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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최익현이 남긴 유배시절 기록 최성환 2006/5/29 3143


    최익현의 면암집에 소개된 유배시절(흑산, 우이) 기록입니다.
    당시 우이도 풍경과 상산봉에 있었다는 최치원 철마,
    흑산도 일신당, 지장암에 얽힌 사연들이 담겨 있습니다.

    흑산도에서 3년간의 유배생활을 마감하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최익현 유배시절의 주요기록

    - 지장암기 指掌巖記
    흑산도(黑山島)에 귀양간 이듬해 3월에 나는 두세 친구와 남으로 선유령(仙遊嶺) 고개에 올라 봉해(蓬海)의 물결을 굽어보고, 돌아오다가 딱 벌어진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천촌(淺村)이라는 마을이었다. 마을 서쪽 기슭에 해신사(海神詞)가 있고 그 아래에 몇 길 되는 입석(立石)이 보이는데 위는 수목이 우거지고 아래는 길 왼쪽에 임해 있었다. 그곳이 깊숙하고 평탄하여 비바람을 피할 만하였다.
    나는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다음과 같이 크게 탄식하였다.
    “아, 이 고장은 서울에서 수천 리나 떨어져 날씨가 무더운 해양(海洋) 가운데 있기 때문에 직방(職方 토지(土地)․지도(地圖)를 관장하는 관청)의 판도(版圖)에는 그 존재가 그리 중시되지 않는 듯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모두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흘러 들어온 구족(舊族)들이었고, 그 풍속도 상고하건대 소박하고 검약하여 사치스러운 태도가 없을 뿐 아니라 서당을 세워 교육에 힘써서 준수(俊秀)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밖에도 산수(山水)․어가(漁稼)의 즐거움과 분전(墳典)․도사(圖史)의 비축으로 이미 스스로 자족(自足)하고 탄식하거나 원망하는 소리가 없으니, 아름다운 고장이 아닌가?
    돌아보건대, 수백 년 동안 나라에서 먼 지역을 회유한 뜻이 넓었고 이곳 백성들이 교화를 입은 날도 깊었으며 한 시대의 문인(文人)과 명사(名士)들이 이 고장에 노닌 것 또한 적지 않았는데 그 지행(至行)․의문(懿文)이나 고운(故韻)․신적(新蹟)이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 고사(古事)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어찌하여 그다지도 적료한가?
    그러나 나는 일찌기 듣건대,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 이래로 부터 오랑캐의 풍속이 변하였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태조대왕(太祖大王)이 명태조 고황제(高皇帝)와 동시에 즉위하여 무궁한 발상(發祥)의 터전을 닦자 명신(名臣)과 석보(碩輔)들이 그 지극한 교화를 도와서 치모(治謨)와 문물(文物)이 당우(唐虞)와 낙건(洛建)의 성대에 비교할 만큼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 도비향수(都鄙鄕遂)에서부터 밖으로 주군진보(州郡鎭堡)에 이르기까지 관청을 두고 직책을 부여하여 가르치고 다스리지 않음이 없었는데, 그 가르치는 기본은 오륜(五倫)을 펴고 오성(五性)을 가지게 하는 데 불과했던 것이다.
    대체로 사람이 그 몸이 있게 되면 반드시 이 다섯 가지 윤기(倫紀)가 있으므로 하루라도 떨어질 수 없으며, 이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 다섯 가지 성품을 갖추게 되므로 일각이라도 휴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왕(先王)의 가르침은 그 고유한 것(오륜과 오성)을 따라 인도하여 그 처음을 잊지 않게 하였고, 또 백성들이 행하고 있으면서도 알지를 못하여 오래가면 오륜이 무너질까 염려가 되어 곧 윤음(윤음)을 반포하여 그 가르침을 널리 알려서 해우(海隅)의 창생(蒼生)들에게 이 이치에 밝아서 지키고 잃지 않게 하며 또 이 가르침이 무궁토록 전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가 그 고유한 것을 따라 발명한 것이지, 애당초 밖에 있는 것에 힘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선비는 대도(大道)를 듣고 백성들은 지극한 은택을 입어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아무리 멀어도 이르지 않음이 없고 아무리 적어도 화하지 않음이 없다’고 할 만하였는데, 근세에 와서는 풍속이 달라지고 퇴폐 해져서 무릇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다만 어느 일의 계교와 이해의 쟁탈이나 알게 하고 윤상(倫常) 본연의 선(善)에 대하여는 돌이켜 찾으려는 생각조차 않게 하므로 하늘과 땅이 폐색되어 어진이가 숨고 삼강(三綱)이 무너지고 구법(九法)이 폐하가 되었다. 여기에다 노불(老佛 도교(道敎)와 불교(佛敎))과 서교(西敎(천주교))가 들어와서 나라 전역에 가득 차니, 연원(淵源)이 있는 문벌(門閥)과 의관을 갖춘 양반들이 그 풍속을 사모하여 그 말을 외고 그 의복을 입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수치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천하의 풍조인데, 지금 이곳 사람들은 몸에는 우리나라의 베를 입고 머리에는 명 나라 관(冠)을 쓰며, 글은 공자․맹자가 아니면 읽지 않고 말은 충신(忠信)하지 않으면 물리쳐서 사람으로 쳐주지 않으니, 선왕(先王)이 사람을 길러낸 효험을 여기에서 더욱 증험할 수 있다. 이들과 저들을 비교할 적에 우열과 득실을 논하면 그 누가 낫겠는가? 이는 진실로 존숭할 만한 것으로 민멸(泯滅)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낭주(朗州)에 사는 친우 김형배(金衡培), 서당 선생 김성용(金成鏞)과 그 생도 정석중(鄭錫中) 등과 함께 그 석면(石面)의 편의를 살펴서 주선생(朱先生 (朱子))의 ‘위아중지장’(爲我重指掌)이란 시구에서 지장(指掌)을 따다가 이름을 지어 게시한 다음, 또 선사(先師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말한다.)의 유지(遺志)를 따라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洪武日月)이라는 8자를 그 위에 쓰고 아울러 크고 깊게 새겼다.
    아, 이 지방 사람들이여 힘쓸지어다.「시경」에,
    하늘이 모든 백성을 내니시 天生烝民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도다 有物有則
    백성들이 타고난 상성이 있어 民之秉彝
    미덕을 좋아하네 好是懿德
    하였으니, 당초에 고금(古今)과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 오성․오륜을 따라 찾아 살펴서 자기를 반성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고, 거주지의 선악과 세속의 저앙(低昻)으로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흑산도(黑山島)가 비록 누추한 지역이지만 어찌 후일에 양복(陽復)의 기본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이 일을 맡아 한 자는 같이 귀양온 동청동(董靑同)이다.
    무인년(고종15. 1878) 4월 일에 최익현은 삼가 쓴다.

