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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대의 신안군 신안문화원 2006/3/23 6159


    고대의 신안군

    신안군은 한반도의 최서남단에 점점이 뿌려진 83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유인도 82개, 무인도 749개)로 이루어진 군이다. 이러한 입지상의 특성 때문에 신안군은 영산강 하구와 서남해의 먼 바다를 연결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서남부와 중국 동해안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와 같은 형세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육로 교통보다 해로 교통이 우세하던 먼 고대의 시대일수록 신안군의 도서지방은 영산강과 서남해의 바다를 통로로 하여 영산강유역의 연해권과 연결되면서, 또 한편으로 중국과 한반도 사이를 연결해 주는 문화교류의 가교로서 중시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를 염두에 두면서 신안군 고대사회의 특징을 개괄해 보려 한다.

    1. 선사,고대 서남해 도서인들의 삶

    서남해 도서지역에 처음 사람이 살았던 것은 언제부터일까? 선사,고대인들의 삶의 흔적을 추적하는 작업은, 문헌 자료가 거의 없는 관계로 고고학적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면 신안군 일대의 도서지역에는 구석기시대 이래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구석기시대인의 삶의 흔적은, 압해도 일대에 대한 최근의 지표조사에서 구석기 중,후기에 보편화된 자갈돌석기 전통의 찍개나 몸돌류가 발견되면서 처음 확인되었다. 최근 이헌종교수(목포대 역사문화학부)의 압해도 조사 결과 확인되었다.

    따라서 신안군 도서지역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일단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구석기시대인들이 신안군의 도서지역에 널리 퍼져 살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고, 아마도 극히 일부의 큰 도서에서만 살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거론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지만, 구석기시대에 조성된 패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일단 어로생활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그들은 섬의 야산에서 수렵이나 채집을 통해 삶을 영위해 갔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서남해의 도서 일대에 사람이 널리 확산되어 살게 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시대인들의 삶의 흔적은 주로 패총유적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신안군 일대에서 확인된 신석기시대의 패총으로는 대흑산도,소흑산도(가거도),하태도,우이도,지도읍 어의리 등지에서 조사된 것들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 패총유적에서 즐문토기편을 위시로 하여 이중구연편,압인문토기,융기문토기,단도마연토기 등에 이르기까지 신석기시대 중기 이전 시기의 토기들이 출토된 바 있다. 이처럼 패총유적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인들은 그들의 삶의 영역을 바다로 확대하여 어로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하면서, 도서 일대에 널리 퍼져 살게 되었던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면 서남해의 도서인들은 바다로 삶의 영역을 확대한 전대인(前代人)들의 어로생활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가는 청동기시대 어로생활의 흔적을 보여주는 패총은 임자면 구산리, 압해면 대천리, 흑산면 하태도 등지에서 조사되었다.

    한편 섬을 개간하여 농경생활을 개시하고, 육지와의 문화 교류를 시작함으로써 삶의 질을 더욱 높여갈 수 있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지석묘가 신안군 전역에서 분포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발전적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신안군의 지석묘는 지도,임자도,증도,압해도,안좌도,장산도,하의도,흑산도 등지에서 35군데 142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남 일대가 지석묘의 세계적 밀집지역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서남해 도서지역이 전남지방 지석묘사회의 일부 혹은 연장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점에서 추후 서남해 도서지역의 지석묘 조사와 그 의미 천착이 더 정밀하게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철기시대에 이르면 서남해 도서인들의 어로생활과 철기시대 어로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패총유적이 임자면 대기리와 삼두리, 하의면 어은리, 증도면 갈마도 등지에서 6개소가 조사된 바 있다.

    농경생활은 또 한 단계의 발전을 이룩하고, 바다와 영산강의 수로를 통해 영산강유역의 연안지역과 더욱 활발한 문화교류를 전개해 갔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조에 의하면, 1~3세기에 중국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연안 해상 교역이 활성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 있는 관련기사는 다음과 같다. ‘(낙랑,대방)군으로부터 왜에 이르는 경로는 다음과 같다. 군에서 해안을 따라 가다가 한국(韓國)을 거쳐 다시 남쪽과 동쪽으로 잠시 가다 보면 그 북쪽 해안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거리가 7천여리이다. 여기에서 처음 바다를 건너 1천여리 가면 대마도에 이르게 된다.’

    그 때 서남해안이 연안 항로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었으리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한반도 서남해 연안항로의 중심 거점은 해남군 백포만 일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일대의 군곡리패총에서 발견된 신나라의 화폐 화천(貨泉)은 당시 연안 해상교류의 유력한 증거물로 볼 것이다.

