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와 문화 > 문화유산

글번호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63   [암태면] 암태면 문화유산 신안문화원 2008/2/12 4919


    [암태면] 암태면의 문화유산
    출처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8 《신안군문화유적분포지도》 신안군

    1. 新安 短庫里 千斗學記念碑 (신안 단고리 천두학기념비)
    소 재 지 : 암태면 단고리 단고마을
    시 대 : 1931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단고리 암태초등학교 정문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千斗學의 본관은 중국 潁陽, 자는 后彬이다. 그는 암태면에서 손꼽히는 지주였으며, 인품이 온후하고 덕망이 있어 주위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추앙을 받았다. 비는 公이 부지를 희사하여 암태초등학교를 건립하도록 도움을 주어 그 공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세워진 것이다. 비의 전면에는 ‘故參奉千公斗學獎學記念碑’라 새겨져 있고, 공의 행적에 대해 4언 절구로 ‘乃公一念 興學成鄕 中心恭敬 世物無彰 非曰名竪 非曰形仰 立石頌德 于彼高崗’이라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 신자료

    2. 新安 短庫里 短庫立石 (신안 단고리 단고입석)
    소 재 지 : 암태면 단고리 단고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거석기념물
    유적현황 : 단고마을에는 2기의 입석이 있다. ①은 장고마을에서 단고마을로 들어가는 마을입구에 있는 높이 131cm, 폭 40cm의 입석이다. 마을 金海金氏의 묘 밑에 위치하고 있어 ‘산소등 선돌’이라 불리며, 둥근 눈과 코, 귀 등 인면(人面)이 조각되어 있다. ②는 마을 서남쪽 외곽의 김만석씨 집 앞에 서있다. 크기는 높이 142cm, 폭 35cm, 두께 30cm의 입석이다. 마을의 모퉁이에 있다고 해서 ‘모태선돌’이라 불린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3. 岩泰島小作人 抗爭紀念塔 (암태도소작인 항쟁기념탑)
    소 재 지 : 암태면 단고리 542-1(단고마을)
    시 대 : 1998년
    종 류 : 기념물
    유적현황 : 항쟁기념탑은 ‘단고들’을 지나 면소재지로 들어서는 삼거리에 조성된 넓은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중앙부에 단을 형성하여 잔디를 조성하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8월에서 1924년 8월까지 전개되었다. 이는 서해안 섬들과 전국적인 소작쟁의의 계기가 되었으며,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 관헌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이에 1998년 조성면적 95평에 높이 6.74m의 기념탑을 건립하여 암태도의 숭고한 소작인 항쟁을 기념하고 있다.
    참고문헌 : 신안군 2006,『우리고장의 향토문화유적』.

