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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후기 신안 섬들의 여러 문제들 신안문화원 2006/3/23 5955


    조선후기 신안 섬들의 여러 문제들

    1) 각종 사회문제

    섬의 사회문제 중 국가와의 관계에서 제일 큰 것은 부세문제였다. 이 부세문제는 인조년간에 벌써 심각하게 대두하고 있었다. 누차의 변란을 겪은 뒤라 아문에서 징수할 곳이 오로지 선인(船人),어인(漁人),염호(鹽戶) 등 뿐이라는 구실로, 이들에게 세금이 집중되었다. 그래서 육지민은 물론 그들조차 생업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섬은 “지금 만일 생업을 잃은 백성을 어루만져 그 세입(稅入)을 감하고 함부로 징수하는 것을 끊어버리며, 염분을 마음대로 많이 설치하게 하고 어선을 마음대로 조작하게 한다면 1년도 못 되어 연해 지방에 염분과 어선의 수효가 10배는 될 것입니다.”
    라고 할만큼 커다란 성장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잠재력을 지니고 있던 서해안의 섬에서, 거기에 더하여 목장이 농장으로 바뀌고, 자염(煮鹽)이나 봉산(封山)의 목재를 재원으로 활용하게 되자, 섬은 정말 ‘새로운 땅’으로 주목되었다. 특히 균역법의 실시에 따라 어,염,선세의 수취를 실현해야했던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바닷가‧섬의 재부는 너무나 중요했다. 그러나 1745년(영조 21)에 “나주는 크고 작은 섬이 무려 4, 50군데 되는데, 섬 안의 백성들이 요역(徭役)이 없어 한 해를 다 보내도록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의 말처럼 아직 정식으로 국가 수세의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어서 “신의 생각으로는 목사 및 감사와 상의하여 민역(民役)을 만들어서 통솔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듯이 이 섬들의 재부를 수취대상으로 삼으려는 의도는 점차 가시화되고 있었다. 이런 국가의 정책은 머지않아 섬에 복잡한 사회문제를 안기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 문제는 궁가(宮家)가 먼저 만들어 갔다. 그래서 궁가는 섬들의 사회문제 중 제일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여러 궁가들은 임진왜란 이래 이미 어전(漁箭),어분(鹽盆) 등을 절수 받았다. 거기에 더하여 군문(軍門),관아(官衙)의 소속인 군둔전(軍屯田),관둔전(官屯田)을 절수지(折受地)로 택하였고 목장전지(牧場田地)인 목둔(牧屯)도 그 대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여러 곳들의 징세권이 궁가에게 이양되었다.

    어전이나 염분, 또 각종 둔전을 대상으로 궁가가 그 손을 뻗쳐왔다는 것은 결국 그 손이 섬으로 향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전,염분은 섬과 그 주변에 있었고, 각종 둔전도 섬에 많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예를 보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국가에서 목둔(牧屯)의 정사를 중요하게 여기므로, 여러 도(島)에 목둔을 설치하고 조세를 거두어 나라의 용도(用度)에 보태었는데, 근래에 목둔이 많이 절수(折受)하는 데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섬의 목둔이 주요 절수대상이 되었고 그 절수 주체는 내수사로 곧 궁방이었다.

    궁가는 성균관에 소속되어 있던 섬들까지도 빼앗아 갔다. 신안의 섬 중에는 도초도(都草島)가 그런 예에 속한다. 거기서 나온 세금으로 선비를 육성하는 자금에 보충하도록 하였지만 여러 궁가에서 거의 다 빼앗아 점유해 버렸다. 성균관에서 이를 되돌려 줄 것을 청하였고 한때 왕의 재가를 얻었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쉽게 집행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영조 연간에도 여전히 성균관이 “범도(凡島)를 잃은 후에 곤궁해졌다.” 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이 재가를 했다고 해서 곧바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비금도(飛禽島)의 전장(田庄)도 궁가에게 빼앗겨 말썽이 되고 있었다. 그 사실은 전라도 나주의 사인(士人) 임상유(林相儒) 등의 정장(呈狀)에 보인다. 또 궁방은 파시평(坡市坪)의 세전(稅錢)도 차지했다.