    서남해안 육지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인근 도서지역에 대한 선진 문물의 배급자로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관계는 3세기 후반 이후 영산강유역권에 옹관고분을 지배층의 공통 묘제로 썼던 단일의 정치연맹체(‘옹관고분사회’)가 결성됨에 이르면, 영산강유역 정치세력의 도서지역에 대한 지도적 위치는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현재 서남해 도서지역에서 옹관고분의 확실한 흔적을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일부 옹관편이 수습되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추후 조사의 진전에 따라서는 신안군의 도서지역 역시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2. 백제의 서남해 도서지역 편제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지방으로 편제하여 완전 지배한 시점은 6세기 중반 이후였다. 영산강유역을 완전 지배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백제는 지방제를 담로제에서 ‘방(方)-군(郡)-성제(城制)’로 개편․정비하였다. 전국을 5개의 광역행정구획인 5방(동,서,남,북,중방)으로 나누어 편제하였고, 각 방을 다시 기초행정단위인 군과 성으로 나누어 편제하였던 것이다. 전남지방은 남방의 관할지역으로 편제되었고, 서남해 도서지역은 남방을 구성하는 기초행정단위로 편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엽 경부터 전형적인 백제 사비양식의 횡혈식석실분이 전남 내륙지방은 물론이고 도서지역에까지 출현하게 된 점이야말로 백제의 전남지역 완전 지배의 고고학적 지표로 볼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당시 백제가 서남해 도서지역을 편제한 사례를 찾아보면 아차산현(阿次山縣), 거지산현(居知山縣), 고록지현(古祿只縣), 도산현(徒山縣), 매구리현(買仇里縣) 등을 들 수 있다. 백제시대의 지방제는 ‘방-군-성 체제’였으므로 기초 행정단위명으로 현(縣)은 쓰이지 않았고 군(郡)과 성(城)이 쓰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본문 중에 열거된 현들은 모두 ‘모성(某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

    이들을 오늘날의 지명에 대응시켜 보면, 아차산현은 압해도에, 거지산현은 장산도에, 고록지현은 임자도에, 도산현은 진도의 북부지역에, 매구리현은 진도 남부지역에 각각 비정된다. 결국 백제는 신안 도서지역에서 압해도와 장산도와 임자도의 세 곳을 현(성)으로 편제한 셈이다.

    압해도와 장산도와 임자도에는 현(성) 치소에 걸맞게 성과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먼저 압해도를 보면 송공리에 송공산성(宋孔山城)이 있고,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그 산성 동쪽의 대천리 일대에 58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었다.

    현재는 고분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그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백제계통의 횡혈식석실분이 다수 포함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에 장산도에는 장산리와 대리 일대에 장산토성지가 있고 공수리에 대성산성(大城山城)이 있으며, 그 산성의 주변인 도창리에 5~6기의 석실분이 분포하고 있다. 이 중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아미산 남쪽 기슭의 석실분은 백제 사비 천도 이후의 사비양식을 전형적으로 띠고 있어, 6세기 중엽~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백제의 지방관이 직접 서남해 도서지역에 파견되어 상주하고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임자도에는 대둔산성지(大屯山城址)가 있으며, 또한 석실분으로 추정되는 고분의 흔적이 있다는 제보가 있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한 조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여 성지의 초축시기와 고분의 확인 작업이 미진한 상황이어서, 추후 이에 대한 정밀한 조사 작업이 이루어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백제가 현(성)으로 편제한 서남해 도서지역은 위의 세 곳 이외에도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원' 「백제조」에 나오는 다음의 기사가 이를 시사해 준다.

    남쪽 바다에 대도(大島) 15개소가 있는데 모두 성읍(城邑)을 설치하고 사람들이 모여 산다.

    윗 기사에 나오듯이 백제가 남쪽 바다의 큰 섬 15개소에 성읍을 설치했다고 한다면, 성읍을 설치한 대상 지역은 주로 서남해 도서지역이 되었을 터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현(성)으로 편제된 사례를 5개소만 전하고 있어, 10개소 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삼국사기' 지리지가 통일신라시대 지방편제의 내용을 기본 골격으로 삼았던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즉 '삼국사기' 지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군현으로 편제된 지역에 대해서만 이전 시대의 연혁을 부기하여 정리했을 뿐이고, 당시 편제의 대상에서 제외된 지역의 이전 시기 군현의 연혁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남해 도서지역에 대한 백제의 편제 사례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다섯 개의 사례 이외에도 상당수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과 관련하여 위에서 살핀 신안군의 세 섬(압해도,장산도,임자도) 이외에도 성곽과 고분이 분포하는 섬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비금도에는 도고리에 산성산성(山城山城)이 있고 광대리에 성치산성(城峙山城)이 있는데, 이들 산성 주위에서 40여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백제 석실분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 외에도 안좌도의 읍동리와 대리 일대에서 석실분 6기가 확인되었고, 지도 어의리, 하의도 대리 등지에서도 성격을 알 수 없는 고분군이 찾아진 바 있다. 이러한 섬들 역시 백제의 현(성) 편제가 이루어진 지점으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추후에 조사가 진전됨에 따라서는 이외의 지역에서도 성곽 및 석실분의 흔적이 더 찾아질 가능성은 있다고 보며, 백제의 서남해 지역 편제라는 관점에서 이들에 대한 보다 면밀한 조사가 요청되는 바이다.