    우이 소흑산의일명에 올라 즉시 부름 登牛耳 小黑山一名 口號
    귀양길에 산에 오르는 즐거움을 겸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대개 지기(志氣)를 상실하여 사실상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금성읍(錦城邑) 서쪽에서 1백 리쯤 떨어진 영광(靈光) 다경포(多慶浦)에 이르러서 수로를 따라 착잡히 나열되어 있는 수없는 섬 사이로 향하여 비금내양(飛禽內洋)에 도착하면 곧 대해가 된다. 여기서 서남 방면 40~50리를 가면 산 하나가 우뚝 솟아 2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앞은 낮아서 북을 향하고 뒤는 높아서 남을 향하여 내외 24개의 섬 중에 가장 높고 웅장하게 떠 있으니, 이것을 곧 우이도(牛耳島)라 한다. 이 산 전면 우편에 있는 한 산맥은 웅장한 자세로 동을 향하였고, 또 후면 좌편에 있는 한 산맥은 많은 굴곡을 지어 서를 향하고, 평행선으로 경사져 있는 곳은 그곳 사람들의 행로가 되어있다. 또 그 서쪽으로 한 봉우리가 석벽으로 장식되어 하늘에 우뚝 솟아 있는 데를 지나면 약간 꺼져서 안계를 통한 데가 있어, 먼 곳을 바라보는 처소가 되고, 북으로 꾸부러지면서 높은 절벽이 웅장한 모습을 이루고 있는 그 곳은 곧 굴봉(窟峰)의 절정이다. 그 남쪽에는 크게 열린 바위굴이 있어서 위는 둥글고 밑은 평탄하여 바람과 비를 능히 가리우면서 사람 백 명을 수용할 수 있고, 그 굴의 북쪽에는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데 그 물 맛이 심히 상쾌하다. 또 동북편 쪽으로 10리 되는 지점에서는 곧 본산과 오른쪽 산이 서로 마주 대하여 나루터를 이루었으니 모든 선박을 대는 곳이다. 그 밖에는 작은 산맥이 횡단하여 본산의 안대(案帶)가 되면서 많은 수목들이 울창하니 가도(駕島)라 전하고 있다. 그 중 한 물줄기는 두 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몇 백 보가 못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이도 좌편 고개로부터 서쪽 5리 지점에는 사방이 높고 중간이 깊어서 바다가 보이지 않으니 곧 대촌(臺村)이 있는 곳이요, 대촌을 넘어 서편을 향하면 한 산맥이 나직하게 개울을 안고 선회하면서 남을 향하고 있는 곳이 성촌(星村)이요, 성촌 남쪽에서 산을 등지고 토둔(土屯)을 향하여 모든 암석의 험악한 기운을 해탈한 곳이 곧 저항(猪項)이요, 또 저항으로부터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남쪽에 당도하면 지맥이 고랑을 이루고 그 비탈에 마치 새집처럼 달려 있는 곳이 곧 예미(曳尾)요, 또 예미로부터 한 산록과 나루를 지나면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한 곳을 바로 소우이(小牛耳)라 부른다. 이곳은 주위가 30리도 못 되고 인가(人家)는 겨우 1백 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거나 여기서 바라보면 멀리 7백~8백 리 또는 1천 리의 주위에 흑산(黑山)․가가(可佳)․태사(苔士)․만자(蔓子)․조도(鳥島)․한라(漢拏) 등의 모든 산봉이 서남을 가리워 있고, 또 동북으로는 수없는 수륙 제산이 천태만상으로 별과 바둑처럼 나열하여 중중첩첩으로 둘러 있어 우익(羽翼)이 참으로 궁벽하고 험악한 곳이다. 다만 대양(大洋)에 개재해 있으므로 많은 타국(他國) 선박의 표류와 또 적함(賊艦)들의 오가는 것을 절대로 등한시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국가에서 검열 및 사찰 등의 기관을 두어서 일대 요새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더우기 국가에서 임진난(壬辰亂) 을 당해 크나큰 시련을 보았고, 또 호남 일대는 그 때의 피해가 가장 컷던 곳인 만큼 모든 연해안에 관방(關防)의 적지가 될 수 있는 곳에는 그 지대의 여하를 물론하고 모두 전투의 기계를 준비 설치하여야 할 것이다. 