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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초기 신안의 섬들 신안문화원 2006/3/23 5497


    조선초기 신안의 섬들

    1) 신안 섬들의 해로상 위치 - 동양 삼국을 잇는 징검다리

    신안의 섬들은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로상에 있으면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송사(宋史)에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으로부터 순풍을 만나면 3일에 대양(大洋)에 들어가고, 또 5일에 흑산(黑山)에 이르러 그 나라 경내에 들어간다.’ 한 것이 바로 이 섬이다.”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은 흑산도가 중국과의 주요하고 편리한 교역 통로였음을 말한다.

    또 '택리지(擇里志)'에 보면 “신라에서 당나라에 조공할 때에 모두 이 고을 바닷가에서 배로 떠났다. 바닷길을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흑산도에서 또 하루 가면 홍의도(紅衣島)에 이른다. 다시 하루를 가면 가가도(可佳島)에 이르며 간방(艮方, 동북방향) 바람을 만나, 3일이면 태주(台州)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게 되는데, 실제로 순풍을 만나기만 하면 하루만에 도착할 수도 있다. 남송이 고려와 통행할 때에 정해현 바닷가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만에 고려 경계에 이르고, 뭍에 올랐다는 것이 바로 이 지역이다.” '택리지' 팔도총론 전라도 나주조.
    라 하고 있어 위 '송사'의 기록과 상응한다.

    신안의 섬들은 마치 중국과 우리 나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징검다리처럼 최고의 바닷길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흑산도는 특히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래서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옌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도 흑산도 이야기가 나온다.

    옛 통일신라 때에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중국에 이르는 제일 항로는 영암의 덕진․구림이나 영산강에서 흑산도를 거쳐 양주·명주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출발지나 목적지가 달라도 육지 연안의 섬들을 지나 반드시 흑산도를 거쳐서 갔다.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해상독점도 실은 이 해로를 장악한데서 가능했다.

    신안의 섬들이 국제적인 해상교통의 요지에 있다는 것은 활용하기에 따라 매우 좋은 조건이지만, 그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대중국 관계에서는 사신 접대 및 표도인(漂到人) 문제가 있었고 대일본 관계에서는 주로 왜구가 문제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려말 조선초기에 이 바닷길은 왜구들의 통로가 됨으로써 신안의 섬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안겨주었고, 심한 역사의 단절과 굴곡을 가져다주었다.



    2) 왜구의 침략과 공도(空島), 그리고 그 대책

    왜구는 고려말 조선초 약 70년간 우리 나라 연안 각지에 침입하였다. 특히 고려말 약 40년간은 그 피해가 컸는데, 그 중에서도 서남해 연안과 섬의 피해가 컸다. 김세렴(金世濂)의 말을 들어보면,

    “… 문종 이후로부터 왜의 도적질이 시작되었으나, 영남의 바다 연안에 그쳤습니다. 충선왕 때에 호남의 군산도(群山島),추자도(楸子島) 등을 침범하고, 충정왕 때에는 경기의 삼목도,자연도 등을 침범하는 데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때에는 해서의 봉산과 관서의 선천과 서남해의 연안을 침범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관북,영동에는 한 번의 변경도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고려말 40년간 집중적인 피해지역이 호남과 서남해 연안이었음은 이 글만으로도 분명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중 나주목의 고적(古蹟)조를 보면 영산폐현(榮山廢縣), 압해폐현(押海廢縣), 장산폐현(長山廢縣) 등 ‘폐현’이란 독특한 표현의 이름들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 나주목 고적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영산폐현은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본래 흑산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 남포에 우거하였으므로 영산현이라 했다. 고려 1363년(공민왕 12)에 군(郡)으로 승격했다가 후에 주(州)에 예속되었다.”라 하였다. 흑산도 사람들이 옮겨와 살았던 곳을 그렇게 불렀다. 다만 왜 옮겨왔는가에 대한 이유는 없다. 그런데 압해폐현을 보면, “주의 남쪽 40리에 있다. … 본래 바다 속의 섬인데, … 왜적에게 땅을 잃고 이곳에 와서 우거하였으므로 압해현이 되었다.”라 하였고, 장산폐현도 “주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 본래 바다 속의 섬으로 … 왜적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이 곳에 와서 우거하여 장산현이 되었다.”라 하여 옮겨온 이유가 왜적 때문이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흑산도도, 물 부족과 같은 나름의 특수한 이유가 있기도 하겠지만, 역시 큰 이유는 왜적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초기의 왕조실록을 보면 흑산도와 연결된 왜구 문제가 간단없이 나오고 있어 이를 짐작케 한다. 흑산도 왜구는 조선중기인 명종 년간에까지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섬 주민들은 왜구 때문에 섬을 떠나 나주목 관할 내로 들어와 한 개의 행정단위를 이루며 살게 되었던 것이고, 그 흔적이 ‘폐현’이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섬을 떠나게 된 직접 원인은 왜구가 제공했지만, 나주로 집단 이주케 한 것은 이른바 공도정책의 결과였다. 따라서 여말선초를 거치는 동안 섬은 한동안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버려진 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조운흘(趙云仡)의 말을 보면, 먼저