    3. 통일신라의 군현 편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서남 도서지역에 대한 편제는 새로운 면모로 재정비된다. 그것은 첫째, 중심 도서를 군으로 승격 편제했다는 점이고, 둘째, 도서지역에 대한 군현 편제의 수를 크게 줄였다는 점, 그리고 육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대흑산도를 중시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서남해 도서지역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례를 보면, 아차산현(阿次山縣)을 압해군(壓海郡)으로, 도산현(徒山縣)을 뇌산군(牢山郡)으로 승격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곧 신라국가가 압해도와 진도를 서남해 도서지역 지배를 위한 중심지로 설정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에 편제지역의 수를 보면, 백제시대에 15개소 달했던 편제 지역의 수를 대폭 줄여 2군 3현으로 재편성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통일신라의 2군 3현이란 압해군과 도산군을 중심으로 하여 안파현(安波縣, 백제의 거지산현), 염해현(鹽海縣, 백제의 고록지현), 첨탐현(瞻耽縣, 백제의 매구리현)을 이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흑산도를 중시했다는 점을 부연 설명하기로 하자. 근자에 흑산도 반월성과 그 주변의 읍동리 일대에 대한 정밀 조사를 진행한 결과, 상라산(上羅山)의 반월성을 중심으로 상라산 정상에 제사터가 있고, 반월성 아래에 절터와 객관(客館)터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읍동리 일대에서 이처럼 산성과 제사터와 절터와 객관터가 하나의 종합 세트를 이루며 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곳이 곧 바다 항로의 중심 거점으로 활용되었음을 반영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읍동리 일대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토기 및 자기류와 기와류 등이 수습되었고, 제사터에서는 3점의 철마(鐵馬)가 철마는 통일신라시대 중사(中祀)를 지냈던 영암 월출산 제사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그 용도와 사용 시기를 짐작케 한다.

    자기류 등과 함께 수습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읍동리 일대의 유적지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성되어 고려시대까지 활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육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흑산도에 항로의 중심 거점을 조성했다고 한다면, 이 때부터 흑산도를 거쳐 서해를 가로질러 중국에 이르는 횡단항로가 일반화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것이다. 이는 곧 대중국 항로에서 커다란 진전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터인데, 이에 대해서는 절을 바꾸어 좀더 서술하기로 하자.

    4. 서해 연안 및 횡단 항로의 거점

    백제가 서남해 도서지역에 대해 대대적으로 편제했던 것은 곧 연안 항로에서 도서 지역이 가지는 중요성을 새로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연안 항로의 거점을 주로 연안 육지부(예를 들어 해남 백포만)에서 찾던 이전 시기의 관행과 비교해 보면, 한 단계의 진전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백제가 주요 편제지로 선정한 지점이 주로 육지부에 가까운 장산도,압해도,임자도,진도 등에 몰려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연안 항로가 중시되고 있었고, 서해 횡단항로는 아직 일상화되지 못한 단계였음을 알 수 있다.

    서해 횡단항로가 본격화된 것은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부터였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통일 직후부터 횡단항로가 일상화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통일 직후에는 나당전쟁의 후유증으로 당분간 당과의 교류가 단절된 상태가 이어졌으므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8세기에 접어들면서 당과의 국교가 재개되어, 당과 신라와 일본 사이에 해상교역이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서해 횡단항로의 개척이 가시화되어 갔을 것이다.

    서해 횡단항로는 북방 횡단항로와 남방 횡단항로가 있었다. 북방 횡단항로는 옹진반도에서 서해를 건너 산동반도에 이르는 최단 거리의 항로로서, 삼국시대부터 연안 항로와 연결되어 보조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반면 남방 횡단항로는 서남해지방에서 출발하여 서남해 도서지역을 거쳐 양자강 하류지역에 이르는 비교적 긴 항로로서,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일찍이 꺼려 오던 터였다. 그러다가 8세기 동아시아의 해빙 무드에 힘입어 국제 해상교역이 활기를 띠게 되면서 한,중,일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 항로로서 남방 횡단항로가 점차 주목받게 된 것이었다.

