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와 문화 > 문화유산

글번호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67   [비금면] 비금면 문화유산 신안문화원 2008/2/12 9260


    [비금면] 비금면의 문화유산
    출처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8 《신안군문화유적분포지도》 신안군


    1. 新安 光大里 光大遺物散布地 (신안 광대리 광대유물산포지)
    소 재 지 : 비금면 광대리 광대마을
    시 대 : 삼국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 유물산포지는 광대마을과 인접한 남쪽사면부에 위치한다. 이곳은 마을 동쪽에 자리하는 ‘성치산(164m)’의 남서쪽 사면부 일대로 남쪽에 간척된 ‘홍래불들’이 자리하고 있으나 과거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2. 新安 光大里 光大古墳群① (신안 광대리 광대고분군①)
    소 재 지 : 비금면 광대리 광대마을
    시 대 : 삼국
    종 류 : 고분
    유적현황 : 고분은 광대마을 동쪽에 위치하는 ‘성치산(164m)’의 남서쪽 사면부에 위치한다. 이곳은 양성이씨의 문중선산으로 해발 30~40m 정도의 구릉상인데 안쪽으로 만입되어 있고 바다와 근접하여 팔금도ㆍ암태도가 보이며, 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기존조사에서는 “백제석실분을 비롯하여 석곽분ㆍ적석분 등 수기의 고분이 군집하고 있으며, 일제시대에 모두 도굴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곳을 고려장터라고 부른다”고 하여 과거에는 수기의 고분들이 집중 군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고분은 밭 경작과 민묘의 개설로 인해 대부분이 유실되고 수기만이 남아 있다. 기존조사에서는 ‘당두고분군’으로 명명되었으나 행정지명에 따라 ‘광대고분군①’로 정정하였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3. 新安 光大里 光大古墳群② (신안 광대리 광대고분군②)
    소 재 지 : 비금면 광대리 광대마을
    시 대 : 삼국
    종 류 : 고분
    유적현황 : 고분은 광대마을에서 북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산사면부에 위치한다. 이곳은 광대마을의 북쪽에 위치하는 ‘성치산(164m)’에서 서쪽으로 뻗어져 내려간 능선의 해발 40~50m 높이이다. 기 조사에서 “고분은 과거 밭갈이 도중에 쟁기에 돌이 걸려 이를 제거하면서 노출된 석실분으로 현재는 파괴되어 찾아 볼 수 없다.”고 하여 당시에도 상당한 훼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구토기호를 비롯한 토기 2점이 수습되어 면사무소에 보관하였으나 확인이 불가능하다. 현재 민묘의 조성과 밭 경작으로 대부분 유실되었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4. 新安 光大里 晋州姜氏貞閣 (신안 광대리 진주강씨정각)
    소 재 지 : 비금면 광대리 광대마을
    시 대 : 1954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광대마을 광대리사무소에서 남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貞閣門’ 이라고 쓰여진 석조외삼문 안에 정면ㆍ측면 1칸의 석조비각이 세워져있고, 내부에 ‘淑夫人晋州姜氏貞閣’비가 있다. 진주강씨(晋州姜氏)는 김윤모(金胤模)와 혼인한 후,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집안을 지켰다. 이러한 부인의 행실을 기리기 위해, 1954년에 세워진 비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5. 城峙山城地 (성치산성지)
    소 재 지 : 비금면 광대리 산65(성치산)
    시 대 : 조선
    종 류 : 성곽
    유적현황 : 성치산성은 비금도의 동북쪽 끝에 위치한 광대리 소재의 ‘성치산(164m)’ 정상부에 퇴뫼식으로 축조된 석축성이다. 산성의 성벽은 주로 동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성벽의 길이는 약 200m 정도이다. 남벽은 자연암벽으로 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곳곳에 치석(治石)한 석재를 쌓아 축조하였다. 서벽은 60~70m 정도의 길이로 축조되었는데, 자연암벽에 맞댄 부분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성벽 바깥쪽의 기저부는 130×25cm 정도의 장방형 판석형 석재를 이용하여 구축하고 그 위에 가로 50~60cm 세로 15~20cm 내외로 잘 다듬어진 방형 석재를 25단 정도 물려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또한 성벽의 안쪽은 암반에 의지하여, 바깥 성벽과 암반 사이에 할석을 채워넣는 방식의 내탁법으로 축조되었다. 성치산 암반의 곳곳에 돌을 떼어 낸 흔적 이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돌은 자체 조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6. 新安 龍沼里 龍沼遺物散布地① (신안 용소리 용소유물산포지①)
    소 재 지 : 비금면 용소리 용소마을
    시 대 : 고려~조선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 유물산포지는 용소마을과 인접한 남쪽의 저평한 구릉일대에 위치한다. 이곳은 과거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던 곳으로 현재 남쪽과 서쪽으로는 ‘성가래들’이 동쪽으로는 ‘홍래불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기존조사를 통해 회청색경질토기편, 청자편, 귀얄문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이 수습되었으나 현재는 밭과 논으로 경작되어 유물은 찾을 수가 없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7. 新安 龍沼里 龍沼遺物散布地② (신안 용소리 용소유물산포지②)
    소 재 지 : 비금면 용소리 용소마을
    시 대 : 삼국~고려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 유물산포지는 용소마을과 인접한 저평한 구릉(11m) 일대에 위치한다. 이곳은 과거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전에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던 곳으로 북으로는 ‘성치산(164m)’이 자리하고, 남쪽과 서쪽으로는 ‘성가래들’이 동쪽으로는 ‘홍래불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기존조사를 통해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청자편, 귀얄문 분청사기편 등이 다양한 수습되었으며, 현재에도 경작된 논과 밭 등지에서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8. 新安 龍沼里 密陽崔氏烈女閣 (신안 용소리 밀양최씨열녀각)
    소 재 지 : 비금면 용소리 용소마을
    시 대 : 1860년대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용소마을 비금동초등학교 우측 밭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석조건축이며, 외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있다. 비각 안에는 ‘烈女金道成妻崔氏之閣’ 비가 있다. 비에는 최씨부인을 추모하는 4언 절구의 글이 새겨져 있고, 비각 벽면 ‘烈女密陽崔氏旌閭重修記’에는 최씨부인의 열행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김도성(金道成)의 처 최씨부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9일 후에 남편의 무덤가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이러한 부인의 열행사실을 알리고자 1860년대 열녀각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9. 新安 龍沼里 慶州鄭氏烈女閣 (신안 용소리 경주정씨열녀각)
    소 재 지 : 비금면 용소리 용소마을
    시 대 : 1943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용소마을 비금동초등학교 뒤편에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지붕에 목조건축 양식을 모방한 막새기와가 새겨져 있다. 주위에 돌담이 둘러져있고, 돌담 중앙에 철문으로 된 외삼문이 있다. 열녀각 안에는 높이 130cm, 너비 46cm, 두께 15cm의 ‘烈婦慶州鄭氏紀行碑’가 있다. 경주정씨는 김정수(金挺洙)의 부인으로, 부인의 열행사실을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현손(玄孫)들이 1943년에 열녀각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10. 新安 龍沼里 李載珪紀蹟碑閣 (신안 용소리 이재규기적비각)
    소 재 지 : 비금면 용소리 용소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용소마을 비금동초등학교 우측에 있으며, ‘密陽崔氏烈女閣’과 마주하고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석조건물로 내부에 높이 121cm, 너비 46cm, 두께 17cm 규모의 ‘藕泉先生紀蹟碑’가 있다. 이재규(李載珪)의 자(字)는 원욱(元旭)이고 호(號)는 우천(藕泉)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이 높았으며, 성품이 올바르고 진실하였다. 이에 제자들이 스승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비각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11. 新安 道古里 道古山城址 (신안 도고리 도고산성지)
    소 재 지 : 비금면 도고리 도고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성곽
    유적현황 : 산성은 도고마을 동쪽에 자리한 ‘小峰(56.1m)’이라 불리는 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이 산은 주민들이 속칭 ‘산성메(뫼)’라 부르는 곳으로 과거 동ㆍ남쪽으로는 해안과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成峙山城이, 서쪽으로는 도고리 평야지대가 조망되는 곳이다. 남고북저형의 이 산은 남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동ㆍ서ㆍ북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존조사에서 “산성은 정상부에 축조된 퇴뫼식으로 둘레 100m, 폭 5m, 높이 2m 정도이다. 일부 도괴된 단면을 통해 볼 때 성벽은 築石 후 그 위에 成內部의 흙을 削土하여 덮은 石心土築城으로 보인다. 현존 석벽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북벽을 볼 때 이 산성은 상하 2단에 이중으로 축조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KT송신탑과 등산로의 개설로 인해 대부분의 성벽이 유실되었으며 일부구간만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12. 新安 道古里 道古石長栍 (신안 도고리 도고석장승)
    소 재 지 : 비금면 도고리 도고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ㆍ거석기념물
    유적현황 : 도고마을 천주교 동부성당 옆 김종학씨 집 담벼락에 1기의 석장승이 있다. 상당부분 비바람에 깍여 나갔으나, 사람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듯 보이며, 하단에는 ‘大將軍’ 이라고 새겨져 있다. 규모는 높이 184cm, 너비 50cm, 두께 26cm이다. 도고마을 당제의 제의 대상이었으나 제의가 중단된 지 50여년이 넘어 제의일시나 제의순서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며, 원래 2기의 석장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 : 신자료