    “전라에서 경상에 이르러 바닷길이 거의 이천여리(二千餘里)인 바 해중(海中)에 가히 살만한 주(洲)가 있으니 대청(大靑), 소청(小靑), 교동(喬桐), 강화, 진도, 절영(絶影), 남해, 거제 등 큰 섬이 20이요, 작은 섬은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하오나 다 토지가 비옥하여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거늘 이제 폐하여 자뢰(資賴)하지 않으니 가히 탄식할 일입니다.”

    라 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어염의 이익이 있는 섬이 지금 공도정책의 여파로 버려져 있음을 탄식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오군(五軍)의 장수와 팔도 군관에게 … 대소 해도(海島)로써 그 식읍(食邑)을 삼아 자손에 전하게 하면 오직 장수의 한 몸이 부(富)할 뿐만 아니라 자손 만세에 의식이 남음이 있을 것이오니 사람마다 누가 각각 스스로 싸움을 하지 않으리요.”라 하여 섬을 식읍으로 주어 장수와 군관이 알아서 섬을 지키도록 하자는 건의였다. 말하자면, 섬의 이익을 미끼로 자발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자는 이야기였다. 물론 실현되지는 않았다.

    은 시기에 이색(李穡, 1328~1396)도

    “본국은 삼변이 바다를 끼고 섬에 거주하는 백성이 무릇 백만으로 배질[方]하고 헤엄질함이 그 장기며 그 사람들이 또 경상(耕桑)을 일삼지 않고 어염으로 이를 삼았는데 요사이 이 적으로 인하여 그 거처를 떠나고 그 이(利)를 잃으니 왜적을 원망하는 마음이 육지에 사는 백성에 비하여 어찌 10배에 그치리까 (그러하오니) 일기(一騎)를 달려 조획(條畫, 조목을 세워서 정한 계획)을 받들어 강변에 거민(居民)을 불러 모집하여 반드시 상여(賞與)를 주면 수천의 대중을 일조(一朝)에 가히 얻으리니 그 소장(所長)의 기술로써 그 소원(所怨)의 적인(敵人)을 대적(對敵)케 하면 그 이기지 못할 리가 있겠나이까? 하물며 적을 죽여 상을 얻음은 오히려 어염의 이보다 낫지 않겠나이까”라 하여 당사자 해결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즉 왜구 때문에 섬에서 밀려난 피해 당사자들의 원망을 엮어 선군(船軍)을 재편하여 전투에 임하게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런 제안들이 즉각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다만 이색의 건의는 조선에 들어와서 염간(鹽干)을 무장하여 대처하는 쪽으로 나타났다. 즉 전라도 수군안무사(水軍安撫使)의 통첩에 따라 “도내의 영암(靈巖),나주(羅州),영광(靈光) 등 각 고을의 소금 창고에 소속된 자은(慈恩),암태(巖泰),파지두 (波之頭),완포(莞浦) 등지의 염간(鹽干)으로 일찍이 왜적을 잡은 공로가 있어 공패(功牌)를 받은 사람은 좌우번(左右番)으로 나누게 하고, 공패가 없는 사람은 이름을 써서 초록(抄錄)하여, 적의 변고가 있으면 그들로 하여금 달려가서 변방을 방비하게 하고, 그 변방을 방비한 날수를 계산하여 소금을 공바치는 것을 제해 줄 것입니다.”라고 올린 병조의 계를 왕이 받아들임에 따라 이색의 건의가 뒤늦게나마 실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논의들 속에서 우리는 고려말에 섬들이 버려졌고 섬 주민들이 생업을 잃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왜구의 노략질이 끝나지는 않았고 또 섬도 완전히 빈 섬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섬에 대한 행정은 공백이었을지 모르지만, 섬의 역사가 공백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의 기록을 보면 섬은 여전히 왜구의 노략질 대상이 되고 있었고, 섬의 주민들은 이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 싸우는 중심은 염간들이었다. 몇 예를 들어보자.