    남방 횡단항로가 본격적으로 개척된 것은 9세기에 들어 장보고 선단의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주지하듯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남해 해상세력을 규합하여, 중국 동해안변의 신라인사회와 일본 큐우슈우 일대의 신라인사회를 연결하는 동아시아 국제 해상교역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남방 횡단항로를 일반화시킴으로써 서남해 도서지방을 일약 동아시아 국제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부상시켰던 것이다.

    남방 횡단항로의 중심 거점은 역시 흑산도였다. 앞 절에서 살폈듯이 흑산도에 반월성을 중심으로 항해의 안전을 빌던 제사터와 절터, 선원들이 쉬어가던 객사터 등이 통일신라 때부터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 것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유력한 증거들이다. 몇몇 문헌 자료를 통해서 당시 흑산도가 중시되었던 사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가) 신라가 당나라로 들어갈 때에는 모두 본군(나주) 바다에서 배가 떠났다. 하루를 타고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이 섬에서 또 하루를 가면 홍의도에 이르며, 또 하루를 타고 가면 곧 태주(台州)의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 이른다.

    나) 9월 4일 동쪽을 바라보니 산과 섬들이 겹겹이 있어 뱃사공에게 물어보니 바로 신라 웅주의 서쪽 경계로 본래 이곳은 백제의 옛 땅이었다 한다. 하루 종일 동남쪽으로 향하였는데 동서로 산과 섬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날 고이도에서 정박하였다. 이 섬은 무주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서북쪽 100리쯤에 흑산이 있다. 흑산의 몸체는 동서로 길게 늘어져 보이고 백제의 제3왕자가 도망해 피난한 곳이며, 지금은 3~400가가 산중에 살고 있다.

    다) 흑산(黑山)은 백산(白山) 동남쪽에 있어 바라보일 정도로 가깝다. … 옛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이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었다. 관사(館舍)가 아직 남아있다. … 언제나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불을 밝히고 여러 산들이 서로 호응하여 왕성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산에서부터 시작된다.

    라) 흑산도는 물길로 900여리인데 주위가 35리이다. 옛날에는 흑산현이라 불렀으며 그 유지가 아직도 있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명주 정해현으로부터 순풍을 만나면 3일에 대양에 들어가고 또 5일이 되면 흑산에 이르러 고려의 경내에 들어간다’고 한 섬이 바로 이 섬이다.

    먼저 가) 기사는 신라시대에 서남해안에서 흑산도와 홍의도(미상)를 거쳐 영파에 이르는 서해 횡단 항로가 크게 활용되고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의 지리학자인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나오는 기록으로서 신빙성이 다소 의문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당에 들어가 구법활동을 폈던 일본 승려 옌닌(圓仁)이 847년 9월 초에 재당 신라인의 안내를 받아 귀국하면서 이 항로를 이용한 것을 전해주는 나) 기사를 통해서 그 신빙성을 어느 정도 뒷받침 받을 수 있다. 또한 엔닌과 장보고의 긴밀했던 관계를 염두에 두면, 장보고 선단이 이 항로를 통해 중국와 한반도 서남해, 그리고 일본열도를 잇는 해상교역의 주된 항로로 활용하였음도 강력히 시사 받을 수 있다. 더욱이 이 기사에서 흑산도를 ‘백제의 제3왕자가 도망해 피난한 곳’으로 지적한 것을 주목해 본다면, 백제 말년에 이미 흑산도가 대중국 교역의 거점으로 중시되기 시작했을 것임도 역시 시사받을 수 있다.

    한편 다) 기사는 1123년에 송의 사절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이 그의 항해로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흑산도의 중요성을 설명한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흑산도가 고려시대에 사신 왕래의 중심 거점으로 활용되어 그들이 머무는 관사(館舍)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라) 기사를 통해서는 흑산도가 고려시대에 흑산현으로 편제되었던 것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편제 사실은 흑산도가 군현으로 편제된 사실이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정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바이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에 흑산도가 남방 횡단항로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현으로 편제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곧 흑산도가 남방 횡단항로의 중심 거점으로 본격 활용된 것이 신라 국가의 공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장보고의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남방 횡단항로의 본격적 개척은 역시 9세기의 장보고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 흑산도는 국가적 관리체계 하에 들어가 흑산현으로 편제되었고, 고려와 송나라 사신들의 편의를 위한 관사(館舍)와 그들의 왕래를 파악하기 위한 봉수 시설 등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다)와 나) 기사가 이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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