    이런 속에서 궁가의 하수인인 도장(導掌)·감색(監色)류에 의한 착취도 노골화하면서 섬의 악질적인 사회문제가 되었다. 위백규(魏伯珪, 1727~1798)의 지적을 보자. 궁둔(宮屯),궁결(宮結)에 도장과 감색을 두어 여러 섬에서 곡물, 목화, 어곽(魚藿) 등을 수세하는데, 그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10을 거두면 궁가에 올라가는 것은 1밖에 안될 정도로 사리(私利)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을 괴롭히는 해가 주부(州府)의 이서들보다 심하다고 하였다. 해도(海島) 폐단의 원천을 도장․감색의 정도를 벗어난 수탈[度外收奪]로 지적한 셈이었다.

    이런 궁가에 의한 폐단은 마침내 농민들의 집단적인 저항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의도였다. 그 일은 1730년(영조 6) 12월 사헌부 지평 엄경하(嚴慶遐)가 거론하면서 중앙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인즉슨, 하의(荷衣), 상(上),하태(下苔) 등 위아래 세 섬의 백성들이 “정명 공주방(貞明公主房)의 면세전 20결이 섬 속에 있었다가 그 뒤에 공주의 외손들에게 전해졌는데, 선조 때 전체의 섬을 절수했다 핑계하고는 민전 1백 60여 결에 대하여 몽땅 수세하니, 백성들이 원통함을 견디지 못하여 계묘년 무렵에 한성부에 송사를 냈으나 결국 졌다.”고 정장(呈狀)하였다. 그래서 엄경하가 한성부의 송안(訟案)을 가져와 살펴보니, 절수지임을 증명할 수 없는데도 무리하게 처리함으로써 섬의 백성들만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하여 재판결을 요청하였다.

    물론 그렇게 하라는 왕명이 있었지만, 역시 쉽게 해결될 리 만무했고 이는 20세기의 소작쟁의로까지 이어지는 고질이 되고 있었다.
    궁가만 섬을 괴롭혔던 것은 아니었다. 양향청(糧餉廳)에 바치는 닥나무의 폐단은 특히 흑산도를 괴롭혔다. “흑산도는 땅이 척박하여 닥나무의 뿌리가 거의 없어졌는데, 매번 종이를 뜨는 일이 생길 때면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에게 닥나무 껍질 1만 2천 9백근의 댓가로 돈 5백 냥을 규정으로 정해 받아들이는 것이 잘못된 규례가 되고 말았다.”라는 말처럼 외딴섬의 민폐가 되어 버렸다. 물론 흑산도의 주민들은 관찰사에게 징을 쳐 원통함을 호소하는 등 집단적인 대응도 불사하였다.

    사복시도 여전히 섬을 괴롭히는 주체의 하나였다. 순무사(巡撫使)로 호남에 간 적이 있는 형조 판서 김구(金構)가 말하기를 “나주에 사복시의 둔전이 있는데, 한 목장에서 거두어들이는 면화가 1만 근이나 되고 다른 곡물도 이에 맞먹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섬은 궁가의 여러 가지 수탈 외에도 면화나 그밖의 곡물까지도 빼앗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양으로 빼앗기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경외의 호족들이 또 한 몫 거들었다. 해도는 원래 입안이 안되는데 어살[魚箭], 천양(川梁) 등을 모두 세력가들이 입안하여 사유지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그 사사로이 침탈하는 폐단이 크다고 지적되었다.

    호남의 해도를 두루 살피고 돌아온 부교리 황정(黃晸)이 올린 상소에서 “그곳 토지와 어,염은 모조리 여러 궁가와 각사(各司)의 절수로 들어가고, 경외(京外)의 호족들이 사사로이 점유해 갖가지로 침학하여 풍속과 습성이 완악합니다.”라는 보고 역시 그런 사실을 확인해 준다.