    4. 新安 瓦村里 瓦村立石 (신안 와촌리 와촌입석)
    소 재 지 : 암태면 와촌리 와촌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거석기념물
    유적현황 : 와촌마을에는 ‘큰선돌(①)’과 ‘작은선돌(②)’이라 불리는 2기의 입석이 있다. 이 입석들은 마을 어귀 ‘선독거리’ 또는 ‘소꼬팽이’라 부르는 곳에 위치해 있다. ‘큰선돌(①)’의 크기는 높이 190㎝, 너비 60㎝, 두께 50㎝이다. ‘작은선돌(②)’의 크기는 높이 85㎝, 너비 53㎝, 두께 23㎝이다. 큰 선돌과 작은 선돌은 원래 와촌마을의 ‘저돌이’라는 곳에 있다가 30~40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5. 新安 瓦村里 安東權氏孝烈閣 (신안 와촌리 안동권씨효열각)
    소 재 지 : 암태면 와촌리 중흥마을
    시 대 : 1949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안동권씨효열각은 중흥마을 노인정의 좌측에 위치해있다. ‘효열각’이라 새겨진 석축의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이 나온다. 안동권씨 집안의 4명의 효자와 1명의 열녀를 기리기 위한 비각이다. 비의 주인공은 陽村 權近의 후예인 權一鍾-權從豊-密陽朴氏(烈女)-權章玉,原州李氏 이다. 4代동안 한가문에서 5명의 효자와 열녀가 나왔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후손인 權寧哲과 權寧順이 1949년에 비를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는 ‘安東權氏四孝一烈碑’라고 새겨져 있고, 비석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비문은 13행 30자로 새겨져 있고, 癸亥年에 鄭殷采가 撰하고, 1949년에 林哲周가 書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43㎝, 너비 53㎝, 두께 26㎝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6. 新安 瓦村里 中興祭堂 (신안 와촌리 중흥제당)
    소 재 지 : 암태면 와촌리 중흥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현황 : 중흥마을에는 원래 3곳의 당집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마을 중앙의 중당, 마을 아래쪽의 하당은 마을 도로 개설 과정 중에 유실되고, 현재는 상당의 당집만이 남아있다. 상당의 당집은 중흥마을 북쪽에 형성된 錐峰(159.8m)의 남동쪽 산사면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당제는 부정한 기운을 막기 위해 집집마다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치면서 1990년대까지 모셨으나 지금은 중단되었다. 현재는 관리가 되지 않아 당산나무와 당집으로 추정되는 원형의 벽체만이 남아있다. 벽체는 석재를 이용하였으며 크기는 잔존높이 120㎝로 대부분 유실되고 1/4정도 남아있다. 주변에는 잡목들 사이사이로 돌무더기가 흩어져 있으며, 제단이나 기타시설은 유실되어 확인 할 수 없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7. 新安 瓦村里 金處漢善政碑ㆍ李鎬俊不忘碑 (신안 와촌리 김처한선정비ㆍ이호준불망비)
    소 재 지 : 암태면 와촌리 남강진선착장
    시 대 : 1799년ㆍ1873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남강진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위치는 1970년대 초 새마을 사업으로 옮겨졌으며 비 3기는 유실되고 2기의 비만이 현 위치에 남아있다고 한다.
    ‘金處漢善政碑’는 1799년(정조 23년)에 나주제도민의 이름으로 건립된 것으로 당시 전라우수사 김처한의 휼은공덕을 기린 것으로 전면에는 ‘水使金公處漢恤隱善政碑’ 라는 비명과 사연송기가 좌우에 새겨져 있고 비 뒷면에 휼은 내용이 총 9행 260자로 기록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섬의 주민들이 5가지 민폐가 심하다는 탄원이 있어 가경3년에 조사케하여 그 중 4가지는 개혁하여 주민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주었고 1가지는 주민이 호소한 것과 부합되지 아니하여 그대로 두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50㎝, 너비 60㎝, 두께 28㎝이다.
    ‘李鎬俊不忘碑는 관찰사를 지낸 이호준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巖泰ㆍ八禽ㆍ其佐ㆍ安昌ㆍ黑山의 주민들에 의해 1873년에 세워진 것이다. 공의 행적에 대해서는 비석의 앞면과 뒷면에 4언 절구로 새겨져 있다. 비의 전면에는 ‘觀察使李公鎬俊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다. 이호준의 불망비는 암태도 이외에도 안좌면 자라도(1872년), 하의면 옥도(1873년), 신의면 상태서리에서도 확인된다. 규모는 높이 143㎝, 너비 53㎝, 두께 26㎝이다.
    참고문헌 : 신안문화원 2005,『신안문화』.

    8. 新安 道昌里 趙光泰遺蹟碑 (신안 도창리 조광태유적비)
    소 재 지 : 암태면 도창리 도창마을
    시 대 : 1948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805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와촌리로 들어가는 마을길이 나타난다. 마을길을 따라 와촌리를 지나 도창리로 가는 길목에 도창들이 펼쳐져 있다. 비는 도창들을 마주보며 도창리로 들어가는 마을 초입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는 趙光泰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공의 7世孫인 趙炳祚가 1948년에 세운 것이다. 조광태는 1729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잘 공경했다. 비의 전면에는 ‘贈通訓大夫司僕寺正金堤趙公遺蹟碑’라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丁亥年에 朴淇靑이 撰하고, 林哲周가 書했다. 규모는 높이 160㎝, 너비 47㎝, 두께 22㎝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9. 露滿寺 (노만사)
    소 재 지 : 암태면 수곡리 산508(수곡마을)
    시 대 : 1873년
    종 류 : 불교건축
    유적현황 : 노만사는 수곡리에서 북서쪽에 형성된 큰봉산(222.5m)에서 남쪽으로 해발 120m 지점의 산에 위치해있다. 1873년 창암 화상이 대흥사 분회로 설립했으며, 당시는 초가건물이었다. 그 후 1944년 암태면의 천복운씨가 사재를 들여 중수했다. 대지 150평에 칠성각, 법당, 해탈문, 종각 등 7동의 건물이 있다. 노만사는 약수가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 노만사라는 절 이름도 약수가 떨어지면서 이슬같이 가득하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 신안군 2006,『우리고장의 향토문화유적』.

