [상세보기]
    ◈ 신안 가거도 패총(新安 可居導 貝塚) [상세보기]
    ◈ 신안 김환기 생가(新安 金煥基 生家) [상세보기]
    ◈ 지도향교(智島鄕校) [상세보기]
    ◈ 방월리 지석묘(方月里 支石墓) [상세보기]
    ◈ 신안 흑산 진리 석탑 및 석등(新安 黑山 鎭里 石塔 및 石燈) [상세보기]
    ◈ 신안 흑산 진리 지석묘군(新安 黑山 鎭里 支石墓群) [상세보기]




    3. 생활문화자원

    전통생활민속
    ◈민속놀이 신안군에 전승되고 있는 민속놀이는 가거도 멸치잡이놀이, 장산들노래, 하의도연자방아놀이, 하중밭매기놀이, 길쌈놀이 등이 전승되고 있다.

    ◈민요 신안군은 도서로만 형성되어있어 고독을 달래고 작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하여 불렀던 노동요는 길쌈노래, 논메기, 화중밭매기, 모심기노래, 신세타령, 둥당기타령 등 많은 민요가 전승되고 있다.

    ◈농악 신안군의 농악은 각읍면에서 명절 등에 걸굿농악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집성촌 신안군의 집성촌은 신의면 하태동의 파평윤씨(윤촌마을), 남양홍씨(홍촌마을), 압해면가란리(인동장씨), 신의면 하태동리 노은마을(평산신씨)등이 있다.

    구전설화
    ◈고이리 왕산의 전설 지금으로부터 약 900여 년전 고려 태조 왕건의 작은 아버지인 왕망이란 사람이 있었다. 왕망은 후삼국 혼란시기의 평정과 왕건의 득세에 많은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왕건이 임금이 된 후 논공행상 당시 왕망의 공을 무시한듯 하자 왕망은 왕건의 전복을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사 전에 기밀이 탄로나자 도망쳐온 곳이 지금의 압해고이였다. 왕망은 이곳에 성을 쌓고 왕의 정치를 폈으며 언젠가는 고려왕실에 도전하기 위해 날마다 군사훈련과 세력확장, 군량미 비축 등에 열심이었다.
    군사훈련이 시작되면 성안에서 말달리는 소리며 호령소리가 천지를 진동했고, 연기 같은 먼지가 일대를 뒤덮었다 한다. 왕망은 고이도 근해에서 국세를 싣고 가던 배를 잡아 식량과 돈(보석)을 빼앗았으며, 선원들을 자기 부하로 만들었다. 붙잡은 배는 배시계라는 곳에 버리고 돈은 돈바위 밑에 감추었다. 지금도 돈바위와 배시계(목포에서 지도방면 영신호 선착장)는 이 전설에 유래된 명칭들이다. 배를 버린 곳에는 지금도 잔재가 남아 있으며, 왕망은 큰바위를 엎었다, 뒤집었다 할 정도로 힘이 센 장사인지라 지팡이도 돌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세월이 몇 십 년 흘렀다. 나라에서는 이 지방의 세금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긴 나머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왕망의 정체가 드러났다. 조정에서는 왕망을 잡아오도록 명하니 많은 군사를 거느린 장수가 왕망을 공격했다.
    왕망은 이때를 위해 힘을 길렀기에 원한의 보복시기로 생각하고 질풍같이 호령하고 대항하니 관군은 일시에 수십명의 병졸을 잃으며 고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왕망의 병졸들은 기력을 잃고 관군에 투항하거나 도망치고 죽었다. 왕망은 다급하게 도망치다가 바위에 부딪쳐 넘어져 돌지팡이까지 떨어뜨린채 마구 도망했다. 지금의 대촌부락 앞에 우뚝선 바위가 왕망의 돌지팡이라는데 사람들은 지금도 왕망의 지팡이라 부른다. 왕망은 계속 도주하여 강건너 무안군 망운면 두무치의 큰바위를 치켜들고 자기가 쓰던 인을 숨겨두고(지금도 인바위라 부름) 더이상 도주할 기력을 잃어 고시라는 곳에 있는 연못으로 뛰어들어갔다.
    관군들이 연못의 물을 퍼냈으나 왕망의 흔은 찾을 길이 없고 다만 이상하게 생긴 자라 한마리를 발견했을 뿐이다. 화가 난 장수는 왕망의 목을 얻지 못하자 자라의 목을 칼로 내려치니 이상하게도 자라 목에서 흐른 피가 연못을 가득 채웠다. 지금도 연못의 물이 흐리다고 하며 이 지역에 왕 무덤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 있다.
    왕망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가 살던 흔적은 지금도 1㎞가 넘게 성과 집터로 남아 있으며 왕이 살았다 하여 고이도 큰산을 왕산이라 부른다.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이곳에서 제를 지냄으로써 풍년과 병마를 막아낸다고 하여 부정없는 사람을 선발하여 제를 모셨다.