    섬의 폐해 곧 해폐(海弊)는 해민의 호소에 1부(夫) 1년 비용이 거의 만백금(滿百金)에 이르러 해호(海戶)의 절실한 폐단이 된다고 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환곡이나 군정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육지부의 백성들이 당하는 사회문제가 이제는 섬에서도 모두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섬의 폐단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경세유표(經世遺表)'에 다음과 같이 종합되어 있다.

    “오직 서남쪽 바다 여러 섬이 … 나라의 바깥 울타리이다. … 또 명목은 고을에 예속되었으나 실상은 딴 곳에 매여서, 혹 궁방이 절수해 갔고, 혹은 군문에 획급되었으며, 혹은 고을 토호에게 공(貢)을 실어 가고, 혹은 관리와 계를 만들기도 한다. 진,보가 있는 곳은 수영에 매였고, 별장이 있는 곳은 경영에 매였는데, 간사한 짓이 사방에서 나와 제멋대로 백성에게 토색질을 한다. … 모든 어장이나 염전이 한 번 세안에 들었으면 비록 창상(滄桑)이 여러 차례 변하여도 면할 수 없고, 책맹(舴艋, 작은 배)의 배라도 한 번 세안에 들었다 하면, 비록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도 빠지지 못한다.”

    바닷가 고을 강진에서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의 눈에 비친 섬의 실정은 이와 같았다. 이런 섬 백성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다산은 또 이렇게 말한다.

    “내 생각에는 별도로 한 관청을 세워서 온 나라 섬을 관장하고 그 명칭을 유원사(綏遠司)라 하여 그 판적(版籍)을 맡고 부세를 고르게 하며, 침어를 금단하고 질고를 제거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법을 세우는 초기에는 감찰어사를 분견(分遣)하되 규정을 만들어 주고 여러 섬을 순행하면서 강계(疆界)를 바루고 호구를 기록하며 폐막을 물은 다음, 돌아와 모여서 법제를 편저하여 여러 섬에 반포하고 그 법에 따르도록 한다. 또 3~4년마다 본사(本司) 낭관(郎官)을 보내 여러 섬을 암행하면서 간활한 짓을 살피며, 또 섬 백성에게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는 것은 바로 본사에 호소하도록 하여, 여러 섬 백성에게 의지할 곳이 있도록 함은 참으로 먼 곳 백성을 편하게 하는 큰 정사이다.”라 하여 유원사라는 관청을 세워 섬만을 전담 관리하게 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물론 이는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섬만의 군읍’ 설치로 이어지는 구상이었다.

    실제로 당시 섬 사람들은 궁가와 호족들에 의한 사사로운 침탈이 심하자 아예 관이 와서 직접 다스려 주기를 바랬다.

    그런 뜻은 1799년(정조 23)에 암태도에 나주제도 즉 암태를 비롯하여 자은,자라(者羅),박지(朴只),하태(下苔),하의(荷衣),안창(安昌),옥도(玉島),상태(上苔),도초,팔금,기좌(其佐),반월(半月),장산,비금,흑산 등이 연명으로 세운 「수사김공처한휼은선정비(水使金公處漢恤隱善政碑)」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에는 합회(蛤灰),생마(生麻),지초(芝草),석자(席子),분족(分族) 등 췌역(贅役) 5조의 늑정(勒政) 때문에 고통받게 된 내력과 수사 김처한의 배려로 생마를 제외한 나머지 4조가 개혁되어 폐단을 덜게 된 사정을 적었고, 그 휼은의 은택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운다고 하였다.

    이런 비를 신안의 여러 섬들이 연명으로 세웠다는 것은 바른 관에 의한 선정을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애틋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따라서 형조에 딸린 관청으로 유원사를 설치하자는 다산의 구상은 섬사람들의 바라는 바이기도 하였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설군(設郡) 또는 설읍(設邑)이 본격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논의는 부교리 황정의 상소에 보인다. 그는 호남의 해도를 두루 살피고 돌아와서 올린 상소에 주로 궁가와 호족들의 폐를 거론 한 뒤, “혹은 나이 많은 백발 노인이 있어 관장을 보고는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맞이하는 자까지 있었으니, 이에서 민심을 감화시키기가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 방법으로 “읍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어 한편으로는 섬 백성들을 수습하는 방도를 삼고, 한편으로는 해방(海防)을 관할하게 하소서.”라 하여 설읍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설군,설읍에 대한 논의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2) 표도인(漂到人) 문제