    13. 新安 佳山里 羅拜遺物散布地 (신안 가산리 나배유물산포지)
    소 재 지 : 비금면 가산리 나배마을
    시 대 : 고려~조선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 유물산포지는 나배마을 북서쪽에 위치하는 야산(30.8m) 서쪽 사면부에 위치한다. 이곳은 과거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원래 섬이었던 곳으로 동쪽으로는 황해와 인접하고 서쪽은 ‘벚섬들’이, 북쪽은 ‘성가래’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은 양식장과 염전이 섬을 감싸고 있다. 기 조사에서 회청색경질토기편, 청자편,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이 수습되었으나 밭으로 경작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유실되어 현재는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14. 新安 飛禽島 대동鹽田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소 재 지 : 비금면 가산리 123-35외
    시 대 : 1948년
    종 류 : 어염업
    유적현황 : 1948년경에 비금도의 450세대 주민들이 염전조합을 결성, 100여ha가 넘는 광활한 대동염전을 조성하였으며, 이는 폐염된 경기ㆍ인천지역의 주안ㆍ남동ㆍ군자ㆍ소래염전을 제외하고는 설립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대동염전이 처음 조성되었을 당시 염부가 150명, 보충염부 50명으로 한 작업에서 15일 이내에 소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당시에 비금중앙초등학교에 ‘천일염전기술자양성소’가 설치되어 염전기술자를 양성하였고, 이들 염전기술자들을 중심으로 ‘수림 염전개발기술조합’이 결성되었다. 그 후 여기에서 활동한 기술자들이 인근 도서지역과 완도군, 해남군, 무안군, 영광군, 고창군, 부안군, 군산 등지에 진출하여 천일염전 조성공사에 참여함으로써 해방 후의 우리나라 염전발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15. 新安 池堂里 池洞保護樹 (신안 지당리 지동보호수)
    소 재 지 : 비금면 지당리 912(지동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노거수
    유적현황 : 지동마을 입구 지동경로당 앞에 있다. 3기의 팽나무로 수령은 280년이다. 나무의 규모는 높이 11m, 흉고둘레는 2.7~2.9m에 이른다. 세 그루의 나무 모두 생육상태가 양호하고, 뒤편의 언덕과 어울려 숲처럼 경관을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

