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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선후기 신안 섬들의 새로운 전기 신안문화원 2006/3/23 4682


    조선후기 신안 섬들의 새로운 전기

    1) 살기 좋은 땅

    광해군 때가 되면 “근래에 남쪽 변방이 조금 조용해짐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수군 보기를 마치 쓸모 없는 것처럼 보아 양호 지방에서 입방(入防)하는 배를 줄이고 본도의 선박 20여 척만 남겨두었습니다.”라는 지적이 나올 만큼 신안 섬 주변은 평화로워졌다.

    그때까지 바닷가와 섬은 왕화(王化)의 최외곽지역, 이른바 변지(邊地)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변지는 내지와 구분되었다. 한마디로 등급이 처지는 지역이었다. 이렇게 변지로 인식되었던 지역들에 평화가 찾아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제 섬들은 단순한 주변부 내지는 경계지로 그쳐 죽은 땅이 되기보다는 개척·개발의 땅이 되었고 실제로 활발히 개척·개발되어 나갔다. 이에 상응하여 국가의 관심도 높아졌다.

    그런 변화는 먼저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국가가 편찬하는 관찬지도에 섬에 대한 표현이 크게 달라졌다. 섬과 바닷길을 보다 자세히 또 정확히 그리고 있다. 또 같은 섬이라 해도 호남의 섬들이 훨씬 밀도 있게 그려졌다. 관찬지도는 국가가 사회변동을 파악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만드는 것으로 섬에 대한 표현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섬이 달라지고 국가의 대처방안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 달라진 내용은 뭘까? 한마디로 “살기 좋은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평화가 찾아온 서남해의 뱃길이 주는 이익이었다. 바닷가와 섬의 재부를 이루는 것은 어·염과 조선(造船)이었고 이를 매개로 한 상업활동이었다. 특히 양난이 진정되고, 왜구의 위협도 사라지자 그런 활동은 여유를 찾았고 서남해안의 뱃길도 거침없이 잘 통하였다. 1751년(영조 27)에 박문수(朴文秀)가 지역별로 상선(商船)의 선세(船稅)를 정하면서 왕에게 말하기를

    “호남의 상선은 그 이익이 매우 많으나 영남은 도내의 행상에 지나지 않고, 좌도 연해는 단지 동해의 소산뿐이므로 이익이 호남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그 뱃길이 주는 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음, 목장이 농지로 바뀌는 변화가 섬의 부를 크게 늘렸다. 목장이 농지로 바뀌는 사정은 '목장지도(牧場地圖)'(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보인다. '목장지도'는 1663년(현종 4) 당시의 사복시 제조였던 허목(許穆)이 그 이전에 작성되었던 목장지도를 보완한 것이다. 그 지도의 후서(後序)에는 1635년(인조 13) 4월에 처음 목장지도를 만들어 올리면서 쓴 장유(張維)의 근서(謹敍)가 인용되어 있고 효종때 정태화(鄭太和)가 정비, 모사한 것을 허목이 다시 재정비한 내력이 상세히 쓰여 있다.

    원래 목장은 농사와 관련이 있었다. 사복시의 곡물은 호남의 목장에 의지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사복시의 목장은 서남해의 주요 섬들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장유의 글에 따르면 선조 중년부터 점차 목장이 공폐(空廢)하기 시작하더니 양난을 겪고 난 지금은 복구하기 어려울 만큼 황폐해졌다고 한다. 119개소의 목장 중 말을 기르는 곳은 46개소이고 나머지 73개소는 모두 폐장되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그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 대책 중의 하나가 모민개전(募民開田)하여 그 수입으로 추말(芻秣)을 도와 차차 복구시켜 가는 방안이며 지금 목장지도를 작성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모민개전만 되었지 그것이 다시 목장에 투자되어 목장이 복구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목장이 농지로 바뀌는 일만 계속되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목장과 말은 줄어들었지만 섬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농지가 생겼던 것이다. '목장지도'에 따르더라도 전라도에는 전국 119개소 중 39개소가 있었을 정도로 다른 지방에 비해 특히 목장이 많았다. 따라서 목장이 농지로 바뀌는 변화도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또 그만큼 섬의 부는 커져 갔다. 그리고 섬에 사람이 늘어감에 따라 그 변화의 추세는 더욱 빨라졌다.

    그렇지만 그런 변화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612년(광해군 4)의 기록을 보자.