    당시 용어로 표도인이라 불리는 이른바 표류인은 국제간에 사랑의 원칙으로 대하였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으로 잔뜩 왜적에 적대감을 갖고, 조그마한 왜적이 날뛰는 것도 대단히 통분하게 여겨, 만약 적선을 만나면 꼭 끝까지 추격하여 모조리 섬멸하게 하고, 추격하여 미처 사로잡지 못한 자에 대해서는 나가 싸우지 않았다는 법률로써 죄를 주었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에도 왜적과 표류인은 엄히 구분하여 대하였다. 영경연사 상진(尙震)의 말을 들어보자.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사랑으로 말한다면 왜인들도 역시 천지의 사이에 함께 났는데, 당초에 도적질하려는 것이 아니라 배가 파손되어 육지로 올라온 자들을 유인하여 살해하는 것이 어찌 함께 생존하는 사랑에 해로움이 없겠습니까? 전에 일본 서계(書契)에 ‘표류한 사람이 귀국(貴國)에 도달하면 살해하지 말아 달라.’ 하자 ‘귀국의 표류한 백성이 우리 국경에 도달하여 만약 무기를 버리고 몸을 드러내면 당연히 보호하여 송환하겠다.’고 답하였고, 그 뒤에 무위전(武衛殿)의 서계에 답하면서도 역시 ‘귀국의 백성도 우리의 백성과 같으니 한결같이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다. 만약 무기를 버리고 몸을 드러내어 표류한 사유를 분명하게 진술하면 살해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식량 등을 주어 보호하여 송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답한 것은 이와 같은데 지금 모두 살해한다면, 어찌 신의(信義)가 있다 하겠습니까? 항복을 비는 자들은 모두 쇄환(刷還)하고 또 추장(酋長)에게 글을 보내어 살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효유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말처럼 왜구가 날뛰던 당시에도 표류 왜선은 분명히 왜구와 구분하여 처리하였다. 이런 상진의 말에 왕조실록의 사신(史臣)도 “상진은 대신의 체통을 깊이 터득하였다.” 라고 하여 동의를 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런 원칙은 지켜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왜선 중에 화물을 가득 실은 배는 풍랑으로 인하여 표류한 것으로, 항상 통행하는 길을 경유하지 않고 다른 길로 경유하는 자는 왜구로 구분하여 처리하게 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표류 왜선과 왜구를 구분하는 일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조정이 어찌 표류해 온 배를 기화로 여겨서 공을 세우려는 마음을 멋대로 버려 둘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지만, 당시 변장들은 장수를 죽인 수치를 씻는다거나 명나라의 도둑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표류 왜선일지라도 공격의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안으로는 물건을 빼앗아 사욕을 채우고 밖으로는 군공을 차지하려는 마음이 반드시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반드시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라는 말로 애매하게 논의되듯이 사실 삼포왜란(1510, 중종 5)이나 을묘왜변(1555, 명종 10)을 겪은 당시에 표류 왜선과 왜구를 엄밀히 구분하여 처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로 1561년(명종 16) 수사 곽흘(郭屹)과 진도군수 이숙남(李叔男)이 흑산도에서 왜인을 잡은 일로 상가(賞加)한 일이 문제가 되었는데, 그 왜인이 “표류한 왜인”인지 “변경을 침범한 왜구”인지 입장에 따라 서로 해석을 달리하는 바람에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는 사랑의 원칙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605년(선조 38)에 다시 흑산도의 왜인 토벌이 문제가 되자 왕은

