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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중기 신안 섬들의 동향 신안문화원 2006/3/23 4224


    조선중기 신안 섬들의 동향

    1) ‘잠입자(潛入者)’의 증가와 추쇄(推刷) 정책간의 갈등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섬에 대한 행정은 공백이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 공백을 유리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살았다. 먼저 행정이 없다는 것은 국역부담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도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조세(租稅)와 요역(徭役)이 없는 것을 즐겨하여 많이 가서 살았습니다.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둔 뒤로는 그 요역과 방수(防戍)의 노고를 싫어하여 도로 다시 도망해 흩어져서 남은 백성이 매우 적습니다.”라 하듯이 국역 부담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았다. 이는 다른 섬도 마찬가지였다.

    제도는 어느 정도 정비되었지만 아직까지 행정력이 확고히 미치지 못한 상황에서 국가는 육지의 주민들이 섬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는 곧 재정원의 상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조 때에도 전라도의 도서잠입자(島嶼潛入者) 쇄환(刷還)에 대한 의논(議論)이 있었다.

    그런데 그 논의 과정에서 도진무(都鎭撫) 심회(沈澮)의 말을 보면, “바닷가 연변(沿邊)의 백성이 여러 섬에 도망해 들어가서 혹은 고기를 낚고 소금을 굽는 것으로 직업을 삼는 자도 있고, 혹은 농사(農事)로 생활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내왕하면서 장사하는 자도 있다고 하여 이미 여러 가지 이유로 섬에 많은 주민들이 들어가 살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이들은 추쇄하라는 명령이 내리면 돌아오기는커녕 “가족(家族)을 데리고 사람이 없는 섬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조금 늦추어지면 돌아오기도 하고, 혹은 영구히 돌아오지 아니하는 자도 있다고 할만큼 섬에 눌러 살려는 의지가 강했다.

    반면에 국가는 섬 주민을 기본적으로 도망자 즉 죄인으로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군역(軍役)에서 탈루(脫漏)될 뿐만 아니라, 만일 적변(賊變)이 있게 되면 구원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돌아오게 하려 하였다. 이런 국가의 쇄환의지도 결코 작지 않았다. 성종 때에는 사목까지 만들어 도익해도인(逃匿海島人)을 추쇄하려 하였다. 그 사목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여러 섬에 숨은 사람은, 수령(守令)과 만호(萬戶) 중에서 택정(擇定)하여 추쇄(推刷)하되, 만일 그 전처럼 다른 섬으로 가서 숨기를 꾀하는 자는 여러 진(鎭)이나 여러 포(浦)의 군인을 알맞게 동원하여 도별(道別)로 나누어 체포한다.

    1. 수령,만호 등과 감고(監考),색장인(色掌人) 등이 나라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숨은 사람을 색출하는데 마음을 쓰지 않았다가 뒤에 나타나게 되면, 수령과 만호는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단(論斷)하고 감고(監考),색장(色掌)은 전가 사변(全家徙邊)한다.

    1. 순종인(順從人)은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을 구분하여 조처하고, 만일 전에 도피한 자나 항거한 자, 그리고 우두머리는 참(斬)한다.

    1. 모든 섬에서 잡은 사람은 각각 본고장으로 돌려보내되, 그 중에 괴수(魁首)들은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가두고 계문(啓聞)해서 구처(區處)한다.

    1. 쇄환(刷還)한 뒤에 수령과 만호가 규검(糾檢)하지 못하여 도로 숨게 한 자는 사유(赦宥) 전을 막론하고 본인은 파출(罷黜)시키며, 전가 사변(全家徙邊)한다.”

    그 와중에 권력을 이용하여 섬을 개간하고 거기서 이득을 취하는 자들도 벌써 나타났다. 예를 들면, 1481년(성종 12)에 전라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심정원(沈貞源)이 경작이 금지되어 있는 외딴 섬을 함부로 개간하여 우후(虞候)로 하여금 군졸을 이끌고 수확하게 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은 군졸이 군장(軍裝)을 갖추지 않고 수확하다가 우후와 군졸 2인이 왜적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문제가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묻혀져 있었을 법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런 유형의 개간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1516년(중종 11)에도 “절도(絶島)에서 밭을 일구지 못하게 하는 일은 전에 금령이 있었으니”라 하여 그 일을 거론한 것은 그만큼 그런 일이 계속 진행 중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해산물을 채취하러 흑산도에 들어갔다가 왜적을 만나 배가 불태워지고 피살되는 사건이 나자 ‘먼 외딴 섬’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
    ‘먼 외딴 섬’이란 말로 금지대상을 제한하였던 데서 연안의 가까운 섬은 어느덧 금지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래저래 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었다. 또 국가의 쇄출령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전라도의 외딴 섬에 사는 백성들은 대신과 병조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여 조종조의 전례를 고찰해 보고 엄격하게 절목을 세워 모조리 쇄출(刷出)하도록 하라."는 1554년(명종 9)의 전교가 그런 예다.

    왜구가 물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큰 위협은 사라졌다. 반면에 국가의 행정력은 아직 확실히 미치지 못하여 각종 부담으로부터 자유롭다. 섬은 그런 상태였다. 따라서 백성들은 섬을 찾았다. 그러나 국가의 입장에서 이는 국역담당자의 상실이었다. 따라서 도서잠입자쇄환의(島嶼潛入者刷還議), 도익해도인추쇄논의(逃匿海島人推刷論議), 금경절도(禁耕絶島) 등의 형태로 계속 막았다. 이것이 조선 초․중기의 일반적인 사정이었다. 그래서 섬은 국가와 백성간의 갈등공간으로 남았다.

