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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시기의 신안군 신안문화원 2006/3/23 5634


    고려시기의 신안군

    고려시기 신안의 도서에는 여러 개의 군현이 소재하여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또한 교통로상에서 대단히 중요하여, 조운(漕運)하는 선박이 경유하였으며, 중국에 오가는 배들도 통과하였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고려시기에 이 지역을 둘러싸고, 또는 이 지역에서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빈발하였다.

    1. 나말려초 신안의 해상세력과 왕건

    신라말에 신안의 도서지방은 해상교통로상에 위치하여, 국제적 교류에 적극 참여하였다. 신안을 중심으로 한 도서지방의 해상활동이 활발한 결과, 신안과 멀지 않은 완도지역에 청해진(淸海鎭)이 설치되는 것이다. 장보고의 정치활동이 좌절되면서 청해진이 혁파되자, 이 지역에서의 해상활동은 크게 위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었으며, 해상활동이나 교통로상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 지방을 둘러싸고 견훤과 왕건이 각축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견훤은 신안과 가까운 광주 지역에서 892년 후백제를 일으켜 전남지방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신안의 도서를 경유하여 중국과 교통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 하였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태봉(泰封)정권도 전남지방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경략(經略)에 나서게 되었다. 태봉의 왕건은 903년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나주(羅州) 등 인근 지역을 점령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나주지역이 완전히 태봉의 수중에 든 것은 아니었고, 909년 경에 왕건은 재차 나주를 경락하기에 이른다.

    909년에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 관할의 염해현(鹽海縣; 臨淄縣)에 이르러 견훤이 오월(吳越)에 보내는 배를 나포하였는데, 이에 궁예는 매우 기뻐하고 왕건을 포장(褒獎)하였다.

    신안의 염해현이 중국과의 교통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이어서 왕건은 전함을 수리한 후 2,5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광주 관내의 진도군(珍島郡)을 공격해 항복시켰다. 다시 고이도(皐夷島)로 진격하였는데, 성(城) 안의 사람들이 왕건이 거느린 병사의 군용(軍容)이 엄정함을 보고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염해현,진도군,고이도를 왕건이 수중에 넣음으로써, 전남 서부 지역의 해안선을 봉쇄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나주포구(羅州浦口)에 이르러 견훤이 거느린 병사와 맞대결하게 되었다. 왕건은 기민하게 공격하고 아울러 바람을 이용해 견훤의 배에 불을 지름으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게 견훤의 부대를 격퇴함으로써 나주 관내의 여러 군현이 태봉정권의 지배하에 확실히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신안의 반발세력이 건재하고 있어, 왕건의 신안지역 장악은 불안정하였다. 압해현의 능창(能昌)의 존재는 왕건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능창은 해도(海島) 출신으로서 수전(水戰)에 능해서 수달(水獺)이라 불리고 있었다. 능창은 망명자(亡命者)를 불러 모으고 갈초도(葛草島)의 소적(小賊)과 결탁하여 왕건이 이르면 해치려고 도모하였다. 왕건은 이를 예상하고 수영 잘 하는 자 10여인을 갑옷을 입히고 창을 지참시켜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갈초포구(葛草浦口)에 이르러 왕래하면서 일을 도모하는 자를 잡을 계책을 세웠는데, 과연 그곳에 이르니 작은 배가 있어 이를 나포해 보니 능창이었다. 능창을 사로잡아 궁예에게 보내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해서 염해현,진도군,고이도,압해현,갈초도 등의 신안 지방이 왕건의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견훤은 반대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상실해 이 지역을 경유해 중국이나 일본과 교통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왕건이 이 지역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지만, 반발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935년(태조 18)에 “근년에 후백제에 바닷길이 침략당해 6년 동안 바닷길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저간의 사정을 전한다.


    2. 군현편제의 변화와 그 특징

    고려시기 신안지방에는 압해군(壓海郡) 육창현(六昌縣) 임치현(臨淄縣) 장산현(長山縣)과 흑산현(黑山縣)이 있었다. 이들 군현의 편성은 통일신라시기와는 크게 상이한 것이었다. 통일신라시기에는 무주(武州) 관내에 압해군이 있었고, 그 압해군 관할 하의 영현(領縣)에 갈도현(碣島縣) 염해현(鹽海縣) 안파현(安波縣)이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신안 지방이 압해군을 중심으로 해서 3개 군현을 포괄하는 하나의 권역(圈域)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이 왕건에 반대하는 정치 성향을 보이면서 태봉․고려에 반발하였기 때문에, 고려의 성립과 더불어 행정 편제가 크게 바뀌게 되었다. 신안의 여러 군현은 명칭이 바뀌고 그 소속 邑도 변경되었다. 신안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던 압해군은 고려초에 나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뒤에는 영광군(靈光郡)의 속현으로 전락하였다. 주읍의 위치에 있지 못하고 속현으로 전락하여 나주목과 영광군에 차례대로 소속하게 되는 것이다. 갈도현은 육창현(六昌縣)으로 이름이 바뀌어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으며, 염해현은 임치현(臨淄縣)으로 바뀌어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 그리고 안파현은 장산현(長山縣)으로 바뀌어 나주목의 속현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이리하여 신안의 여러 군현이 하나의 대권역(大圈域)을 이루던 것을 분리시켜, 일부는 영광군으로, 일부는 나주목의 속군․현으로 이속(移屬)되는 것이다. 신안 지방에 대한 분할(分割)정책의 소산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안지방에 다수의 거주민이 있어, 4개의 군현을 설정하고 있는 것은 주목을 끄는 바이다. 그리고 멀리 흑산도(黑山島)에도 군현이 있어 흑산현이라 불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실체는 다소 의심스러운 바 없지 않다.


