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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압해면] 왕산성지(王山城址) 신안문화원 2006/3/16 2081


    왕산성은 고이도(古耳島) 옥산(玉山)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다. 고이도는 압해도(押海島)․지도(智島)와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며, 무안반도가 건너다보이는 섬이다. 왕산성의 축조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고려 왕건과 관련된 일부 기록과 전설이 전해온다. 먼저 왕산성에 관한 최초의 문헌기록으로 『고려사절요』에 “(전략) 궁예가 알찬(閼粲) 종희(宗希)와 김언(金言) 등을 부장(副將)으로 삼고, 전함(戰艦)을 수리하여 광주(光州)와 진도군(珍島郡), 고이도성(皐夷島城)을 공격하고 덕진포(德津浦)로 나아가자, 견훤이 전함을 갖추어 목포(木浦)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수륙(水陸)을 종횡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후삼국시대 궁예와 견훤의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 신안 압해도와 영암 덕진포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궁예는 후고구려를 쟁패하고 후백제를 장악하기 위해 남하하였던 것이고, 서남해 섬을 거점으로 하여 후백제의 영역인 전라도의 내륙지방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궁예는 무안반도와 인접한 고이도를 요충지로 삼아 내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때 견훤은 내륙으로 진격하려는 궁예를 차단하기 위해 목포와 영암에 전함을 잇대어 놓고 대응하였다. 이런 까닭에 궁예는 후백제를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내륙과 인접한 고이도성(古夷島城)을 점거하였던 것이다. 고이도성은 곧 왕산성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후삼국시대에 이미 축성(築城)된 상태였다.
    현지 주민들에게도 이와 유사한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데, 바로 왕건과 고려건국에 얽힌 구전(口傳)이다. “고려 왕건은 왕망이라는 작은아버지가 있었는데, 왕망은 후삼국 평정에 참여하여 역할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고려건국이후 왕망은 왕건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이에 왕건을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역모를 실행하기도 전에 발각된 왕망은 고이도로 숨어 들어 군사를 모우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이에 왕건은 왕망을 공격하였고, 왕망은 끝내 투항하지 않고 접전을 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내용은 비록 구전에 불과하지만, 왕산성의 축성에 관한 자료라 생각된다.
    또 왕산성에 대한 기존의 조사 결과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왕산성은 둘레가 약 270칸의 석축성으로, 대부분 붕괴되어 있다. 고려 왕건의 동생이 해적(海賊)과 함께 왕건성을 근거로 하여 약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왕산성은 왕산(해발 80m)의 동남쪽 능선에서 확인된다. 현전하는 성축의 길이는 1km정도이며, 대부분 붕괴되어 있다. 규모는 높이 1.5m, 폭 3m 정도되며, 자연석과 잡석을 이용하여 쌓았다.
    한편 고이도와 인근 무안지방에 왕망과 얽힌 지명유래가 전해온다. 그 유형을 살펴보면, ①왕망이 도망하다 지팡이를 떨구었다는 ‘기둥바위(고이도 대촌마을)’ ②왕망이 도망하다가 자신이 사용하던 도장을 묻어 두었다는 무안 망운의 ‘도무치(큰바위)’ ③왕망이 빠져 죽은 무안 망운의 ‘고시’ 또는 ‘인바위’라 불리우는 연못 ④왕망이 고이도 앞바다를 통과하는 상선(商船)이나 세곡선(稅穀船)을 탈취하였다는 ‘돈바위’ ⑤왕망이 상선과 세곡선을 버렸다는 ‘배시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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