    주민의 종교생활
    신안지방은 도서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믿는 가족신으로 성주신, 조왕신, 삼신, 호지신, 군왕신, 영등신, 용왕신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 신을 위하는 상황이 다르며 안택제의 경우는 음력 정월이나 10월중에 좋은날을 받아 7일에서 10일간을 금기한후 시루떡 등 재물을 준비하여 성주신, 토지신, 조왕신을 함께 제사를 지내는데 음력 2월, 6월, 12월을 피해서 일진을 맞추어 길일을 받아 온다. 제사를 지낼 때는 대주 즉 남자주인이 주도하며 빌 줄 아는 무당을 청하기도 한다. 안택제를 지낼 때에는 집 대문 쪽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친다. 배성주는 실과 한지를 선장실에 걸어 놓고 모시는데 그 해 처음 잡은 고기도 함께 매단다.
    신안군에는 하의면 등 몇 군데만 동제와 산신제를 지내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대중종교인 불교, 천주교, 기독교가 주민들의 종교생활 전반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신안지역은 사찰 5개소, 천주교 공소 10개소, 기독교 130여개 교회가 각 읍면과 마을에 분포되어 있다.



    성주단지
    지역의 별미음식
    ◈선상 생선회 흑산면과 흑산면 홍도리의 관광지에서 배로 관광을 즐기면서 갓잡은 생선에 초장을 곁들어 먹는 맛은 일품이다.

    ◈홍어회 흑산면에서 잡히고 있는 흑산홍어는 다른 홍어에 비해 색이 홍갈색이며, 살은 연하고 찰지다, 흑산홍어를 옹기에 담아 하루를 묵힌 다음 꺼내어 초장과 곁들어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송어젓 증도면 해상에서 잡힌 송어는 기름이 많고 맛이 담백하여 생선회나 젓으로 담아 먹으면 맛이 좋다.

    지역의 토산품과 특산품
    ◈홍어 홍갈색을 띠며 고기맛이 연하고 찰지다

    ◈압해배 신안군의 대표적인 농산물로서 크고, 당도가 높으며, 맛이 좋다. 지금은 전량 수출되고 있다.

    ◈육젓 6월에 잡은 새우로 젓을 담은 것으로 맛이 담백하다.

    ◈대하 크고 맛이 좋아 식도락가들이 선호하는 식품이다.

    ◈낙지 청정해역에서 잡히는 신안군의 특산물이다

    ◈김 윤기가 나며 맛이 좋다.

    ◈꽃게 맛이 담백하다

    ◈미역 신안의 청정해역에서 생산되는 미역은 맛이 좋고 윤기가 난다.

    ◈전복 살이 연하고 맛이 좋다.

    ◈시금치 게르마늄성분이 많이 함유되어있는 신안군의 시금치는 색이 검푸르며 잎의 두께가 두텁고 맛이 좋다

    ◈천일염 전남에서 최고로 많이 생산되며 맛이 짜면서도 단맛이 난다.