    16. 新安 池當里 池洞碑群 (신안 지당리 지동비군)
    소 재 지 : 비금면 지당리 지동마을
    시 대 : 근대~현대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지동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변에 4기의 비가 서있다. 이 비들은 진주강씨문중(晋州姜氏門中)에서 건립한 것으로, 2기는 강씨문중의 효자와 효열부의 효행사실을 기록한 효열비이고, 2기는 해은선생(海隱先生)과 송사선생(松史先生)의 비로 후진양성에 대한 기념비이다. 4기의 비에 대한 현황은 다음과 같다. ① ‘孝子姜公永式紀實碑’ (높이 162cm, 너비 52cm, 두께 23cm, 庚辰年) ② ‘孝烈婦密陽朴氏紀實碑’ (높이 156cm, 너비 51cm, 두께 21cm, 戊寅年) ③ ‘海隱先生姜公序會興學碑’ (높이 167cm, 너비 53cm, 두께 22cm, 辛巳年) ④ ‘松史先生姜公師賢紀念碑’ (높이 147cm, 너비 54cm, 두께 23cm, 1990).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17. 新安 舊林里 劉泰鉉紀行碑 (신안 구림리 유태현기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구림리 수림마을
    시 대 : 1941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용호마을에서 수림마을로 향하는 도로에서 남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전면에 ‘沙隱先生劉泰鉉紀行碑’라고 명문되어 있으며, 비의 크기는 높이 129cm, 너비 44cm, 두께 20cm이다. 유태현(劉泰鉉)의 자(字)는 성원(性源)이고, 호(號)는 사은(沙隱)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향리에서 덕을 베푸니 선생을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선생의 후손들과 문인들이 1941년 기행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18. 新安 舊林里 玄基奉紀念碑 (신안 구림리 현기봉기념비)
    소 재 지 : 비금면 구림리 구기마을
    시 대 : 1915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비는 비금 중ㆍ고등학교로 향하는 도로 우측 산록에 위치한 ‘盧道基紀行碑閣’ 앞에 ‘金貞鉉記行碑’와 함께 위치한다. 비의 전면에 ‘成均生員玄基奉璘德紀念碑’라고 새겨져 있고, 여백에 현기봉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현기봉(玄基奉)은 승지(承旨) 현이두(玄以斗)의 후예로, 1879년에 태어났다. 이 비는 현기봉이 베푼 덕을 기리기 위해 1915년에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높이 144cm, 너비 54cm, 두께 18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19. 新安 舊林里 金貞鉉記行碑 (신안 구림리 김정현기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구림리 구기마을
    시 대 : 1949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비는 비금 중ㆍ고등학교로 향하는 도로 우측 산록에 위치한 ‘盧道基紀行碑閣’ 앞에 ‘玄基奉紀念碑’와 함께 위치한다. 비 전면에 ‘小塢金先生貞鉉記行碑’라 쓰여져 있고, 여백에 4언 절구의 추모글이 새겨져 있다. 소오선생(小塢先生)의 이름은 김정현(金貞鉉)이며, 남오(南塢) 노도기(盧道基)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 비는 김정현의 문하생들이 스승을 추모하면서 1949년에 건립한 것이다. 비의 규모는 높이 130cm, 너비 51cm, 두께 20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20. 新安 舊林里 盧道基紀行碑閣 (신안 구림리 노도기기행비각)
    소 재 지 : 비금면 구림리 구기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비각은 비금 중ㆍ고등학교로 향하는 도로 우측 산록에 위치한다. 광산노씨 노도기(盧道基)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각으로, 시멘트 담장으로 지어진 건물 내부에 ‘南塢居士盧道基紀行碑’가 서있다. 비각 앞에 외삼문이 있고, 외삼문은 붉은 기와를 올려놓은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외삼문 밖에는 2기의 비(玄基奉紀念碑, 金貞鉉記行碑)가 서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21. 新安 舊林里 文包旭記行碑 (신안 구림리 문포욱기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구림리 용호마을
    시 대 : 1946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용호마을 남쪽 200m 지점에 위치한다. ‘竹坡先生記行碑’로 죽파선생의 이름은 문포욱(文包旭), 자(字)는 근호(謹昊)이고, 호(號)는 죽파(竹坡)이다. 공은 향리에서 후진을 양성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선생을 경사(經師)라 칭송하였다. 이런 공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46년 건립된 비로, 규모는 높이 155cm, 너비 51cm, 두께 20cm 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22. 新安 新元里 劉春烈記行碑 (신안 신원리 유춘열기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신원리 자항마을
    시 대 : 1941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신촌마을에서 자항마을로 가는 도로변에 ‘黃忠熙紀蹟碑’와 함께 있다. 비의 전면에 ‘東岡劉先生記行碑’라고 명문되어 있다. 또한 4언 절구의 내용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동강선생(東岡先生) 유춘열(劉春烈)의 자(字)는 충집(忠集)이며, 향리의 선생이었다. 행실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행동은 아홉 번 생각하여 실천에 옮겼다. 이런 선생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41년에 건립한 비이다. 비의 규모는 높이 138cm, 너비 52cm, 두께 22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23. 新安 新元里 黃忠熙紀蹟碑 (신안 신원리 황충희기적비)
    소 재 지 : 비금면 신원리 자항마을
    시 대 : 1949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신촌마을에서 자항마을로 가는 도로변에 ‘劉春烈記行碑’와 함께 있다. 비의 전면에 ‘竹岡黃先生紀蹟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있다. 죽강선생(竹岡先生)의 자(字)는 학래(鶴來), 휘(諱)는 충희(忠熙), 본관은 창원이다. 사람들에게 학문을 전하고, 일을 추진함에 의(義)로서 행한 죽강선생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제자들이 1949년에 건립한 것으로 비의 규모는 높이 134cm, 너비 59cm, 두께 16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24. 新安 古西里 古幕保護樹 (신안 고서리 고막보호수)
    소 재 지 : 비금면 고서리 177(고막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노거수
    유적현황 : 고막마을 남쪽 200m 지점의 산 계곡에 위치한다. 수령 370년의 팽나무 1기로 나무둘레 5.6m, 높이 18m에 이른다. 수관이 화려하고, 생육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참고문헌 :