    3. 해상교통로에서 갖는 중요성

    고려시기 신안지방은 신라이래 해상활동의 전통을 이어 여전히 해상교통로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위치하였다. 중국이나 일본에 통하는 국제교통로가 이곳을 경유하였으며, 전라남도 내륙의 물품을 개경으로 운송하는 국내 해상로가 이곳을 지나갔다.

    국제교통로상에서 중요한 지점이었음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잘 언급되어 있다.

    흑산도는 백산도의 동남쪽에 있는데 서로 상근하며 멀리서 보면 매우 고준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고 앞에는 조그만 봉우리가 있어 가운데가 마치 마을처럼 아늑하다. 또 양쪽 사이의 바다가 깊어서 가히 배를 숨겨둘 만하다. 옛날 이 바닷길을 여행할 때에 이곳에다 선박을 머물게 하였으며 지금도 館舍가 남아 있다. 이 섬에는 백성들이 모여 사는데, 나라에 큰 죄를 지은 자들이 이곳에 유배되어 있다. 중국의 사신들이 이곳에 이르면 밤에는 산에 있는 봉화대에서 불을 밝혀 다음의 도서와 산으로 연결시켜 왕성에 이를 때까지 인도를 하는데 이 흑산도가 그 시작이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 추측되는 지역은 대흑산도 진리(鎭里)로 보인다. 진리는 선박의 정박이 가능한 항구로서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고려시기와 연관되는 성지(城址)와 석탑, 석등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신안의 해저(海底)에서 외국 선박이 다수 발굴되고 있는 것도 이 지점이 국제교통로 상에서 차지한 비중 내지 중요성을 알려주는 것이다. 국제문물의 교류에서 신안지방이 중심적인 위치에 있음으로 해서, 이 지역의 문화수준도 상당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국내교통로상의 중요성은 조운로가 이곳을 경유하는 데서 알 수 있다. 전남 일대에는 부용창(芙蓉倉;영광) 장흥창(長興倉;영암) 해능창(海陵倉;나주) 해룡창(海龍倉;승주)의 4개 조창(漕倉)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중 영광 법성포의 부용창을 제외한 다른 3곳에 모아진 곡물은 내륙하천을 거쳐 신안의 도서지방을 경유해 개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해로상 신안이 갖는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삼별초(三別抄)가 인근의 진도에 자리하는 것이며, 왜구의 침략이 빈발하는 것이다.

    토성(土姓)은 고려 초 분정된 것으로 그 수는 성단(姓團),호장(戶長)의 수를 나타내므로, 각 군현에는 영산현을 제외하면 3~6개의 토성이 있어, 그 토착세력의 존재를 읽을 수 있다. 영산현의 경우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속성(續姓)이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 개 보인다. 영산현은 흑산도인이 육지로 옮겨와 만들어진 군현이다.


    4. 몽고의 침략과 압해도민의 저항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략은 고려를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갖은 약탈과 방화, 살육을 일삼아 많은 고려인들이 그 피해를 입었으며, 전국의 농지는 황무지로 변해 갔다. 당시 최씨정부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자신들만의 안전을 지키는 데 급급하였을 뿐, 본토의 방비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본토의 주민들에게는 산성(山城)으로 피신하거나 해도(海島)로 입보(入保)하도록 권장할 뿐이었다. 해도 입보책으로 도서지방에는 많은 민인(民人)들이 흘러들어 농지를 개간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몽고의 침략에 대비해야 했다. 아마 입보민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하고 험난한 생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전남지방에 몽고군이 침입해 들어온 것은 6차 침입 때였다. 그 이전에는 전국의 대부분을 유린하였지만, 전남에 이르지는 않았다. 6차 침입은 1254년에서 1259년까지 계속되는데, 전남에서의 전투는 1256년(고종 43)에 장성의 입암산성에서 벌어진 바 있다.