    10. 新安 水谷里 文振炫碑 (신안 수곡리 문진현비)
    소 재 지 : 암태면 수곡리 수곡마을
    시 대 : 1943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도창리에서 수곡앞들을 지나 수곡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해 있다. 文振炫의 字는 汝玉, 號는 學愚이며, 본관은 남평이다. 高祖는 文孟童, 曾祖는 文宗曄, 祖는 文一周이고, 아버지 文東龜와 어머니 完山李氏의 아들로 1889년에서 巖泰坊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비의 전면에는 ‘大學士學愚堂南平文公之碑’ 라 새겨져 있고, 비의 측면에 후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공의 행적에 대해서 24행 31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癸未年에 林哲周가 撰․書한 것이다. 비의 주변은 붉은 벽돌로 둘러져 있다. 규모는 높이 126㎝, 너비 36㎝, 두께 36㎝이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11. 新安 水谷里 秋浦路道 (신안 수곡리 추포노도)
    소 재 지 : 암태면 수곡리 추포도
    시 대 : 미상
    종 류 : 도로
    유적현황 : 추포도는 남쪽의 ‘추엽도(秋葉島)’와 북쪽의 ‘포도(浦島)’가 연결되어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추포노도는 현재의 도로가 나기 전까지 수곡리와 연결되어 주민들이 간조(干潮)시에 건너다니던 길이다. 남쪽의 추엽도(秋葉島)와 북쪽의 포도(浦島)에서 각각 시작한 길이 중간 지점에서 서로 만나 연결되어 수곡방조제까지 연결된다. 폭은 2~3m 정도이고, 할석을 깨어 쌓고 사이에 자갈을 이용해 채워 넣었다. 현재 새로운 도로가 개설되어 노도길이 거의 이용되지 않아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포도에서 시작되는 길은 잘 남아있어 만조(滿潮)시에도 육안으로 관찰된다.
    참고문헌 : 신자료

    12. 新安 水谷里 路道碑 (신안 수곡리 노도비)
    소 재 지 : 암태면 수곡리 추포도
    시 대 : 조선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비는 수곡리에서 추포도로 새롭게 연결된 도로의 ‘딸망섬(梧島)’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추포노도길은 여러 사람들의 공으로 여러 해 동안 해일로 파손되었으나 다시 보수하여 완성하였으며 이를 기리고자 병인년(丙寅年) 12월에 비를 다시 세웠다. 주관자는 文德昌이며 부주관자 張應矣, 참가자 金三奉, 張汝成이다. 비의 전면에 ‘路道碑’라 새겨져 있으며 공덕도 함께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00㎝, 너비 43㎝, 두께 15㎝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13. 新安 水谷里 永慕齋 (신안 수곡리 영모재)
    소 재 지 : 암태면 수곡리 추엽마을
    시 대 : 1947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영모재는 추엽마을의 북쪽에 형성된 야산(38.8m)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있다. 재각 상량에 ‘歲丁亥四月’이라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947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모재는 전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재각 내 현판이 2개 걸려 있는데 왼쪽에는 중수기 현판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건축당시 성금을 걷은 명단이 있는 현판이 있다. 남평문씨 재각으로 현재도 매년 시제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 신자료

    14. 新安 基洞里 김병섭家屋 (신안 기동리 김병섭가옥)
    소 재 지 : 암태면 기동리 기동마을
    시 대 : 1840년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약 300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기동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안채만이 고가로 남아있는 본 가옥은 상량문에 “崇禎紀元後四己酉年九月……”이란 기록이 보이므로 1840년에 건축된 가옥으로 여겨진다. 평면은 중앙의 안방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뒷퇴와 우측 퇴문을 포함한 마래를 배치하고 우측으로는 정지와 그 전면에 모방을 드렸다. 정지와 모방 측면으로는 각각 땔감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와 갓방을 꾸몄는데 이 부분은 약 50년 전에 증축된 부분이라고 한다. 튓마루는 안방과 마래 앞쪽에 90㎝폭으로 설치하였다. 구조는 전후면과 우측면에 퇴문을 둔 2고주 5량가로 기단은 장대석 1벌대 쌓기로 되었다. 초가에서 장대석 기단 설치는 흔하게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초석은 막돌초석을 사용하였으며 기둥은 12×12㎝ 크기의 방주를 세웠다. 창호구성 중에는 마래의 우측면에도 판장문을 설치한 사실이 주목된다. 현재는 초가지붕을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하였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15. 松谷우실 (송곡우실)
    소 재 지 : 암태면 송곡리 284(송곡마을)
    시 대 : 1905년
    종 류 : 생활유적
    유적현황 : 송곡마을 입구에 있는 우실은 1905년 마을 앞을 지나가던 스님이 마을이 번창하고, 우환을 막으려면 담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어 팽나무 숲이 있던 현 위치에 돌을 쌓아 현재의 우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송곡우실은 현존하는 신안의 우실들 중 형태가 잘 보존된 것으로, 총 길이는 90m, 높이 2~4m의 규모로 단순한 층쌓기의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특히 마을로 통하는 출입구는 석축의 양쪽 끝부분을 외만시켜 양쪽의 석축이 교차하게 되었다. 따라서 통로 자체가 S자형으로 구부러지기 때문에 외부에서 마을이 쉽게 보이지 않게 축조되었다.
    참고문헌 : 신안군 2006,『우리고장의 향토문화유적』.