    25. 新安 古西里 郭台鍊紀行碑 (신안 고서리 곽태련기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고서리 서산마을
    시 대 : 1928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서산마을 길가에 위치한다. 서강선사(西岡先師) 곽태련(郭台鍊)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후에 문하생들을 훈육하였다. 이에 1928년 공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전면에 ‘西岡先師玄風郭公台鍊紀行碑’라고 명문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53cm, 너비 50cm, 두께 16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26. 新安 古西里 이별단家屋 (신안 고서리 이별단가옥)
    소 재 지 : 비금면 고서리 862(서산마을)
    시 대 : 192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서산마을의 위쪽에 위치하는 가옥으로, 좌측으로부터 정지 2칸, 안방 1칸, 모방 1칸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정지의 끝칸 앞으로는 전퇴선 앞으로 약간 돌출되게 모방을 1칸 규모로 드렸다. 2칸으로 된 정지칸은 다른칸 보다 폭이 좁다. 전퇴에는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도서지방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평면유형이다. 현재 새집을 지어 거주하고, 뒤쪽에 옛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27. 新安 古西里 문귀단家屋 (신안 고서리 문귀단가옥)
    소 재 지 : 비금면 고서리 865(서산마을)
    시 대 : 192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실배치는 좌측으로부터 정지 1칸 반, 안방 1칸, 마래 1칸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정지의 끝칸 앞으로는 전퇴선 앞으로 약간 돌출되게 모방을 1칸 규모로 드렸다. 정지가 다른 실들에 비해 규모가 거의 2배에 달하지만 앞쪽의 모방으로 인해 출입구는 다소 협소하다. 측간채는 대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평면은 동그란 원형으로 되어 있고, 구조는 죽담구조로 되어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28. 新安 古西里 황백철家屋 (신안 고서리 황백철가옥)
    소 재 지 : 비금면 고서리 404(서산마을)
    시 대 : 193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193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一’자형 가옥이다. 안채의 구성이 전면에 툇간을 두고 좌측으로부터 모방, 정지, 안방, 마래의 순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전면으로는 정지부분만 제외하고 모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각 실의 규모가 정지를 제외하고 거의 비슷하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29. 新安 古西里 黃敬熙記行碑ㆍ黃丞憲紀積碑 (신안 고서리 황경희기행비ㆍ황승헌기적비)
    소 재 지 : 비금면 고서리 서산마을
    시 대 : 1946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서산마을 길가에 ‘郭台鍊紀行碑’와 30m 거리를 두고, 2기의 비가 위치한다.
    1기의 비는 ‘菊坡黃先生記行碑’로 국파(菊坡) 황경희(黃敬熙)를 추모하기 위해 1946년에 건립되었다. 황경희의 자는 영민(英敏)이며, 서강(西岡) 곽태련(郭台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62cm, 너비 49cm, 두께 19cm이다.
    다른 한기는 ‘西隱黃公孝行紀績碑’로 서은(西隱) 황승헌(黃丞憲)의 효행사실을 기록한 비이다. 공은 서강(西岡) 곽태련(郭台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우애가 돈독하고, 효행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46년에 건립된 비로 규모는 높이 160cm, 너비 54cm, 두께 23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30. 西山寺 (서산사)
    소 재 지 : 비금면 고서리 985-1
    시 대 : 1920년
    종 류 : 불교건축
    유적현황 : 서산사는 창건연대는 명확하지 않고, 1390년 내월리 선왕산 뒤편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위축되었던 포교활동이 1898년 목포개항과 함께 다시 시작되었으나 큰 성과가 없게 되자, 1920년에 절터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신도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3차례에 걸쳐 중창이 되었으며, 현재의 법당은 1989년에 개축한 것이다. 대웅전 1동과 요사채 2동, 탑 1기가 있는 서산사는 불교의 미타신앙과 용왕신 혹은 산신 등 토착신앙이 복합되어있는 사찰이다.
    참고문헌 : 신안군 2006,『우리고장의 향토문화유적』.

    31. 七發島 海鳥類繁殖地 (칠발도 해조류번식지)
    소 재 지 : 비금면 고서리 산243ㆍ244
    시 대 : 미상
    종 류 : 번식지
    유적현황 : 칠발도는 일곱 개의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져 속칭 ‘일고바리’라고도 불린다. 해발 104m정도에 불과하여 밀물 때에는 7개, 썰물 때에는 8개의 바위봉우리가 우뚝 솟아 보인다. 바다 가운데 돌출한 경사가 60° 이상이나 되는 가파른 등대 섬이기도 하다.
    2월부터 11월까지 바다제비ㆍ바다쇠오리ㆍ슴새 등 많은 희귀한 바다철새들이 집단으로 번식한다. 이곳의 풀과 나무들은 찾아드는 철새들에게는 먹이가 되거나 숨을 수 있는 장소가 되는 등 훌륭한 서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칠발도는 철새들의 이동경로상의 출발지점이며 또한 철새들의 휴식지로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참고문헌 : 신안군 2006,『우리고장의 향토문화유적』.