    1406년(태종 6)에 암태도에서는 왜선(倭船) 6척이 침략하자, 염부가 2명을 쏘아 죽이고 물리쳤다. 이 염부(鹽夫)에게 왕은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1408년(태종 8)에는 다시 암태도(巖泰島)를 도둑질하던 왜선(倭船) 9척을, 염간(鹽干) 김나진(金羅進)과 갈금(葛金) 등이 쳐서 쫓아버렸다. 나진(羅進) 등 20여 인이 혈전(血戰)을 벌여 적의 머리 3급(級)을 베고, 잡혀 갔던 사람 2명을 빼앗고, 적(賊)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흑산도 앞 바다에서는 관군과의 전투도 있었다. 전라도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 조치(趙菑)가 진무(鎭撫) 김득명(金得明)과 박현우(朴賢祐)를 보내어 왜선 한 척을 흑산 해양(海洋)에서 잡아 12급(級)의 머리를 베었다. 나머지는 모두 물에 빠져 죽었고, 포로가 되었던 남부(男婦) 9명은 다시 빼앗았다.


    이처럼 섬은 결코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행정이 비어있을 뿐이었다. 행정상 공도였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섬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섬에 대한 재입도의 가능성은 여전히 많았다.

    3) 목장의 설치

    이상에서 보았듯이 정부는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지킨다는 뜻으로 섬 주민의 육지 이전, 즉 공도를 추진했다. 그렇다고 정부가 섬이 주는 이익 자체를 송두리째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채택한 것 중의 하나가 목장의 설치였다.

    예를 들면, 1445년(세종 27)에 하삼도(下三道) 도순찰사(都巡察使) 김종서(金宗瑞)가 각지의 목장 적임지에 대해 아뢰는 가운데 “영암군(靈岩郡)의 황원곶[黃原串]은 4천 필을 놓을 수 있는데, 그 거민 4백여 호가 바닷가에 흩어져 살고 있으므로, 사방에 구원(救援)이 없어 해적(海賊)이 두렵사오니, 모두 다 내어보내고 목장을 쌓으소서.”라 하였다. 이 말 속에서 해적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사람 대신 말을 보내 섬을 활용하려는 뜻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또 원래 '목장지도(牧場地圖)'(1663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서 “국가가 목장을 설치할 때 주도(洲島, 섬)에 많이 둔 까닭은 대개 ‘이용하지 않는 땅[不食之地]’을 이용하고자 함이었다.”라 하듯이 선초에 공도 현상으로 이용되지 못하던 섬은 국가의 주요 목장지대로 활용되었다.

    신안군 지역 내에 설치되었던 목장은 지도목장(智島牧場), 임치도목장(臨淄島牧場), 장산도목장(長山島牧場), 자은도목장(慈恩島牧場) 등이 일찍부터 확인된다. 압해도(押海島) 목장은 말 6백 필은 놓을 수 있는 좋은 목장지로 거론되고 있었다. '세종실록' 권110, 세종 27년 10월 경술.

    또 1470년(성종 1)에 사복시(司僕寺) 제조(提調)의 건의에 따라, 그 전 해에 징집했어야 할 말 중 전라도(全羅道)의 3백 54필을 안창도(安昌島),기좌도(其佐島)에 방목하게 하였다. 그리고 암태도도 본디부터 목장은 아니었지만 말을 방목하고 있었다.

    신안군에는 공식적으로 압해도, 자은도, 장산도 등에 5개의 목장이 있었으며 1,059필을 사육했다. 목장의 토지는 나주목사가 관장하고 목마의 관리는 무안군 망운면 목리의 망운목장에 배치된 종육품의 감목관이 맡아왔다. 이 목마는 매년 4월 각 목장마다 2필씩 양마를 선발해서 진상하였으나 진상마필의 수는 일정하지 아니하고 사복시의 지시에 따라 매년 달랐다.