    4. 예술문화자원

    지역문화예술행사
    ◈군민의날 행사 매년 4월15일 군민의날에 개최하는 군민들의 축제 가운데 문화예술과 체육행사가 곁들여진다.

    지역출신 예술인
    ◈박홍원 시인, 조선대학교 사범대학교수

    ◈김지하 시인

    ◈김암기 서양화, 국전 3회입선,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최낙경 서양화, 국전 입선

    ◈조방원 동양화, 국전 심사위원장,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이형래 동양화, 국전 입선

    ◈이원조 동양화, 국전 4회 입선

    ◈김왕현 조각가, 대학교수

    ◈김정재 서예, 국전 입선,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






    5. 관광, 여가문화자원

    관광자원
    ◈명승지 해상국립공원, 흑산면 일원

    ◈흑산팔경 제1경 칠락묘운, 제2경 문암창운, 제3경 송전망원, 제4경 영산조훈, 제5경 명사십리, 제6경 원포귀범, 제7경 강움어화, 제8경 서산락조

    ◈해조류번식지 칠발도 해조류번식지, 구굴도해조류번식지

    ◈해수욕장 대광해수욕장(임자면 대광리), 우전해수욕장(증도면 우전리), 원평해수욕장(비금면 원평리), 시목해수욕장(도초면 시목리), 진리해수욕장(흑산면 진리), 돈목해수욕장(도초면 우이리), 홍도해수욕장(흑산면 홍도리), 추포해수욕장(암태면 추포리 ), 가거도리해수욕장(흑산면 가거도리)



    대광해수욕장
    ◈천연보호구역 홍도천연보호구역(흑산면 홍도리)

    ◈가거도 8경 제1경 독실산, 제2경 장군바위, 제3경 기둥바위, 제4경 섬등반도절벽, 제5경 망부석, 제6경 망향바위, 제7경 남문 , 제8경 해상터널

    ◈흑산도 비경 학바위, 회성동굴, 스님바위, 도승바위, 촛대바위, 어머니바위, 원숭이바위, 물개바위, 공룡바위, 쌍굴동굴, 고래바위, 천지, 지도바위, 해골바위, 구령바위, 간첩동굴, 일출, 해상가두리양식장, 전리처녀당, 육상종묘배양장, 동백나무군락지, 상라봉정상, 수중다리, 약수터, 면암 최익현 적로유허비, 지장암

    ◈홍도10경 제1경 남문, 제2경 실금리굴, 제3경 석화굴, 제4경 탑선, 제5경 만물상, 제6경 슬픈여 , 제7경 부부탑, 제8경 독립문바위, 제9경 거북바위, 제10경 공작바위

    ◈지도향교 지도향교는 지도읍 112번지에 위치한다. 도지정 문화재 자료 111호로 지정된 지도향교는 대성전, 명륜당, 양사제와 부속 건물로는 내문, 외문, 삼강문, 상강각, 삼강비로 되어 있다.



    지도향교 대성전
    ◈방월리 지석묘 안좌면 방월리 186-3에 위치하고 있는 지석묘는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방월리 지석묘
    ◈도창리 고분 장산면 아미산(해발142.5m)의 동남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도창리 고분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고분으로서 도지정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규모는 밑변18m×20m, 높이는 2.8m이다.



    도창리 고분
    ◈장산들노래 도지정 무형문화제 제21호 지정된 장산들노래는 도서적 특유한 가락으로 이어진 민요로서 기능보유자는 강부자이다.

    ◈가거도 멸치잡이 노래 도지정 무형문화제 제22호로 지정된 가거도 멸치잡이는 멸치를 잡으면서 불렀던 어업요이다. 기능보유자는 김명후, 최월산, 박동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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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신의면의 민요   관리자 2006/03/02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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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안 역사문화개관   관리자 2006/03/02 6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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