    32. 新安 德山里 光山盧氏紀蹟碑 (신안 덕산리 광산노씨기적비)
    소 재 지 : 비금면 덕산리 망동마을
    시 대 : 1941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망산마을에서 한산마을로 가는 도로변의 저수지 맞은편에 위치한다. ‘烈婦光山盧氏紀蹟碑’는 1941년 열부 광산노씨의 열행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광산노씨는 감역(監役) 김재국(金在國)과 혼인하였으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부인은 수절하면서 가문을 수호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50cm, 너비 55cm, 두께 22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33. 新安 德山里 姜萬秀紀行碑ㆍ姜千秀孝行碑 (신안 덕산리 강만수기행비ㆍ강천수효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덕산리 망동마을
    시 대 : 1948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망동마을 초입에 2기의 비 ‘姜萬秀紀行碑’와 ‘姜千秀孝行碑’가 위치한다. 강만수(姜萬秀)의 자(字)는 정안(正安)이고, 호는 국사(菊史)이다. 부모님을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고, 마을에 선행을 베푼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1948년 건립된 비로 ‘參奉晋州姜公萬秀紀行碑’(높이 122cm, 너비 42cm, 두께 18cm)라고 새겨져있다. 다른 한기의 비는 강천수(姜千秀)의 효행비로, 강천수의 자는 천봉(千封), 호는 매은(梅隱)으로 강만수의 동생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병든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전면에 ‘梅隱晋州姜公千秀孝行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건립연대는 1948년, 규모는 높이 112cm, 너비 41cm, 두께 15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34. 新安 德山里 邑洞碑群 (신안 덕산리 읍동비군)
    소 재 지 : 비금면 덕산리 읍동마을
    시 대 : 1939ㆍ1947ㆍ1974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구림리에서 면소재지로 향하는 사거리 도로변에 4기의 비가 위치한다. 2기는 전(前) 면장(面長)의 기념비이고, 나머지 2기는 명남철(明南喆)과 조대형(趙大亨)의 기념비이다. 비의 주인공들은 모두 향촌발전에 공(功)을 세운사람들로, 현황은 다음과 같다.