    4) 나주목의 월경지(越境地)로 편입

    '문헌비고'를 보면, “강진에서 영광에 이르는 여러 고을의 지역으로 연해에 있는 것들은 개의 어금잇빨처럼 서로 어긋나서 다 기록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그만큼 행정구역의 편제가 복잡하고 특이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신안의 섬들은 일목요연하게 그 행정편제의 변화상을 정리하기가 어렵다. 여기서는 주로 신안의 섬들이 ‘나주제도(羅州諸島)’라는 이름으로 나주목의 월경지로 편입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섬이 삶의 공간으로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왜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군대가 해야 할 일이었고, 그 중심은 우수영에 있었다. 그런데 우수영은 왜구의 강한 정도에 반비례하여 내륙으로부터 서남해 바닷가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해남의 우수영에 자리잡으면서 사실상 왜구에 대한 제압도 완료되었다. 그 이동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해남의 황원곶 곧 지금의 우수영자리에 전라수영이 자리잡는 것은 1440년(세종 22)이었다. 그때까지 우수영은 위치도 바뀌었고 지위도 변동이 있었다. 그 처음은 1397년(태조 6) ‘나주땅 목포’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그 후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 것처럼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 제도가 생겼고 그 본영을 대굴포(大堀浦)에 두어 전라좌·우도의 도만호를 지휘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굴포의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은 바다로부터 너무 깊숙이 올라와 있어 유사시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곳이 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1432년(세종 14) 수영을 옮기는 일이 거론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전라도 수영을 극포영(極浦營) 부근으로 추정되는 목포로 옮기고 목포 병선을 황원(黃原) 남쪽의 주량(周梁)으로 옮겨 정박케 하도록 아뢰었고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440년, 전라수영이 황원, 즉 지금의 우수영 자리로 옮겨져 자리잡았다.

    이런 이동 속에 서남해안의 군현이나 관방들은 혼돈의 와중에서 벗어나 안정되어 갔다. 그 상징적인 시점은 1419년(세종 1) 왜구의 소굴로 지목된 대마도를 정벌한 기해동정(己亥東征)이었다. 동정의 결과 대규모의 왜구는 사라지고 왜구가 상왜(商倭)나 객왜(客倭) 등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였다. 기해동정은 왜구를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서남해 연안의 군현들은 현재의 위치에 안착하였고, 연해 관방들도 정비되었다. 진도의 예를 들면, 진도읍성이 1437년(세종 19), 금갑진성이 1431년(세종 13), 남도진성이 1438년(세종 20)에 완성됨으로써 1438년경이면 주요 관방시설이 모두 완료되었다.

    군사의 정비와 발맞추어 한동안 행정공백지대였던 신안 섬의 행정체제도 정비되어 갔다. 그런데 그 결과는 좀 특이하다. 즉 나주 및 영광의 월경지(越境地)로 편입되었다. 월경지란 경계 밖의 관할구역을 말한다. 영광의 월경지는 인접군이니까 그렇다치더라도, 왜 신안의 대부분 섬들이 한참 떨어져 있는 나주의 월경지로 편입되었을까? 그 이유와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정부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지방조직도 점차 중앙집권적인 방향으로 개편하면서 복잡했던 고려의 군현제를 일원화시켰다. 그 결과 속현, 향·부곡·소, 장(莊)·처(處) 등이 분리·독립되거나 주(主) 군현의 면리로 정리되어 나갔다. 특히 전라도는 다른 도에 앞서 1409년(태종 9)에 전라도 감사 윤향(尹向)의 건의에 따라 도내(道內)의 임내(任內)를 혁파하였다. 따라서 나주목의 속현과 향·부곡·소도 당연히 소멸되면서 나주목의 일부가 되었다. 이때 그 속현 중에 압해현과 장산현, 그리고 흑산도와 연계된 영산현 등이 있었고, 그런 연유 때문에 나주목의 경계 밖에 멀리 떨어져 있는 신안의 섬들이 나주목에 월경지로 편입되었다. 한편 영광군에는 임치폐현(臨淄廢縣)과 육창향(陸昌鄕)이 있어 그 소속 섬들이 역시 마찬가지로 영광군의 월경지가 되었다.

    다만 그 섬들이 나주 및 영광의 월경지로 편입된 사정은 조금씩 달랐고 또 편입되는 방법도 달랐다.

    이들 지역이 이른바 월경지로 편입되는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군현의 영속관계에 변동이 생김에 따라 월경지로 남는 경우다. 즉 속(屬) 군현이나 향·부곡·소 등이 분리·독립해 가는데 분리·독립된 구역 안에 여전히 주 군현의 지배를 받는 어떤 지역이 있다면 그 지역은 자연히 경계를 넘어서 있는 땅이 돼버린다. 무안현이 분리·독립하자 장산현이 월경지가 된 경우가 그런 예이다.