    “부산 일로(一路) 외에 표류하여 타도에 도착한 모든 왜인들에 대해서는 조종조 이래로 한결같이 적왜(賊倭)로 논단하여 약조가 매우 엄하였으니 의도한 바가 있어서였던 것이다. 그처럼 엄하게 했는데도 오히려 제도(諸島)에 출몰하여 몰래 우리 백성을 약탈하는 피해를 막을 수 없었는데, 하물며 오늘날 불공대천의 원수가 된 뒤이겠는가. 해송(解送)하는 길을 한 번 열어 놓으면 뒷날 변방의 환난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교활한 이 적들은 음흉하고 믿을 수 없다. 이를 이끌어 구실로 삼는다면 난처한 해송 문제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라 하여 표류 왜인의 범위를 극히 제한하였고 왜인의 처단에 강경책을 썼다. 그러나 조선통신사가 오가는 조선후기가 되면 이 또한 완화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한때 표류하던 중국 배가 나주 비미도(飛彌島)에 닿아 말썽을 일으킨 적이 있었지만, 중국인이 우리 연변으로 노략질하러 온 기록은 그리 흔치 않다. 따라서 중국인이 온다면 그들은 대개 표도인으로 대접받았다. 따라서 표도(漂到) 호인(胡人) 즉 중국으로부터 표류해온 이국인은 아무래도 왜인과는 달랐다. 표류한 중국인을 결박하면 오히려 결박한 변장이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표류한 호인은 이미 대국(大國) 사람이니 그 교린(交隣)의 도리에 있어서 강박(强迫)하여 쫓아 보낼 수 없다. 넉넉히 양자(糧資)를 주고 순풍을 기다려 역관(譯官)을 보내어 데려오도록 해서 사신이 가는 편에 되돌려 보내도록 하라.”고 하여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여 주었다. 지도(智島)에 표류한 중국인들에게 친히 가서 양식을 주지 않았다고 하여 나주목사를 징계 파직하게 하기도 하였다.

    또 흑산도에 표류한 이국인의 배를 둔장(屯長)이 쫓아낸 일을 보고 받고 정조도 역시 “먼 곳의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고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의의에 있어서, 만 번 죽음을 겪고 살아 남은 목숨을 못본 체한 것은 우선 놔두고라도 도리어 쫓아보냈으니, 저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도백으로 하여금 둔장의 성명을 조사해 내어 엄히 형벌을 주고 본 섬의 별장은 육지로 귀양 보내고 지방관은 파직하여 내쫓도록 하라."고 하여 같은 기조를 유지하였다.

    신안군은 중국을 마주하는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특수한 조건 때문에 중국의 표도인 문제가 특히 많았다. 표도인문제는 표퇴(漂頹)라고도 하며 비변사가 관장하는 고유업무 중 하나였다. 비변사가 이들 표도인을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대하여는 '만기요람(萬機要覽)'의 비변사 소장사목(所掌事目) 표도인 조항에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먼저 그 규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국인(異國人)이 표착(漂着)했다는 보고서가 들어오면 뱃길이나 육로를 불문하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송환시키는 방침으로 아뢰어 하되, 뱃길을 통과하는 동안의 피복과 식량을 제공하고, 잡인을 금하고 호송하는 제반 절차를 엄중 시달할 것이며, 표착인이 만일 경기를 통과하여 갈 경우에는 홍제원에 들어온 뒤에 낭청을 파견하여 다시 사정을 사문(査問)하고, 피복과 잡종 물품을 따로 내어 주도록 한다. 단 전라도에서는 표인(漂人)이 뱃길로 돌아가기를 원하면 회송되는 공문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떠나 보내고, 뒤에 경과를 보고하도록 1779년(정조 3, 계해)에 규례를 정하였다. 표착한 중국인이 육로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내지인(內地人)이면 따로 자관(咨官)을 정하여 호송하고, 만일 외지인이면 의주부의 통역관이 호송하고, 봉성(鳳城)에까지 가서 넘겨주고, 중국에 보내는 문서는 금군을 정하여 의주부로 내려 보낸다.”