    16. 巖泰 松谷里 埋香碑 (암태 송곡리 매향비)
    소 재 지 : 암태면 송곡리 산185(해당마을)
    시 대 : 1405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매향비는 송곡마을의 넓은 ‘알실골들’이라는 간척지와 야산(81.2m) 사이에 있는데, 야산의 동쪽 산끝자락에 위치해있다. 원래는 약간 높은 산사면에 위치하였으나 수로공사시 현 위치로 옮겨졌다. 암태 송곡리 매향비는 조선시대 초기인 1405년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의 불교문화와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높은 역사적 가치가 있다. 매향은 말단 지방사회를 단위로 해서 구현되며, 특히 발원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실적 위기감을 바탕으로 한 순수한 민간신앙 형태라 할 수 있다. 매향비는 정제되지 않은 자연석의 평평한 면에 7행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제1행에 ‘埋香處伴巳島’라 하여 매향의 위치와 방위가 표시되었다. 아울러 사방기준지, 매향시기, 주도집단, 매향과 비를 세운 경위, 참여자, 시주자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매향의 주도층으로 ‘香徒’가 명시된 점과 ‘埋香處’를 명확하게 기록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규모는 높이 157㎝, 너비 65㎝, 두께 30㎝이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17. 新安 松谷里 活目立石 (신안 송곡리 활목입석)
    소 재 지 : 암태면 송곡리 활목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거석기념물ㆍ민속유적
    유적현황 : 활목마을에는 ‘선돌’ 또는 ‘선독’이라 불리는 입석이 있다. 입석은 마을 앞 팽나무 아래에 위치해 있다. 입석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새마을 사업 때 여러 번 자리를 옮겨 다니다가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다. 현재는 입석에 대한 어떤 의례적인 행위를 행하지는 않으나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입석에 왼새끼의 금줄을 친 후 메를 진설하고 병이 낫기를 기원한다고 한다. 크기는 높이 130cm, 폭 40cm, 두께 58cm이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18. 益今우실(익금우실)
    소 재 지 : 암태면 신석리 산251(익금마을)
    시 대 : 1830년대
    종 류 : 생활유적
    유적현황 : 익금우실은 익금마을의 북쪽에 형성된 야트막한 산(72.9m)과 산(61.9)사이에 나있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1830년경 오씨가 마을에 와서 익금, 신석 일대를 돌아보고 방풍 및 방파제로 사대문을 건립하여 농치를 동문, 생김을 서문, 오루골을 남문, 익금을 북문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북문인 익금 우실만이 남아있다. 익금우실은 네모난 석재를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았다. 현재 서벽은 점차 허물어지고 있어 그 형태가 알아보기 힘들다. 크기는 잔존높이 150㎝, 잔존너비 154㎝ 길이 400㎝이다. 동벽은 잘 남아있는데 크기는 높이 236㎝, 너비 190㎝(하단)~80㎝(상단), 잔존길이 33m이나 양 벽이 끝으로 갈수록 잡목이 우거져 정확한 길이는 확인하기 어렵다. 서벽과 동벽 사이의 트여진 출입구의 폭은 480㎝이다.
    참고문헌 : 신안군 2006,『우리고장의 향토문화유적』.






(58753) 전남 목포시 수강로3번길 14 신안군별관 2층 / 전화 : 061) 242-8131 / 팩스 : 061) 243-8132 / sa8131@kccf.or.kr
COPYRIGHT 2006 SHINANCULTURE.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