    그리고 이어서 전남의 상당지역을 유린한 후 압해도를 공격하였다. 당시 압해도에는 내륙의 주민들이 다수 입보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힘을 총 결집하여 몽고군에 대항하였다. 몽고장수 거라대(車羅大)가 수군 70척을 거느리고 압해를 공격하는데, 압해 사람은 대포 2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렸다. 양편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거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 하고 다시 배를 옮겨 치게 하였으나, 압해인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몽고인들이 드디어 수공(水攻)의 장비를 파하였다고 한다.

    사실 몽고군이 전국을 유린하면서도 전남까지는 그 피해가 미치지 않아, 당시 강화정부는 전남 일대의 조세를 조운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다. 신안의 도서지방은 몽고의 침입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아 여전히 해로는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강화의 최씨정권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종 9년(1268) 10월에 元에서 무덕장군(武德將軍) 통령(統領)인 왕국창(王國昌)과 무략장군(武略將軍) 부통령(副統領)인 유걸(劉傑) 등 14인을 보내 흑산도를 둘러 본 일이 있다.

    이들은 2개월 뒤 돌아왔는데, 중국․일본과의 교통로에서 흑산도가 갖는 중요성에 주목하여 해로(海路)를 확인하고 흑산도의 지형을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5.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참여

    압해도민의 몽고에 대한 저항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안지방의 대몽항쟁의식, 몽고에 대한 적대의식은 매우 높았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몽고의 주력부대를 물리쳐, 몽고와의 항쟁에 대한 자신감도 상당히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의식이 전제되어 있었기에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와 대몽항쟁을 전개하자 이 신안의 민인들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참여하였다.

    삼별초는 당시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를 단행하자 반기를 들고 항쟁하였다(1270년).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 지유(指諭) 노영희(盧永禧) 등이 강화에서 삼별초를 거느리고 반기를 들었고, 승화후(承和候) 온(溫)을 협박하여 왕으로 삼았다. 삼별초는 곧바로 8월에 진도로 옮겨와 장기적인 대몽항쟁을 계획하였으며 일본과의 제후도 모색하였다.

    삼별초는 진도에 들어와 10개월간 항쟁을 하다가 제주도로 쫓겨갔다. 삼별초가 진도에 있을 때에 신안의 도서지방은 물론 전남 내륙의 상당한 지역을 그 영향력 하에 두고 있었다. 조운로를 차단해 다량의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정부에 재정적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제주도로 옮겨간 후에도 삼별초는 여전히 조운로(漕運路)를 막고 있었다. 1272년(원종 13) 3월에서 5월에 걸쳐 삼별초가 약탈한 조운선이 20척, 곡미(穀米)가 3,000여 석이었으며, 8월에는 전라도의 공미(貢米) 800석을 약탈하였다.

    이러한 조운로의 차단에는 신안의 도서민들의 협조 내지 지원이 없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273년 삼별초가 완전히 진압되면서, 신안의 도서지방은 그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삼별초에 적극 참여한 인사들의 처벌, 주민들에 대한 통제 강화, 그리고 해상활동에 필요한 선박의 몰수 내지 파괴가 수반되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해상활동을 통해 유지 성장해 온 이 신안지방은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6. 왜구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

    삼별초의 항쟁과 그 패배로 신안의 도서지방은 크게 위축되었다. 겨우 조금씩 회복하여 갈 무렵, 왜구의 침략이 이어지면서 신안의 도서지방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충정왕 2)부터였다. 처음에는 연안지방을 습격하고 조선(漕船)의 약탈을 위주로 하였지만, 우왕대부터는 미곡 약탈만이 아니라 인민의 노략,살상을 자행하였으며, 연안지방만이 아니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략해 큰 피해를 주었다.

    이러한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우선적으로 피해를 입은 곳은 도서지방이었다. 신안의 도서지방에서 왜구와 충돌한 일은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왜구와의 전쟁에서 주목되는 일은, 1362년(공민왕 11) 3월에 흑산도인이 왜구 포로를 바친 것이다.

    흑산도에까지 왜구가 이르렀던 사실과 흑산도인이 그들을 사로잡은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1373년(공민왕 22) 11월에는 주영찬(周英贊),김잠(金潛),조신(曹信)의 배가 자은도(慈恩島)에서 왜구에 패해 익사(溺死)한 일이 있었다. 신안의 도서지방이 왜구의 공격으로 곳곳에서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왜구의 공격으로 급기야 도서지방에 소재한 군현의 읍치(邑治)를 내륙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진도는 1350년(충정왕 2)에 읍치를 육지로 옮겼다. 『세종실록』권151, 지리지, 해진군, 5책, 659쪽.