    번호 / 비명 / 연도 / 규모(높이. 너비. 두께 cm) / 내용
    1 / 英陵參奉趙大亨慈善紀念碑 / 1939 / 154, 52, 21 / 선행을 행함
    2 / 前面長李鳳來功績紀念碑 / 1939 / 147, 51, 21 / 소작인을 위한 교각건설
    3 / 前面長金赫聲慈善記念碑 / 1947 / 131, 44, 17 / 농업용수시설물 설치
    4 / 南波明南喆先生功德記念碑 / 1974 / 124, 45, 19 / 교통시설, 마을봉사활동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35. 新安 竹林里 晉州姜氏烈行碑 (신안 죽림리 진주강씨열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죽림리 상암마을
    시 대 : 1945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상암마을회관에서 30m정도 떨어진 남쪽 산자락에 ‘全州李氏烈行碑’와 함께 있다. 강씨부인은 김해김씨 문중으로 출가하여 얼마 되지 않아 남편과 사별하였으나,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어린 아들을 양육하면서 가문을 지켰다. 이러한 강씨부인의 열행사실을 기리기 위해 1945년(乙酉年)에 세운 비로, 규모는 높이 147cm, 너비 52cm, 두께 22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36. 新安 竹林里 密陽朴氏烈女閣 (신안 죽림리 밀양박씨열녀각)
    소 재 지 : 비금면 죽림리 상암마을
    시 대 : 1946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상암마을 남쪽 두 곳의 농기계보관창고 사이에 위치한다. ‘密陽朴氏烈行碑’가 내부에 있고, 비 주위로 돌담이 둘러져 있으며, 외삼문은 철제로 된 창살문으로 되어있다. 밀양박씨는 김용율(金容律)의 처로, 자녀교육은 물론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이러한 박씨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946년(丙戌年)에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37. 新安 竹林里 全州李氏烈行碑 (신안 죽림리 전주이씨열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죽림리 상암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상암마을회관에서 30m정도 떨어진 남쪽 산자락에 ‘晉州姜氏烈行碑’와 함께 있다. 이씨부인은 김옥독(金玉篤)과 혼인하였으나, 일찍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수절하면서 문중을 수호하였다. 이러한 이씨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로, 규모는 높이 140cm, 너비 53cm, 두께 21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38. 新安 竹林里 完山李氏孝烈閣 (신안 죽림리 완산이씨효열각)
    소 재 지 : 비금면 죽림리 임리마을
    시 대 : 1934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임리마을회관 옆에 위치한다. 석조건물의 효열각 지붕은 목조건축 양식을 모방한 지붕이 올려져 있으며, 지붕 위에는 막새기와가 조각되어 있다. 비각 안에 ‘完山李氏婦人孝烈之閭’라 새겨진 비가 있다. 규모는 높이 133cm, 너비 49cm, 두께 18cm 이다. 이씨부인은 조준용(趙俊龍)과 혼인하였으나 남편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시부모님을 봉양하고 가문을 지켰다. 이러한 이씨부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34년 효열각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39. 新安 竹林里 崔碩斗記行碑 (신안 죽림리 최석두기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죽림리 죽치마을
    시 대 : 1937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죽치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10m 정도 떨어진 곳에 ‘崔門勝紀蹟碑閣’이 있다. 비의 전면에 ‘竹軒崔先生記行碑’라 새겨져 있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122cm, 너비 42cm이다. 죽헌선생의 이름은 최석두(崔碩斗)이며, 자는 우홍(佑洪)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전을 두루익혀, 향당(鄕黨)의 사표(師表)로 추앙되었다. 또한 후진양성에 힘쓰니 제자 박시풍(朴時豊)등이 1937년 기행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40. 新安 竹林里 崔門勝紀蹟碑閣 (신안 죽림리 최문승기적비각)
    소 재 지 : 비금면 죽림리 죽치마을
    시 대 : 1940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죽치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崔碩斗記行碑’와 10m 정도 떨어져있다. 비각과 외삼문은 석축으로 되어있고, 최근에 담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비각안에 ‘前監察崔公紀蹟碑’(높이 130cm, 너비 48cm, 두께 20cm)가 세워져있다. 최문승(崔門勝)의 본관은 경주이며, 문숙공 최선의 후예이다.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40년에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41. 新安 竹林里 張碩疇紀蹟碑 (신안 죽림리 장석주기적비)
    소 재 지 : 비금면 죽림리 죽치마을
    시 대 : 1940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죽치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비의 전면에 ‘一樵先生仁同張公紀蹟碑’라 새겨져있으며, 비 주변에 돌담이 둘러져있다. 규모는 높이 156cm, 너비 53cm, 두께 23cm이다. 일초선생의 이름은 장석주(張碩疇)로 자(字)는 낙형(洛衡)이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고, 선비들과 교류함에 신의를 돈독히 하여 향리사람들에게 이름이 높았다. 이에 제자들이 선생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1940년(庚辰年)에 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42. 新安 內月里 朴斗植記行碑閣 (신안 내월리 박두식기행비각)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외촌마을
    시 대 : 1932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죽치마을에서 외촌마을로 향하는 도로변에 있다. 비각은 목조건축양식을 모방한 석조건축이며, 지붕에 막새기와를 새겨놓았다.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내부에 ‘松坡朴斗植先生記行碑’가 있다. 규모는 높이 144cm, 너비 45cm, 두께 18cm이다. 박두식의 자(字)는 자율(子律)이며,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의 후예이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경전에 밝아 향리의 사표(師表)가 되었으며, 고종 때 오위장(五衛將)에 증직되었다. 이러한 공의 행적을 기려 제자들이 1932년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43. 新安 內月里 노정달家屋 (신안 내월리 노정달가옥)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내촌마을
    시 대 : 190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건물은 ‘一’자형 5칸 집으로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마래, 안방, 정지, 모방 순으로 꾸며져 있다. 정지는 폭이 좁은 2칸이며 모방 뒤쪽으로는 정지 쪽에서 출입문을 둔 헛간을 두었다. 구조는 전면만 목구조이고 후면은 죽담구조로 되어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44. 新安 內月里 金玉光ㆍ金啓得ㆍ金達仁孝子閣 (신안 내월리 김옥광ㆍ김계득ㆍ김달인효자각)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내촌마을
    시 대 : 1944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외촌마을에서 내촌마을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하며, 효자각 앞에 ‘劉護種記蹟碑’가 위치한다. 효자각에는 3대에 이르는 김옥광(金玉光), 김계득(金啓得), 김달인(金達仁)의 효행사실을 기록한 3개의 비가 서있다. 각각의 비의 명칭과 규모는 다음과 같다. ①‘童蒙敎官朝奉大夫金玉光配令人密陽孫氏’ (높이 120cm, 너비 40cm, 두께 20cm), ②‘童蒙敎官朝奉大夫金啓得配令人懷德宋氏’ (높이 120cm, 너비 40cm, 두께 20cm), ③‘童蒙敎官朝奉大夫金達仁配令人密陽朴氏’ (높이 120cm, 너비 40cm, 두께 32cm). 비는 갑신년(甲申年)에 건립된 것이다. 한편 효자각 바로 앞에 ‘通定大夫金斗熙親族紀念碑’ (높이 63cm, 너비 25cm, 두께 8cm)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비의 내용을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45. 新安 內月里 鄭基周孝子碑 (신안 내월리 정기주효자비)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내촌마을
    시 대 : 1956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외촌마을에서 내촌마을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다. 전면에 ‘孝子慶州鄭公基周之碑’라 새겨져 있으나, 다른 비문(碑文)이 없어 자세한 효행사실은 알 수 없다. 1956년(丙子年)에 건립된 비로, 규모는 높이 79cm, 너비 33cm, 두께 15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46. 新安 內月里 劉護種記蹟碑 (신안 내월리 유호종기적비)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내촌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외촌마을에서 내촌마을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다. 전면에 ‘劉孝子記蹟碑’라 새겨져있고, 뒷면에 어머니 봉양에 정성을 다한 효행 사실이 새겨져있다. 유호종(劉護種)은 문희공(文僖公) 유창(劉敞)의 후예이며, 향리에 소문난 효자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84cm, 너비 39cm, 두께 39cm이며, 비 주위에 작은 기둥이 사면에 서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47. 新安 內月里 內村祭堂 (신안 내월리 내촌제당)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내촌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현황 : 내촌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정부터 정월 보름날 새벽 2시까지 ‘당제’와 ‘거리제’라 불리는 마을공동체의례가 거행된다. 당제의 제신은 마을 뒷산인 仙王山의 이름과 같은 ‘선왕신(서낭신)’이다. 선왕신에게 마을에 풍농과 평안, 객지에 나간 사람의 무사고 등의 기원이 행해진다. 당제는 선왕산 중턱에 있는 童子像 앞에서, 거리제는 마을 입구 길가에서 행해진다. 원래는 당제에 神體가 없었고 선왕산 중턱 두 개의 바위 틈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다 1947년 이 마을의 유지가 이곳 두 개의 바위 사이에 동자상을 세웠고, 이 상이 당제의 신체가 되었다. 이 동자상은 높이 100cm, 둘레 64cm, 얼굴길이 26cm 에 머리에는 16cm의 관을 쓰고 있다. 동자상의 전면 기단부에는 이 상의 건립연대와 '仙王山 神靈之位'란 명문이 새겨져있다. 동자상 바로 밑에 맞배 함석지붕으로 된 당집이 있다. 당제는 제장 아래에서 농악군이 치는 걸궁소리와 함께 시작되는데, 진설ㆍ분향ㆍ강신ㆍ독축ㆍ초헌ㆍ아헌ㆍ종헌ㆍ첨잔(添盞)ㆍ유식(侑食)ㆍ사신(辭神)ㆍ소지(燒紙)의 순으로 진행된다. 한편 거리제는 당제 이후에 임자없이 떠도는 잡신들을 달래기 위한 제의로, 내촌마을에서는 마을 입구 길가에서 짚을 깔고 당제의 제물 조리 때에 따로 마련해 두었던 밥과 범벅떡 등을 창호지에 싸서 진설한 후 헌작ㆍ독축ㆍ헌식의 순으로 간단히 지낸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48. 飛禽島 內村마을 옛 담장 (비금도 내촌마을 옛 담장)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679-1일원(내촌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생활유적
    유적현황 : 내월마을은 담장 전체가 돌담으로 형성되어 있다. 대개 마을 뒤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납작한 돌과 각형의 막돌을 사용하여 쌓은 것으로, 돌담의 폭은 40~60cm, 높이는 1.5m정도이다. 가옥 부속채가 담장 역할을 한 곳도 있고, 새마을 운동 당시 마을길을 넓히면서 돌담을 물려쌓은 경우도 있다.
    참고문헌 :