    실제 처리된 내용을 보면 이 규정과 거의 어긋나지 않게 처리되고 있다.
    표도인에 대한 심문내용을 정리한 것이 문정기(問情記)인데 이 문정기도 임의로 만들지는 않는다. 표도인에게 물어야 할 내용, 즉 심문(審問) 사항은 '등록유초(謄錄類抄)' 「변사(邊事)」 일(一)에 상세히 적시(摘示)되어 있다. 물론 그 규정에 따라 심문이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표도인에 대한 심문의 처리는 비변사의 중요임무 중 하나였다. 이를 통해 국가가 변방의 정세를 파악하여 대책을 세울 수 있고, 중국·일본·남만(南蠻) 나아가 그곳에 왕래하다가 조선에 표류한 서양인의 동정까지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문정기는 변방을 대비하는 ‘비변(備邊)’의 중요 정보원이 된다.

    대외적인 위기감이 높아지는 19세기는 표도인 문제가 더욱 중요해졌다. 실제 '비변사등록'을 보아도 19세기에 관련 기록이 집중적으로 많이 나옴을 볼 수 있다. '비변사등록' 중에서 발췌한 신안군 관련 기록 145건 중 표도인에 관련된 기사가 95건에 이를 정도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절대적인 비중을 점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중 심문내용인 문정기(또는 別單)가 수록된 것은 모두 15건에 이른다.


    3) 유배인 문제

    '속대전(續大典)'에 “평민은 충군(充軍)하고 공(公),사천(私賤)은 도배(島配)한다.”는 말이 있다. 도배란 섬으로 유배보낸다는 뜻으로 그 대상은 공․사천들이었다. 이렇듯이 섬은 공,사천이나 유배 가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섬은 ‘멀고 고약한 유배지’였다.

    특히 흑산도는 “흑산도는 험난한 바다와 악독한 장기가 다른 정배지(定配地) 보다 가장 심하다.”고 할 만큼 역시 절도(絶島) 중에서도 절도로 꼽혔다. 그래서 신안의 유배지 하면 무엇보다 흑산도가 떠오른다. 흑산도가 유배지로 본격 활용되기 시작한 때는 숙종 때부터이고 영조대에 들어 급격히 늘어났다.

    1738년(영조 14)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옛부터 흑산도에 귀양 보낸 사람은 오직 갑술년(1694, 숙종 20)의 유명천(柳命天)과 경종조의 고 참판 홍계적(洪啓迪) 두 사람뿐이었는데, 작년 가을 이후에 정배(定配)된 사람이 세 사람이나 됩니다.”라 하고 이어서 “흑산도란 섬은 본래 경솔하게 귀양 보낼 곳이 아닌데 성상께서는 누차 귀양 보내고 계시니 어찌 타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 말 속에서 흑산도가 귀양지로 이용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왕조실록의 유배지 분포를 보면 흑산도는 제주, 거제 다음 가는 세 번째로 그 빈도수가 높았다. 흑산도에는 정약전(丁若銓, 1758~1816)과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유배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흑산도에 머무는 동안 문순득(文淳得)이라는 우이도(牛耳島) 사람의 표해 사실을 정리한 '표해록(漂海錄)'과 어류(魚類) 및 해산물, 섬의 풍속 등을 정리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면암 최익현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오불가척화의(五不可斥和議)’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먼저 우이도로 왔다. 그 유배 일정을 보면, 그는 1876년 9월 무안읍에 도착하였고, 9월 10일 다경포진을 출발, 암태, 팔금, 기좌, 도초, 비금을 거쳐 9월 16일에 우이도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이도에 도착한 그는 문인주(文寅周)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다. 그후 언제인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곧바로 흑산도로 옮겼다. 흑산도에 온 그는 처음 진리(鎭里)에서 일신당(日新堂)이라는 서당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뒷냇가에는 의두암(倚斗岩)이라는 바위가 그와 연관되어 있다. 다시 면암은 천촌리(淺村里)로 옮겨 지장암(指掌岩)에서 교화에 전념하였다.

    현재 유허(遺墟)에는 “기봉강산(箕封江山) 홍무일월(洪武日月)”이라는 그의 친필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앞에는 1924년 9월 문하생 오준선(吳駿善)이 짓고 임동선(任東善)이 쓴 「면암최선생적려유허비(勉庵崔先生謫廬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유배지로 이용되었던 신안의 섬은, 기록에 나타난 것만 보면, 흑산도 외에 지도와 임자도 정도 밖에는 없었다. 지도도 비교적 유명한 유배지였지만, 고약한 유배지는 아니었다. 섬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았다. 지도,고금도,진도 등은 오히려 육지보다도 좋은 지역으로 평가되었다.

