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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안지역의 선사문화 신안문화원 2006/3/23 5555


    신안지역의 선사문화


    1. 머리말

    신안지역은 전남 서남부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수많은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1954년에 국립중앙박물관팀이 중심이 된 서해도서조사팀이 처음으로 대흑산도 패총과 지석묘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1966~67년에는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주관으로 남해도서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면서 하태도, 가거도패총을 비롯하여 많은 유적이 조사되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임자도와 압해도의 선사유적이 조사되었다. 1980년대에는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정밀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성격이 일차적인 정리되었다. 그밖에 압해도 복룡리유적에 대한 추가 조사가 이루어져 다량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신안지역의 선사문화를 밝히는 작업은 아직도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지금까지 비교적 많은 지표조사가 이루어진 편이나 아직까지 정식 발굴조사를 거친 유적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진 유적을 중심으로 그 성격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신안지역의 선사문화를 구석기문화, 신석기문화, 청동기문화, 철기문화, 그리고 고분문화 순으로 살펴본다.


    2. 시대별 문화양상

    1) 구석기문화

    아직 구석기문화의 성격은 파악되지 않으나 그 존재는 알려지고 있다. 즉 압해도 동서리, 학교리, 복룡리 등지에서 구석기유물에 이헌종교수(목포대 역사문화학부)에 의해 채집되었다. 이들 유물은 석영제의 석기로, 여러면 석기, 찍개 등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식 학술조사에 의하여 층위적으로 확인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다. 다만 최근 영산강유역의 나주, 영암 등지에서 구석기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20 개소에서 구석기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주로 몸돌, 격지, 찍개, 여러면 석기 등이 수습되고 있으며 이들은 전형적인 찍개문화의 정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최근 함평 장년리 당하산유적에서도 구석기유물이 신석기층 아래에서 발견되고 있어, 앞으로 압해도를 비롯한 신안지역에서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구석기문화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신석기 문화

    신안지역에서 신석기유적이 발견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며 대흑산도 패총을 시작으로 하태도 패총, 가거도 패총, 우이도 패총, 어의도 패총 등이 있다. 아직 이들 유적이 정식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적은 없으며 간헐적인 지표조사에 의해 그 성격이 알려지고 있다. 처음 신석기유적이 발견된 당시는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의 성격이 서해안지역과 관련이 많으며 시기적으로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한다고 추정되었다. 그러나 그 후 이들 유적에서 발견되는 유물중에서 서해안보다는 남해안 지역과 관련된 요소들이 발견되었다. 즉 이중구연(二重口綠),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 입인문토기(押引文土器) 등이 있다. 이들 토기의 존재로 보아 신안군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남해안지역의 신석기문화와 관련이 되고, 연대도 신석기시대 전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게 되었다.

    일본인 소원철(小原哲)은 전남지방의 신석기토기를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 이외에 A~F류로 분류하면서 그 문화의 양상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즉 초기에 있어서는 한반도에 퍼진 융기문토기가 있고, 전기에는 구연부에 압날문, 자돌문 압인문을 시문하여 지역성이 농후한 토기가 나타나며 제주도 고두기 유적의 자돌열점문토기(刺突列點文土器)도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았다. 중기에서 후기에 있어서는 침선문계(沈線文系)의 토기가 분포하는데 중기에 비정되는 침선에는 경남지방의 태선문(太線文)수법이 발견되지 않아 중부지방과의 관련성을 상정할 수 있으며 만기가 되면 경남지방과 동일계통의 토기가 분포하여 이 지역의 독자성이 희박하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전남지방의 신석기문화를 새롭게 해석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으나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먼저 융기문토기를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무조건 조기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중부지방에서는 융기문토기의 존재가 불확실하며 경남 남해안지역을 제외하면 융기문토기가 조기로 설정될 근거가 없다. 다음은 전남지방에서는 아직 발굴된 신석기 유적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융기문토기의 존재로만 조기를 설정한 것은 선입관에 의한 성급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신안군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전남지역에서 최초로 발굴조사된 여천군 송도패총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같이 경남 남해안지역과의 관련성이 더욱 높아진 것은 분명하며 신석기시대의 상한도 중기 내지 전기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높아 졌다. 앞으로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굴된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해결될 것으로 기대한다.

    3) 청동기문화

    청동기문화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유적으로 지석묘가 있고, 유물로는 무문토기와 석기들이 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 동북아시아 중에서 한반도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지석묘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가 전남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며 약 2만 여기가 넘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지석묘는 서해안, 남해안과 영산강 및 섬진강유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앞으로 정밀조사가 이루어지면 그 수가 더욱 늘 것으로 보인다.