    먼저 비변사에서 “나주,순천,해남,흥양,울산(蔚山),강령(康翎) 등의 목장 말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경작하자는 일”을 올려 모두 왕의 재가를 받았다. 그러나 곧 사복시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 이유가 흥미롭다. 마정(馬政)은 폐할 수 없다는 원칙론 외에 “지금 만약 둔전을 설치하면 마정이 날로 피폐해지고 금년 내년 둔전의 경작 햇수가 길어지면 목장이 영원히 둔전이 될 것이며, 둔전은 끝내 사전(私田)으로 변하여 세도 있는 집이 그 이득을 엿보아 절수 받고자 할 것인데, 그 누구인들 나라를 위해 기꺼이 원한 사는 것을 감수하며 시종 허락하지 않겠습니까.”라 하여 절수의 폐단까지를 예견하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또 더구나 “지금 백성은 너무 적고 공한지는 극히 많아 비록 목장이 아니더라도 곳곳에 경작할 만한 땅이 있습니다.”라는 이유도 들었다. 그러자 그 이유가 타당했다고 보았는지 왕은 결국 사복시의 의견을 따랐다.

    섬에 둔전을 설치하는 것이 가진 자의 이득이 되리라는 것은 이때부터 벌써 예견된 것이었다. 따라서 일시 정지되기는 하였지만 결국 둔전 설치는 시간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1627년(인조 5)에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권력자였던 김류(金鎏)가 섬에 둔전 설치를 강력 주장하고 나섰다. 그 말을 들어보자.

    “호남의 황원(黃原) 및 완도,지도,고금도(古今島),의도(義島),위도(蝟島),고군산(古群山)도 모두 기름진 땅인데 태복시(太僕寺)에서 거두는 것은 그 1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런 지역의 곳곳에 둔전을 두면 그 비용이 적을 뿐만이 아니라 수확이 많을 것이며, 또 이는 연변(沿邊)의 섬이므로 운송할 때의 고충을 줄일 수 있으니, 곡식을 얻는 방법으로는 이보다 편리한 것이 없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대해 왕은 아직 내지 둔전의 폐단을 들어 주저하고 있었지만,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김자점도 “둔전(屯田)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예컨대 목장 등을 모두 개간하여 경작하게 하면 반드시 많은 곡식을 얻을 것입니다.”
    라 하여 그런 대열에 앞서고 있었다. 물론 이때도 왕은 반대했다. 그러나 숙종대가 되면 왕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병조판서 김석주(金錫冑)가 “나주의 임치도 목장은 토지가 기름져서 천여 석(石)의 씨를 뿌릴만한 밭을 만들 수가 있고, 지금의 말은 종류가 못생기고 둔하며 기르는 수효도 또한 적습니다. 지금 나라의 저축이 모자란 때를 당하여 개간하여 곡식을 쌓아두면 그 이익은 실로 1년에 몇 필의 말을 기르는 것보다 갑절이나 될 것이니, 지금은 잠시 말을 옮기고 백성에게 들어가 경작함을 허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 하자, 왕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마침내 목장에 둔전 설치가 공식 허락되었다.

    1796년(정조 20)에는 임자도(荏子島)의 목장에도 백성들이 농사짓도록 허락되었다.

    1415년(태종 15) 설치된 임자도 목장은 381년만인 1796년(정조 20)에 폐쇄되었다. 목장부지였던 종달평은 농토로 개간되었다. 그리고 종달평에서 거두어진 세금은 화성의 내용고(內用庫)에 귀속시키도록 하였다.

    한편, 풍락목(風落木)의 발매(發賣)도 섬의 재부를 늘리는 조건이 되었다. 원래 나무는 보진(補賑)에 중요한 재원이었다. 1713년(숙종 39)에 전라감사 유봉휘(柳鳳揮)는 흥양의 절이도(折爾島)와 가리진(加里鎭)에 바람으로 쓰러진 황장목(黃腸木)이 수천 그루에 이른다면서 이것들을 팔아서 보진하자는 청을 올린다. 이때는 바람에 쓰러진 이른바 풍락목이기 때문에 국용에는 적합치 않으니 발매보진(發賣補賑)은 실효가 없고 오히려 이를 핑계로 남작(濫斫)하는 폐단이 우려되는 등 부작용이 크다고 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풍락목의 발매보진은 기정 사실이 되어 있었다. 1732년(영조 8)에 전라감사 유엄(柳儼)은 한편으로는 발매보진의 필요성을 급히 보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발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나라에서도 특별한 진자(賑資)를 획급(劃給)할 수 없는 형편을 들어 비록 폐가 있더라도 발매보진을 허락할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한다. 그리하여 선재(船材)나 가재(家材)로 쓸 수 있는 것 외에는 모두 전라도에 출급하여 발매보진하도록 허락하고 만다. 풍락목의 발매보진은 호남이 선례가 되어 영남에도 일체 허시(許施)된다.