명종(明宗) 병진(丙辰1556)에 본도 및 흑산도에 각각 병관(兵館)을 설치하고, 각처 부대 중에 가장 경험이 많고 훈련에 능한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기로 하되 임기는 반년으로 하고, 매년 춘추로 나누어 윤번제(輪番制)로 실시하게 하였으니 그 민생을 위해 근심한 뜻이 지극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관(官)만이 있을 뿐이요, 실제에 있어서는 안으로는 성곽(城郭)과 궁시(弓矢)의 마련이 없고 밖으로는 개미같은 군졸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이것을 통솔 감독하는 기관이 멀리 수백 리 험악한 파도 밖에 있어서 만일 졸지에 해적들이 엄습하여 온다면 우리 병관(兵館)에서 위에 주달(奏達)하는 그 사이에 온 섬 백성은 하소연할 곳도 없이 이미 어육(魚肉)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름은 비록 방수(防守)로 되어 있으나 기실은 우리 백성을 적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근일에 있었던 양박(洋舶) 사건을 보아도 그러한 실정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이것이 모두 그 당시 방위(防衛)를 맡아 있던 지휘자들의 부족한 생각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제주에서 돌아온 그 이듬해 2월에 왜놈을 곧 양(洋)놈과 같다고 지칭한 죄로 다시 이 섬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이 지대가, 하늘에 닿는 석각(石角)이 3면을 둘러싸고 동쪽을 향한 한 입구(入口)마저도 또 바다로 막혔음을 보았으니, 참으로 하늘이 지은 감옥(監獄)이 아니었던가?
    한 번 죽음을 겪은 남은 목숨이 더욱 무섭기만 하여 생명을 보전 못 할 것 같더니 급기야 침식을 해보니 수토(水土)가 청감(淸甘)하고 사갈(蛇蝎)이 없을 뿐 아니라 또 금년에는 큰 가뭄으로 인하여 장습(瘴濕)의 기운이 예년에 비해 10분의 3에 지나지 않고, 거민을 대하여 그 말씨를 들어 보니 모두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 명분을 귀히 여기고 오랑캐를 천하게 여길 줄 아는 것이 절대 조정에 있는 사대부들이 따를 바 아니었다.
    세상의 많고 많은 시비와 득실이 일체 귀에 들어오지 않고, 갠 낮 밝은 밤에 오직 돌밭에 소 모는 소리와 푸른 바다에 노젓는 노래만이 들려온다. 비록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다 하여도 이 경치에 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있었던 마음에 두렵고 눈에 해괴한 모든 것들이 점차로 소멸되고 의연히 참선(參禪)의 경지에 들어갔다. 이런 뒤에 도산(陶山)의 절요(節要) 를 읽고 파옹(巴翁)의 철령시(鐵嶺詩)를 외면서, 조용히 마음으로 체험하고 읊조리면서 기운을 발설하니, 온 천하 사물이 하나도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하매 귀양살이의 신고(辛苦)는 족히 말할 것이 없었다. 내가 오래 앉아서 각기병(脚氣病)이 더칠 때에는 먼저 굴봉(窟峰)과 전정(前頂)에 올라 걸음을 시험하고, 다시 맨 꼭대기에 올라서 전산의 형태와 사면에 둘러 있는 수세(水勢)의 넓고 좁은 것과, 강만(岡巒)의 멀고 가까운 것을 일목(一目)에 다 보아 이 가슴을 한없이 넓히고 또 철마(鐵馬)와 원정(眢井)을 상세히 살피며,
    세상에 전하기를 고운(孤雲)선생이 당 나라에 들어갈 때 이 산에 올라 작은 샘을 파고 은배(銀盃)를 띄워 두었으며, 또 철마(鐵馬)를 두어 이 산기(山氣)를 진압케 하였다 한다. 그 후 철마는 그대로 전해 오고 은배는 근일에 와서 마을 사라이 훔쳐다 팔아먹었으며, 그 곳에 지내오던 제사마저 폐지하였다고 한다. 또한 1천 년 동안 흘러오는 신화같은 갖가지 고적까지 빠짐없이 구경한 끝에 비로소 이 산의 광경이 과거의 제주도에 못지 않고, 또 오늘의 걸음이 나의 곤경을 인내(忍耐)하는 데 일조가 될 것을 믿었다. 금번에 동행한 사람은 별감(別監) 양문환(楊文煥), 주인(主人) 문인주(文寅周), 팔금(八金) 김대현(金大鉉), 영장(領將) 손희종(孫熙宗), 솔겸(率傔) 김윤환(金允煥)이요, 때는 병자년 추석(秋夕)이었다.