    49. 內月우실 (내월우실)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산88-2(내촌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생활유적ㆍ민속유적
    유적현황 : 우실은 마을의 울타리로 나무우실, 돌담우실 등 다양하다. 신안지역의 우실은 바닷물이나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과 농작물을 보호하며, 풍수적으로 마을의 약한 부분을 보강해 주고 마을의 안과 밖을 경계하는 구실을 담당한다. 방풍림의 역할뿐 아니라 지역과 마을 특성에 따라 마을 공동체의 신이 좌정하고 있는 신성지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내월리 마을은 하누넘에서 불어오는 ‘재냉기(재넘어에서 부는 바람)’ 로 농사를 망치곤 하였는데 이곳에 돌로 담을 쌓고 바람을 막아 농작물 피해를 최소화하고 마을의 재앙을 막았다고 한다. 남아있는 우실의 규모는 길이 40m, 높이 3m 폭 1.5m이며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참고문헌 : 신안군 2006,『우리고장의 향토문화유적』.

    50. 新安 內月里 군사시설유적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월포ㆍ내촌마을
    시 대 : 근대
    종 류 : 정치국방유적
    유적개요 : 유적은 내월리 월포마을과 내촌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지맥에 10기가 산발적으로 위치한다. 대부분의 시설이 바닷가를 등지고 마을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산정상부 또는 중턱의 바위산을 ‘ㄴ’자로 굴착하여 바닥을 평편하게 한 후 석재를 이용해 담을 쌓았다. 시설의 규모는 둘레 20~30m, 높이 2~3m 정도이다. 마을을 향하여 포문을 개방하였으며, 내부에는 석축 또는 시멘트로 된 ‘回’자 형의 시설이 관찰된다. 이것은 포를 지지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군사시설은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장악하기 위한 목적의 포대시설과 주변 섬을 관방하기 위한 관측시설이 공존하고 있다. 주변의 비금ㆍ도초 주민들이 징용되어 시설을 축조하였으며, 일본군이 퇴각할 때 고의로 파괴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 안쪽에 병참무소와 발전소가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신자료

    51. 新安 內月里 月浦保護樹 (신안 내월리 월포보호수)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949-3(월포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노거수
    유적현황 : 내촌마을에서 월포마을로 들어오는 마을의 초입에 있다. 둘레 320m, 수고 18m에 이르는 주엽나무 1기로, 수령은 120년이다. 나무의 생육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참고문헌 :