    비슷한 시점에 압해현과 장산현도 읍치를 옮겼다. 압해현은 왜구로 인해 실토(失土)하고 나주의 남쪽 40리 지점으로 그 읍치를 옮겼으며, 장산현도 역시 왜구로 인해 失土하고 나주의 남쪽 20리 지점(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일대)에 교거(僑居)하고 현이라 하였다. 흑산도민이 나주의 남포(南浦)에 교우(僑寓)하여 영산현이라 지칭한 것도 왜구의 침략이후로 보인다. 영산현은 1363년(공민왕 12)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임치현이나 육창현의 경우도 왜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읍치를 옮긴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왜구의 침입으로 읍치를 옮기면서 도서지방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곳으로 되었다. 이에 따라 도서지방이 그 동안 간직해온 역사와 문화가 파괴되고 단절되기에 이른 것이다. 도서지방의 혼란이 대체로 정비되는 시기는 1438년(세종 20) 경이다.


    7. 유배지로서의 신안

    신안의 도서지방은 당시 중앙정부가 소재한 개경이나 강화도와 먼 거리에 있어, 범죄인이나 정적(政敵)들이 대거 유배당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가장 먼 지점에 위치한 흑산도는 중요한 유배지였다.

    인종대에 척준경(拓俊京)이 암타도(嵒墮島; 岩泰島)에 유배당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는 이자겸을 도왔지만 뒤에 이자겸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바 있었는데, 결국 제거되어 1127년(인종 5) 3월에 암타도에 유배되었으며, 다음해에 곡주(谷州)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의종년간에 정수개(鄭壽開)는 흑산도로 유배당하였다. 정수개는 인종의 아들인 대영후(大寧侯) 경(暻)이 다른 뜻을 품었다고 무고하였다가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어 경(黥)되어 흑산도로 유배보내졌다.

    정수개 이후 흑산도로 유배당한 이들이 다수 보인다. 박훤(朴暄)은 승려가 되어 외방에서 큰 해를 끼치고 있는 만전(萬全;뒤의 최항) 형제의 일을 거론하다가,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부자간을 이간시켰다고 해서 흑산도로 유배당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최우가 더불어 의논할 자가 없다 하여 강화로 풀려 돌아왔다.

    유석(庾碩)은 고종 때에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副使)가 되었는데, 순문사(巡問使) 송국첨(宋國瞻)이 유석에게 이첩(移牒)하여 산성(山城)을 보수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일을 판관(判官) 신저(申著)와 함께 하도록 하자 유석은 탐오(貪汚)한 신저가 싫어 그 일을 하지 않고 유사(儒士)들과 놀게 되었다. 이에 신저가 최우에게 알리자 최우는 “성의 수리가 대사(大事)인데 부사(副使)가 힘쓰지 않으니 적병(狄兵)이 이르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를 암타도에 유배보냈다. 유석의 유배길에 노유(老幼)가 길을 막고 호곡(號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추밀원사(樞密院使) 최온(崔昷)이 고종 45년에 흑산도에 유배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1259년(고종 46) 4월에 산원(散員) 민칭(閔偁)이 흑산도에 유배당한 사실이 확인된다. 또한 유경(柳璥)이 유배당한 일도 있다. 유경은 최의(崔竩) 제거 후 상당한 권세를 누렸는데, 1269년(원종 10) 4월에 평장사(平章事) 지위에 있던 그가 흑산도로 유배당하였다. 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의 지위에 있던 조오(趙璈)는 임연(林衍)이 왕을 폐립(廢立)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1269년(원종 10) 12월에 역시 흑산도로 유배당하였다.

    신안의 도서 가운데 암타도(암태도)와 흑산도가 주된 유배 장소였다. 유배당하는 시기는 대개 무인집권기의 중반 이후였으며, 정치적 격변과 깊이 연계된 인물들이 중심이었다. 이곳에 유배당한 인물들은 몇년씩 머물지 않고 곧 바로 유배에서 풀리고 있다. 유배인들은 중앙정치의 거물들이 많아 유배지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중앙의 고급․상층 문화가 이들을 매개로 신안의 도서지방에 꽤 알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8. 향도(香徒)의 존재

    팔금도(八禽島; 八歆島)에서 침향(沈香)한 사실이 확인된다. 세종 때의 실록기사 가운데 태상왕(太上王;태종)이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권극화(權克和)를 시켜 팔흠도(八歆島;팔금도)의 침향목(沈香木)을 캐어 오도록 지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앞서 권극화는 나주목사로서 팔금도에 들렸다가 단갈(短碣; 石碑片)을 발견하였는데, 거기에 목종 5년(1002) 도속(道俗)의 향도(香徒) 300여인이 함께 침향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서 팔금도민의 침향에 대한 의식을 확인할 수 있고, 나아가 도서 지방민의 일체성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시기가 다소 뒤이지만 1405년 암태도에 세워진 매향비(埋香碑)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매향은 침향목(沈香木)을 묻어 현실적인 위기․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복적(祈福的)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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