    우이 한 봉우리 구름에 닿았으니, 一峯牛耳接雲高
    오르고 올라도 이 몸 피로 잊었네 登陟渾忘氣力勞
    아름다와라 저 바다의 수없는 섬들이며, 可愛層溟多少嶼
    파도야 치든말든 저 홀로 천년 만년. 萬年壁立敵洪濤


    다시 대흑산도에 들어가서 서재를 정돈하고 현판을 일신당이라 했다.
    마침 예닐곱 동자들이 조석으로 와서 글을 물으니 심히 귀양살이에 위로가 되다.
    再入大黑 定頓書塾 扁其楣曰 日新堂 有六七冠童 朝夕問字 頗慰湘纍之懷
    삼출의 행장이 문진에 익숙하니 三黜行裝慣問津
    모인 것은 태반이 글 읽는 사람이네. 會同半是挾書人
    오직 서재의 이름 없음을 한하여, 却嫌孤塾無題字
    오늘 아침에 일신이란 글자를 걸었네. 故向今朝揭日新

    지장암에서 글자를 새기고 곧 운자를 뽑다. 指掌巖刻字後拈韻
    조물주가 한 산을 나누어서, 化工分却一枝山
    저 파도 속으로 던졌구나. 擲入洪濤浩渺間
    많은 선비들은 속세를 피하여 들어오고, 强半衣冠曾避俗
    심상한 염장이라 구차스레 한가했네. 尋常炎瘴苟偸閒
    땅은 기역에 닿았으나 증거될 서적 없고, 地連萁城書無證
    역서는 숭정 숭정(崇禎): 명 의종(明 毅宗)의 연호.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을 사모하여 그가 망한 뒤에도 그의 역서(曆書)를 본다는 뜻.
    을 보니 세월이 얼마나 되었나? 曆玩崇禎歲幾還
    이 새김이 일은 적으나 뜻은 크니, 此刻雖徵關係大
    마을 사람아 가벼이 깍아 버리지 말게. 爲敎洞主莫輕刪
    한 부의 의리를 푸른 산에 물으니, 一部陽秋問碧山
    만 가지 만지면서 풀 언덕에 서 있구나. 摩挲佇丘草堤間
    사람들아 하늘 땅 비좁다 말라, 居人莫謂乾坤窄
    좁은 곳에도 일월은 한가하구료. 隙地從看日月閒
    양공의 마음에 얻은 것이 아니면, 非有良工心裏運
    누가 옛 모양을 다시 보도록 했으리. 誰模舊迹眼中還
    이땅 경계는 비록 변할 때 있으나, 職方版籍隨時變
    돌에 새긴 글자는 언제나 없어지지 않으리. 老石千年應不刪


    흑산 서재에서 여러 사람을 이별함. 留別黑山書社諸君
    서재에서 삼년 동안 묶여 있을 적에, 孤塾三年絆已時
    돌아갈 소식이 더딘 것도 몰랐네 . 於焉不覺赦鷄遲
    임금님 은혜는 하해같이 무겁건만, 特恩偏被山河重
    어리석은 천성은 한 치도 못 옮겼네. 愚性愧無寸尺移
    가르치고 배우는 데서 참 재미있었고 斅學相資方寓味
    이별하는 자리에서 슬픔만 알뿐이네 別離在卽却含悲
    말하노니 그대들은 부디 힘 모아서, 寄言群力能餘暇
    다른 날 지장암에 비 하나 세우게. 指掌巖邊建小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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