    2) 도적,수적(水賊)의 활동무대

    이런 갈등상태를 증폭시킨 것은 도적들의 활동이었다. 1435년(세종 17)에 가면, “암태도에 그대로 내버려둔 도적은 많은데도 감수(監守)하는 사람이 적으므로, 점차 당류(黨類)를 만들어 소와 말을 훔쳐 잡아먹고, 그 감수하는 사람까지 죽이고자 하니 매우 염려됩니다.”라는 형조의 보고처럼 신안의 섬에는 도적들이 있었고, 이들은 당류를 만들어 장차 해구(海寇)가 될 위험한 존재들로 파악되고 있었다. 그리고 연변 고을에 나누어 둔 관노들이 섬으로 도망가면 곧 도적이 되는지라 이들의 처자들을 모두 그 가족과 한 곳에 모아서 공한(空閑)한 토지를 주어 그 생업을 안정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게 한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적도들이 이미 백성 김득계(金得戒)의 작은 배를 타고 나주의 압해도로 가버렸습니다.”라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도적들은 드러내 놓고 횡행하였다. 그리하여 수군절도사와 여러 포구의 만호에게 이문(移文)하여 해도(海島)를 수색하여서 체포하게 하고, 또 연변(沿邊)의 모든 고을로 하여금 하륙(下陸)할 만한 곳에 복병을 두어 살피게 하는 등 대비에 분분하였다.

    적도들은 수적이란 이름으로도 돌아다녔다. 그들은 “본도[전라도]의 수적은 거도선(居刀船)을 타고 왕래하면서 도둑질하는데, 그 빠르기가 나는 듯하기 때문에 잡기가 매우 어렵습니다.”고 말할 만큼 신속하게 이동하였다. 그들의 뱃길은 영산강과 신안의 섬들을 잇는 길이었고 장물(臟物)은 장문(場門)에서 처분할 수 있어 도둑질이 더욱 용이하였다.

    이런 수적은 “단지 나주,영암 등지에만 흥행(興行)한다."거나 “영광,함평,무안,나주 등지에서는 수적이 일어나 다니는데 그 무리가 지극히 많아서 바닷길에 내왕하는 배가 살략(殺掠)을 많이 입었다.”거나, 또 “영광 어을외도(於乙外島),병풍도(屛風島),증도(甑島),모야도(毛也島),고이도(古耳島) 등지는 하삼도(下三道)의 배가 모두 이 땅을 경유하기 때문에 수적이 많이 엿보고 있다가 틈을 타서 겁략(劫掠)합니다.”라거나 하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 전라도의 영산강과 영암에서 영광까지 이르는 서남해권이 무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독려해 잡게 하면 도적이 도망쳐서 절도(絶島)로 들어갑니다. 섬에 사는 사람이 만약 수적을 만나면 다투어 술과 음식으로써 맞이해 위로하여 침략을 면하기를 바라니, 이로 말미암아 날마다 더욱 번성하여 기탄하는 바가 없으므로 바닷가 고을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라는 지적처럼 이들 수적의 근거지는 영산강과 맞닿아 있는 신안의 섬들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전라도에 수적이 점점 성하여 여러 섬에 사는 백성이 하나도 없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사실상 수적이 섬에 숨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수적의 근거지는 신안의 섬들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섬은 불량한 공간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3) 왜구의 동태와 섬 주민의 동향

    1555년(명종 10, 을묘) 달량진(達梁鎭) 왜변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주무대가 영암 일대였고 또 해남이 함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서쪽에 있던 신안의 섬들은 직접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향이 없을 수는 없었다. 왜변이 있던 그해 10월에 홍문관 부제학 윤춘년(尹春年) 등이 올린 차자를 보면,

    “왜노(倭奴)의 환란(患亂)이 금년에 터졌는데 뜻하지 않은 때를 틈타 일어났으므로 아주 참혹하였습니다. 민심이 경동하여 의심하지 않는 일이 없어 왜구들이 흑산도에 들어와 산다고도 하고 초도(草島)에서 보리를 심는다고도 하며, 심지어는 대장간을 세우고 철환(鐵丸)을 만든다고 하기도 합니다. 또 몰래 강진(康津) 땅에 들어와 말을 도둑질해 갔다는 말이 민간에 전파되어, 조금도 안거(安居)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쌀을 쪄서 떠날 대비를 하기도 하고 짐을 꾸려 놓고 도망할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라 하여 민심이 경동하여 각자 도망칠 계획을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만큼 달량진 왜변은 비교적 안정되었던 섬 주민들의 생활을 다시 한번 크게 흔들어 놓았다. 이렇듯 여전히 연해 및 섬 백성들의 생활은 불안하였다.

    여기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던 것은 물론 임진왜란이었다. 특히 정유재란을 기점으로 바다의 왜적을 피해 섬 주민들은 또다시 섬을 등졌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육지의 왜적을 피해 육지를 떠나 섬으로 피난 오는 대열도 있었다. 이들간에 교대현상이 일어났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앞서 살던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농지를 개간하여 삶의 터전을 닦았다. 그들은 섬에 정착함으로써 그곳에 혈족적 기반을 만들었다. 이런 공백을 새로이 메워나간 이주민들이 바로 오늘날의 주민과 직접 연결되는 입도조의 첫 부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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