    신안지역에서 발견된 지석묘는 140여기로 그 형식은 남방식에 속하며 상석의 장축방향이나 군집의 방향이 대체로 주위의 자연환경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이들 지석묘의 성격을 쉽게 단정할 수 없으나 서해안지역에 자리잡은 지석묘의 사용인이 이곳 도서지방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견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이 시기의 독특한 석기들이다.

    안좌면 방월리에서 발견된 석기 중에서 유구석부는 장대형으로 전남 지방에 한정되어 발견되고 있는데 이 형식은 승주 서면 월곡리, 장흥 장흥읍 우목리 등에서 발견된 바가 있다. 또한 편평단인석부는 측면에 흠이 있는 것으로 같은 형식이 나주 노안면 영평리에서 발견된 바 있고, 상․하단이 분리된 양인석부는 압해면에서 3점이 수습되었고, 비금면에서도 1점이 출토되었는데 나주 반남면 덕산리, 함평 월야면 주림리, 담양 봉산면 제월리, 화순 동면 무포리 등지의 내륙에서 발견된 바 있다. 따라서 신안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전남지역의 나주․장흥․영암․해남 지역과 관련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압해 복룡리유적은 유구석부 19점, 마제석부 8점, 대패날 2점 등을 비롯하여 60여 점의 석기와 많은 미완성 석기들이 출토된 석기 제작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을 통해 석재(石材)의 선택으로부터 석기의 제작과정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가 한 점도 발견된 바가 없어 청동기시대 후기의 문화를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임자도패총이나 하태도패총에서 점토대토기편이 수습된 바가 있어 앞으로 청동기가 발견될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4) 철기문화

    철기문화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패총만 3개소 알려져 있으며 토기편을 제외하면 별다른 유물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남지방의 철기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으로 최근 발굴된 해남 군곡리패총이 있다. 이 유적은 바로 바닷가에 위치하며 과거 중국과 일본까지 형성된 해상 통로의 중간 기착점으로 보이는데 이 유적을 통해 보면 어느 정도 당시의 문화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군곡리패총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로부터 고분시대에 이르는 시기가 퇴적층으로 단절 없이 나타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유적이다. 즉 철기문화는 적어도 기원전 2세기 후반 내지 1세기초에 시작되었으며 초기에 사용되는 토기는 무문토기에서 발전된 경질무문토기이며 이것이 타날문토기로 바뀌는 것은 철기문화가 어느 정도 발전된 이후이다.

    철기문화에는 청동기문화와 다르게 철기가 일반화된 것 이외에도 토제품, 골각기, 장신구 등이 발전되었으며 대외적인 접촉의 결과로 보여지는 화천(貨泉, 중국 新나라의 화폐), 복골(卜骨, 개인의 흉복을 점쳤던 유물)과 같은 유물도 존재하였다. 당시 사회는 이 지역에 한정된 토착적인 사회가 아니라 타 지역과의 활발한 관계를 가졌던 사회임을 추정할 수 있고, 이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 동물뼈 및 대형 낚시 등으로 보아 생업은 농경이 중심이지만 수렵이나 연안어업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조사된 이 시기의 유적으로 광주 신창동유적, 치평동유적, 보성 금평패총 등 영산강유역뿐만 아니라 전남 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옹관고분이 출현하는 3세기 말 이전의 문화양상을 짐작하게 한다.

    신안지역에서는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진 철기시대의 패총을 통해보면 대체로 타날문토기와 함께 무문토기가 발견되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해남 군곡리패총에서 보이는 철기시대의 경질무문토기도 있다. 또한 타날문토기의 존재를 통해서도 철기문화의 존재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더구나 해상통로 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시대의 유적이 더 많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의 역사적인 배경은 삼한(三韓) 중의 마한(馬韓)에 해당한다. 마한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 광범위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신안지역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5) 고분문화

    전남지방에서 발견되는 고분에는 대형옹관묘(옹관고분)와 백제계 석실분으로 나누어진다. 신안군에서는 백제계 석실분이 많이 확인되는데 비해 대형옹관은 파편만 발견될 뿐 옹관고분은 확인되지는 못하였다.

    옹관고분(甕棺古墳)은 3세기 말경에 시작하는데 영산강유역인 나주시, 영암군, 무안군, 함평군, 영광군, 해남군, 강진군 등지에서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 묘제는 다른 지방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옹관고분은 대부분 큰 봉토 속에 여러 기의 옹관을 안치하고 있는 지상식으로 분구의 형태는 원형 이외에도 방대형, 장방형 등이 있다.