    평화가 찾아온 섬, 뱃길의 자유로운 왕래, 목장이 농장으로, 풍락목의 발매 등 이런 연유들로 호남의 섬은 살기 좋은 땅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다음의 ,영조실록, 기사는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호남균세사 이후(李厚)가 호남의 해도도(海島圖)를 올리고 아뢰기를,

    “섬 가운데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번성하고 생활이 풍족하여 육지의 백성들보다 나았습니다. 차차 깊이 들어갔더니 등주(登州)·내주(萊州)와 서로 마주 바라본 곳이 있었는데, 대개 섬의 백성들이 모두가 죄를 범하고 도피했거나 혹은 사노(私奴)로 몰래 피신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섬의 백성들이 주현에 통속되지 않았는가?”
    하였다.
    이후가 말하기를,
    “해도는 부근의 고을에 소속되어 약간의 세금을 거두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섬사람들이 생전 관장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별성(別星, 즉 奉命使臣)으로서 위의(威儀)를 갖추고 들어가니, 남녀노소가 크게 놀라고 조금은 괴이하게 여기며 모두 다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불러서 안심시키고 모았습니다. 풍원군(豊原君, 趙顯命의 봉호)이 본도의 감사가 되었을 때 고을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조가에서 마땅히 가어(駕御)를 기미(覊縻)하는 방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축(圖軸)을 유중(留中)하라.”
    하였다.

    먼저 “섬 가운데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번성하고 생활이 풍족하여 육지의 백성들보다 나았습니다”라는 대목이 눈에 띤다. 섬은 분명히 잘사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리고 주현이 섬을 통속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섬만으로 고을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음을 거론하면서 섬에 대한 기미 정책을 강구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균세사가 섬을 직접 들어가 조사한 것 자체가 이미 섬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뜻하는데 실제로 그가 보고 온 내용에서 그 변화는 사실로 확인되고 있었다. 그가 본 섬은 분명히 “살기 좋은 땅”이었다.


    2) 섬으로 섬으로, 입도조(入島祖)의 물결

    현재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섬의 역사는 조선후기 입도조와 입도 이후 이들이 분파하면서 섬의 여기저기에 자리잡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입도조란 원래 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이란 뜻이지만, 이들이 결코 섬을 개척한 최초의 정착민은 아니었다. 이들은 다만 17,18세기 사회변화와 도서지방의 안정을 계기로 새롭게 이주,정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혈맥이 바로 지금 섬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직접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섬 주민들에게는 입도 선조(先祖)가 된다. 그런 점에서 입도조라 불리게 된 것이다.

    섬으로, 섬으로 들어가는 추세는 서남쪽 끝 섬인 가가도(可佳島, 현 可居島)에까지도 미쳤다. “처음에 이 섬이 적로(賊路)의 첫길이 된다고 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비워두었는데, 근래에 와서 유민(流民)들이 다시 모여들므로 조정에서 장차 다시 몰아내려고 하였다. 윤세기가 몰아내지 말고 그대로 훈국(訓局)에 소속시켜 군향(軍餉)에 보탤 것을 청하니, 아울러 따랐다."는 1707년(숙종 33)의 기록은 이제 못갈 섬이 없고 정착이 금지되는 섬도 없었음을 뜻한다.

    그러면 왜 17세기 이후에야 이주,정착한 주민들이 시조(始祖)라는 뜻을 지니는 ‘입도조’라 불리게 되었을까? 그 까닭은 아무래도 선초까지 이어졌던 공도정책과 이후 계속되던 왜구의 침략, 그리고 임진왜란 등으로 인하여 섬 생활이 불안정했고 따라서 대를 이어 섬에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며 살기가 어려웠던 사정 때문이었다. 주민의 교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현 주민들로 직결될 수 없었다. 그러니 후손을 갖는 시조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섬에 평화가 찾아온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주민 교대가 그쳤다. 따라서 그때 섬을 찾은 사람들은 후손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입도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지금 섬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역사의 상한은 입도조부터라는 뜻이 된다. 17세기 이후 도서지방에 정착한 이들 입도조 집단들은 결국 오늘에 이르기까지 섬의 생활과 역사의 주역이었고 문화주체자였던 셈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결과를 보면, 신안 섬 입도조들의 입도시기는 17세기 이후이다. 그리고 그들이 섬으로 들어온 이유, 즉 입도 사유(事由)는 저마다 다양하다. 대개는 중첩된 가화(家禍)나 피역(避役), 또는 생계 곤란으로 이주,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경우에 이들은 본래의 연고지를 떠나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정착하게 된다. 한편 ‘탁인친(托姻親)’의 경우로 연고권이 있는 지역에 정착하기도 한다. 이때는 인친(隣親)이 먼저 이주,정착한 후에 뒤이어 정착하기도 하고, 취가(娶家) 후에 처족(妻族)의 정착지에 안주하기도 한다. 그들의 전 주거지는 서남해 연안의 군들이 대부분이다. 또 다른 입도 유형으로는 입도 후의 분파가 있다. 이들은 같은 섬 내의 다른 곳이나 인근 섬으로 퍼져나간다. 더러는 출륙하기도 한다. 그런 분파는 최초의 입도보다는 늦은 18세기말 이후에 일어난다.

    조선후기에 입도조라 불리는 새로운 이주민들과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오늘날 섬의 문화와 역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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