    거리만 가깝다면 섬도 그다지 고약한 유배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육지만은 못했다. 영조 46년에는 해도로 처분한 자를 대부분 육지로 정배하고 있는데 이는 큰 은택이었던 셈이다.


    4) 민중의 꿈을 담은 섬

    “멀고 고약한” 섬이었지만 다른 한편, 바로 그 “멀고 고약한” 점 때문에 섬은 민중들의 꿈을 안고 있는 이상국가=유토피아로 비춰지기도 하였다. 섬에 이상국가를 상치시키는 민중들의 소박한 꿈들은 조선후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바로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이 그것이다. 해도진인설은 해도를 이상국가로 생각하고 거기서 어떤 영웅이 나타나 현세의 어려움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이때 왜 하필이면 해도진인일까?

    이상국가로서의 섬이라고 하면 제일감으로 떠오르는 것은 홍길동전의 율도국이다. 그 율도국은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 수십대를 전자전손하여 덕화유행하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넉넉”한 그런 곳이었고, 홍길동이 신왕으로 등극한 후는 “시화년풍(時和年豊)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하여 사방에 일이 없고, 덕화대행하여 도불습유(道不拾遺)하는 그런 나라가 되었다. 길동이 율도국을 치기 전에 삼천 적군을 거느려 망망대해로 떠나 먼저 이른 곳도 성도라는 섬이었다. 그 섬에서도 홍길동은 “창고를 지으며, 궁실을 지어 안돈하고, 군사로 하여금 농업을 힘쓰고, 각국에 왕래하여 물화를 통하여, 무예를 숭상하여 병법을 가르치니 삼년지내(三年之內)에 군기(軍器)·군량(軍糧)이 산같고, 군사가 강하여 당적할 이가 없게 하였다.

    이처럼 홍길동이 이르는 섬은 그전부터 풍요한 곳이었고, 그가 이르면 더욱 풍요해지는 그런 이상적인 곳이었다. 현존하는 홍길동전은 그 쓰여진 시기가 18세기 중엽을 소급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고려해 보면, 성도와 율도국의 사정은 바로 조선후기 섬의 사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율도국이라는 이상국가의 모범이 만들어지기까지 섬은 민중들에게는 하나의 도피처, 새로운 희망을 주는 땅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육지사람들이 보기에 섬은 불온한 집단이 사는 곳이었다. 섬에는 사람의 대열에도 끼지 못하는 천한 존재인 수군(水軍), 죄를 짓고 도망하거나 주인을 피해온 사람들, 그리고 유배되어온 반역죄인들이 살고 있었다. 한마디로 섬은 ‘반역향(反逆鄕)’이었다. 그래서 섬은 “살기 좋은 땅”이지만 ‘반역향’이었다.

    “살기 좋은 땅”과 ‘반역향’, 이런 두 가지 인상은 묘하게 교차한다. 이제 민중을 구원할 진인을 찾는다면 육지의 봉건정부에 온통 불만을 갖고 있을 섬사람 가운데서 찾는 게 제일 빨랐다. 그리고 섬은 당시 가렴주구로 고통받던 육지사람들이 보기에는 먹을 것도 풍족하고 또 수탈로부터도 자유로운 이상사회였다. 그렇게 보이기에 하등 모자랄 게 없었다. 그러니 섬에서 진인이 태어나 육지의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원하고 다시 섬에 이상국가를 만들어 거기서 행복하게 산다는 해도진인설이 전혀 황당한 것은 아니었다. 섬에 가면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아기장수 설화, 그 아기장수가 바로 해도진인이었다. 민중들이 생각해 낸 아기장수, 즉 해도진인은 이렇듯 이상이었지 공상이 아니었다. 섬의 현실에 토대를 둔, 그래서 육지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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