    이 무덤은 5세기 후반에는 점차 쇠퇴하나 6세기 전반까지 지속되었다. 신안지역에서는 옹관고분이 발견된 예는 없으나 발견된 옹관편으로 보아 옹관고분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옹관고분의 성격을 단순히 백제시대의 고분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영산강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독특한 무덤이고, 백제적인 요소도 극히 적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무덤은 이 지역의 토착적인 세력들이 남긴 무덤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어서 등장되는 석실분(石室墳)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에 속하는 석실분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에 축조되는 데 분구의 축조가 옹관고분의 전통을 가진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전방후원형 고분(前方後圓形 古墳 혹은 長鼓墳)이 출현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고분들은 백제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토착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후기 석실분은 백제가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한 이후에 나타나는 백제계 석실분을 말하는 데 장산면 도창리에서 확인된 것을 비롯하여 안좌면 읍동리나 비금면 광대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전남지방에서 조사된 백제계 석실분은 많지 않다. 즉 일제시에 조사된 나주 흥덕리석실분이 있고, 1973년에 우연히 발견된 해남 월송리 조산고분, 1978년에 발굴된 나주 대안리고분이 있으며, 1984년에 조사된 장성 영천리고분이 있다. 그밖에 최근 조사된 나주 복암리고분, 무안 인평고분군 등이 있다.

    백제계 석실분은 그 형식이 매우 다양한데 전남지방의 석실분은 횡혈식 석실분 중에서 평석천정식(平石天井式)에 속한다. 평석천정식에는 다시 맞조림식, 괴임식 및 사벽수직식이 있는데 해남 월송리고분과 장성 영천리고분은 맞조림식에 속하고, 장산 도창리고분은 괴임식에 속하며, 나주 흥덕리와 나주 대안리고분은 사면수직식에 속한다.

    이들 각 형식간의 선후관계는 부여지방과 공주지방의 석실분 연구에 바탕을 두어 맞조림식에서 괴임식으로 발전되었고, 사면수직식은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연대적으로는 이들 고분이 모두 백제가 공주나 부여로 천도한 이후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5세기 말 이후의 것으로 보고 있다. 장산 도창리고분의 경우 대체로 6세기 중엽에서 7세기초에 축조된 것이다. 이와 같이 백제계의 석실분이 장산면과 같이 도서지역에 어떻게 분포하게 되었을가 하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이것은 백제가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에 앞서 백제로부터 일본에 이르는 해상루트를 먼저 장악하였을 것이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3. 맺음말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신안군을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의 문화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문화의 성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구석기문화는 일부 지표조사에서 확인되고 있으나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며, 신석기문화의 경우 전남지방의 대부분의 유적이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신석기문화는 종래 서해안지역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았으나 지금은 남해안의 신석기문화와 관련이 깊고 그 연대도 신석기 중기 내지 전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많아졌다. 청동기문화로 확인된 유적과 유물이 지석묘와 석기류에 지나지 않아 그 성격을 구명하는데 한계가 있으나 대체로 지석묘 축조인들은 전남의 서해안지역에서 도서지역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석기류에 있어서는 유구석부, 편평단인석부, 단이 있는 양인석부 등 전남 내륙지방의 석기들과 관련이 많고 그 유입시기는 전남지방에서 석기가 활발하게 제작될 당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철기문화의 성격은 아직 분명하게 파악 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패총유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해남 군곡리패총에서 알 수 있듯이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 지역은 해안통로 상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유적이 많이 분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분의 경우에는 아직 대형옹관묘(옹관고분)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수습된 유물을 통해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백제계의 석실분은 다수 확인된 바가 있는데 특히 장산 도창리고분은 전남지방에서도 대표적인 괴임식 석실분으로 그 중요성이 인정된다.

    이상과 같이 신안지역의 선사문화는 그 유적의 수가 많고 비교적 일찍부터 알려진 편이나 아직까지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앞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선사사대의 문화양상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내륙지역뿐만 아니라 도서지역도 최근 국토개발의 미명하에 많은 유적이 훼손될 처지에 놓여 있다. 가능한 한 이들 유적들은 보존되어야 하고,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을 위한 사회교육의 자원이나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만약에 개발에 의해 피치 못하게 훼손되어야할 유적이 있다면 사전에 철저하게 학술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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