    둘째, 과거의 연고 때문에 월경지가 되기도 한다. 고려말 왜구로 인해 섬이나 연해의 군현이 내륙으로 출륙하여 임시로 살았는데 훗날 돌아간 뒤에도 계속 그 연고에 따라 돌아간 그 곳을 소유함으로써 월경지가 된다. 흑산도와 압해도, 그리고 임치현과 육창향이 그런 예였다.

    그리고 셋째, 지방행정 내지 경제적 필요 때문에 생긴 월경지가 있다. 관아운영이나 사객의 접대에 필요한 물자, 공물, 진상품은 가급적 자체 내에서 조달하는 것이 편리하였는데, 나주는 어염과 같은 물자조달을 위해 서남해의 여러 섬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주에게 여러 섬들을 관할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상 월경지가 생기는 이유 세 가지를 들었지만, 이는 모두 섬이 월경지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그 까닭에 나주의 중요 월경지는 곧 도서지방, 섬들이었다. 도서 이외에 한말까지 나주의 지배를 받았던 월경지로는 무안군 삼향면(務安郡 三鄕面)과 목마장이 있는 무안군 망운(務安郡 望雲)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나머지 섬들은 영광군의 월경지로 부속되었다. 지금 신안군 일대의 여러 섬들은 그런 인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주로 ‘나주제도(羅州諸島)’라 불린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주목의 관할 지역이 나오는데, 3개의 군, 8개의 현과 함께 4개의 해도가 있다.

    그 해도는 자은도(慈恩島),압해도,암태도(巖泰島),흑산도 등이다. 나주제도가 다시 그 안에서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임치도, 피금도(被錦島, =飛禽島), 도사도(道沙島, =都草島)는 영광군에 속하였다. 그러다가 '동국여지승람' 단계에 오면 현재의 신안군 섬들이 거의 전부 나주목으로 소속된다. 이 '동국여지승람' 이후 소위 나주제도로서의 이들 신안지역 도서들은 거의 커다란 변화 없이 조선시대 전기간을 나주목의 관할지로서 부속되어 있었다.

    나주에 부속된 섬들의 수는 시기마다 차이가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에는 4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는 32개,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년)에는 36개,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에는 33개, '대동지지(大東地志)'(1865년)에는 42개, 그리고 '호남읍지(湖南邑誌)'(1871년) 중 제1책 「나주」 「도서」에는 52개로 되어 있다.

    당연한 현상이지만, ‘나주제도’의 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났다. 1733년(영조 9), 호남의 연안에 읍진 설치가 논의될 때 대상이 되었던 섬들은 “금성(錦城)의 대양(大洋)에 일흔 두 개의 섬이 있다.”는 말처럼 모두 72개였다. 그 수는 나주제도 플러스 알파였던 셈이다.

    이런 제도상의 정비와 맞물려 섬에 대한 정부의 파악의지도 커갔다. 1444년(세종 26)에 가면 주목할만한 기사가 보인다. 세종이 전라도관찰사 이맹진(李孟畛)에게 전라도와 제주 사이의 섬들에 대한 조사를 명하는 내용이 있다. 거기서는 섬의 갯수, 뱃길 형편, 내왕의 편의성, 육지와 섬 및 섬 사이의 거리, 소산물 등 상세한 형편을 조사하게 한다.


    이는 행정의 정비에 따른 당연한 조치였지만, 왕이 직접 섬에 대한 파악의지를 보일만큼 정부의 관심이 높았다는 뜻이고, 동시에 섬에 대한 행정이 정비되어 간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편, 행정이 정비되어 가는 중에 목장의 감독권도 바뀐다. 원래 목장의 감독권은 왕의 가마와 말외양간과 목장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사복시(司僕寺)라는 관부에서 배치한 감목관(監牧官)에게 있었다. 세종 때에 들어서면 이런 감목관을 혁파하고 각 목장의 감목 기능을 그 지방 수령이나 만호가 겸하도록 하는 조치가 내린다.

    그 중 관련된 내용을 보면, 1436년(세종 18)에 지도(智島) 목장은 함평현감이, 임치도(臨淄島) 목장은 우도도만호(右道都萬戶)가, 장산도 목장은 주량도만호(周梁都萬戶)가, 자은도(慈恩島) 목장은 다경포(多慶浦) 만호(萬戶)가 각각 겸하도록 하였고 해당 감목관은 모두 혁파하였다. 다만 장산도 목장은 1445년(세종 27)에 거리상의 이유를 들어 목포 천호(千戶)가 겸임하게 바뀌었다.

    또 이듬해에 압해도 목장은 나주 판관이 겸임하게 하였다.

    섬에 대한 행정은 이렇게 정비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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