    52. 新安 內月里 전순단家屋 (신안 내월리 전순단가옥)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월포마을
    시 대 : 190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이 가옥은 20세기 초반쯤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채만이 남아있는 가옥이다. 평면은 신안 도서지역(흑산도 제외)의 전형적인 유형, 즉 모방이 건물 전면선 보다 약간 돌출된 4칸 4실로 되어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53. 新安 內月里 月浦空家 (신안 내월리 월포공가)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월포마을
    시 대 : 190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월포마을 맨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립년도는 20세기 초에서 중반사이로 여겨진다. 안채는 4칸 ‘一’자형 집으로 평면은 좌로부터 1칸씩 모방, 정지, 안방, 마래 순으로 드려져 있다. 정지 쪽만 제외하고 전퇴에는 모두 툇마루가 놓여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54. 新安 內月里 姜周範ㆍ姜進秀孝子閣 (신안 내월리 강주범효자각ㆍ강진수효자각)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월포마을
    시 대 : 1924ㆍ1947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월포마을 동쪽 초입에 위치하며 ‘黃成基記行碑’와 100m 정도 떨어져 있다. 하나의 울타리 안에 ‘姜周範孝子閣’과 ‘姜進秀孝子閣’이 있다. ‘姜周範孝子閣’은 석조건물로 내부에 높이 121cm, 너비 44cm, 두께 17cm의 ‘孝子晋州姜周範紀行碑’가 서있다. 강주범은 어려서부터 부친을 극진히 봉양하여, 1887년 정려를 포상 받았으며, 효자각은 1924년에 건립된 것이다. 다른 비각은 ‘姜進秀孝子閣’으로, 석조건물 내부에 ‘竹軒姜公孝行紀念碑’(높이 112cm, 너비 46cm, 두께 20cm)가 서있다. 강진수(姜進秀)의 호는 죽헌(竹軒), 자는 덕무(德武)로 강주범은 공의 당숙(堂叔)이다. 강진수는 어머니가 96세에 이를 때까지 극진히 봉양하여 향촌민들이 효심을 기리기 위해 1947년 비각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55. 新安 內月里 黃成基記行碑 (신안 내월리 황성기기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월포마을
    시 대 : 1947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월포마을 동쪽 초입에 위치한다. 비의 전면에 ‘逸圃居士黃成基記行碑’라고 새겨져 있다. 황성기(黃成基)의 자(字)는 형래(亨來), 호(號)는 일포(逸圃)로, 성장하여 문장에 능하였고, 문하에서 수학하는 유생들이 많았다. 훗날 비금도에서 향약을 시행하여 미풍양속을 교화하였다. 이러한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47년 건립된 비로, 규모는 높이 144cm, 너비 53cm, 두께 22cm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56. 內月里 石長栍 (내월리 석장승)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1068-1(월포마을)
    시 대 : 1955년
    종 류 : 거석기념물ㆍ민속유적
    유적현황 : 이 석장승은 월포마을의 풍수비보를 위해 화강암으로 조영된 신앙물이다. 마을입구 ‘사장거리’ 또는 ‘자장’이라 불리는 공터 한쪽에 서있다. 월포 사람들이 ‘대장군’, ‘장석’, ‘장성’, ‘장군’이라 부르는 이 석장승은 높이 298cm, 폭 60cm의 대형 장승으로, 머리에 투구를 쓰고 두 손으로 1.5m의 장검을 거머쥐었으며 눈을 위로 치켜 떠 마을 앞의 숭애봉을 주시하고 있다. 장승의 기단 전면에는 ‘大將軍’이란 명문과 함께 ‘檀紀 四二八八年 乙未年’(1955년)이라는 건립연대가 새겨져있다. 숭애봉의 세찬 기 때문에 마을에 액운이 겹치자 주민들이 큰 바위돌을 구해 세웠다고 전한다. 이 석장승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 ‘장승제’가 거행된다. 장승제는 자정에 거행되는 월포마을 산제의 하당제에 해당되는데, 장승 앞에 짚을 깔고 진설, 헌작, 재배, 구축의 간단한 순서로 거행된다. 제관 외에는 아무도 당에 오를 수 없는 산제와는 달리 장승제에는 주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57. 新安 內月里 月浦祭堂 (신안 내월리 월포제당)
    소 재 지 : 비금면 내월리 월포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현황 : 월포마을은 매년 정월 보름 자정에 ‘산제’, ‘산신제’, ‘당제’라 불리는 마을공동체 의례를 거행한다. 이 의례는 마을 뒷산 상봉의 ‘산신당’, ‘산당’이라 불리는 곳과 산당 아래에 쥐신을 모신 ‘쥐당’, 제기를 보관하고 제관이 제물을 준비하는 ‘社神堂’에서 거행된다. 이 중 산당은 높이 116cm, 폭 193cm 크기의 원형석단으로 내부는 ‘社神主 檀紀 4288年’(1955년)이라 새긴 평편한 돌이 세워져 있으며 주위는 자연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이곳에 깃들어 있는 堂神은 山神ㆍ당할머니ㆍ당할아버지 세분으로 알려져 있다. 산당에서 거행되는 산제는 정월 14일 밤 10시경, 제물을 진설한 후 헌작ㆍ재배ㆍ독축ㆍ소지의 순으로 진행된다. 산제가 끝난 후 제관은 쥐당 바위틈에 제물 일부를 참종이로 싸서 넣고, 쥐에게 한 해 농사를 해치지 말아달라고 口誦하고 내려오고, 마을 입구 석장승 앞에서 하당제를 지내는데 이 제의를 ‘장승제’라 부른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58. 新安 水大里 江陵劉氏紀行碑 (신안 수대리 강릉유씨기행비)
    소 재 지 : 비금면 수대리 대두마을
    시 대 : 1949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대두마을 초입에 위치한다. 비의 전면에 ‘貞婦江陵劉氏紀行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비의 내용은 유씨부인과 남편 전백춘(田佰春)의 선대와 부인의 열행사실이 새겨져있다. 유씨부인은 전백춘과 혼인한 후, 남편이 유학을 떠난 후에도 묵묵히 궁색한 살림을 도맡았고, 병든 시부모님을 봉양하였다. 이러한 유씨부인의 행실을 알리기 위해 1949년 전씨문중에서 부인의 기행비를 건립하였다. 비석은 이수와 비좌를 갖추고 있으며, 특히 이수부분은 목조양식에 꽃장식이 새겨져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2 -비금면 편-』.

    59. 新安 水大里 金融組合施設 (신안 수대리 금융조합시설)
    소 재 지 : 비금면 수대리 수도마을
    시 대 : 근대
    종 류 : 상업/유통
    유적개요 : 유적은 수도마을에서 수대선착장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무실, 창고, 소장사택으로 이루어진 금융조합시설로, 1940년대에 비금면ㆍ도초면ㆍ흑산면을 관할하고 있었다. 현재의 농협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해방이후 196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강형열씨의 사유재산으로 된 후 내부공간을 변경하여 현재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 신자료






(58753) 전남 목포시 수강로3번길 14 신안군별관 2층 / 전화 : 061) 242-8131 / 팩스 : 061) 243-8132 / sa8131@kccf.or.kr
COPYRIGHT 2006 SHINANCULTURE.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