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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압해면] 압해면 문화유산 신안문화원 2008/2/12 5322


    [압해면] 압해면의 문화유산
    출처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8 《신안군문화유적분포지도》 신안군

    1. 新安 伏龍里 南村遺物散布地 (신안 복룡리 남촌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복룡리 남촌마을
    시 대 : 구석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남촌마을은 저평한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주민 대다수가 해태양식과 과수원, 농작물을 키우며 생활하고 있다. 안산(43.8m)이라 불리는 야산을 지나 남쪽으로 길게 발달한 구릉지대를 볼 수 있는데, 유물은 이 일대에서 수습되었다. 기존조사에서 격지류와 대형 석부편이 확인되었으며, 석재는 응회암제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2. 新安 伏龍里 細川遺物散布地① (신안 복룡리 세천유물산포지①)
    소 재 지 : 압해면 복룡리 세천마을
    시 대 : 구석기ㆍ청동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마을 남서쪽에 저평하게 형성된 구릉 남쪽사면에서 석기류가 수습되었다. 유물이 수습된 일부 지역의 맨 아래층에 뻘층이 보이고 있어 구릉의 바로 아래 부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조사에서는 구석기시대ㆍ청동기시대의 석기들이 확인되었으며, 낮은 구릉과 사면에 제4기 퇴적이 잘 남아있어 구석기유적이 넓게 분포할 가능성도 높다. 현재 이곳은 과수원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참고문헌: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3. 新安 伏龍里 細川遺物散布地② (신안 복룡리 세천유물산포지②)
    소 재 지 : 압해면 복룡리 세천마을
    시 대 : 구석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면소재지에서 세천마을로 가는 길목 도로 좌측에 인매산(138.2m)이 자리 잡고 있다. 유적은 인매산 서쪽 산사면 중턱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넓게 바다가 보인다. 유물은 주로 석부편과 격지들로 복룡리 일대에서 확인된 유물과 같은 재질이며 형태도 유사하다. 현재는 개간되어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4. 新安 伏龍里 細川支石墓 (신안 복룡리 세천지석묘)
    소 재 지 : 압해면 복룡리 세천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지석묘는 남촌마을 저장창고 맞은편에 1기가 위치하고 있다. 이 지석묘는 이동되어진 것으로 원래는 세천마을 입구의 도로 북쪽 박종옥씨 소유의 밭에 있었는데, 일명 ‘벼락바위’라고 불리었다. 지석묘는 장방형인데 남-북 방향으로 반파되었고, 파괴된 부분의 북벽장벽 판석이 노출되어 있다. 기존조사에 따르면 상석의 크기는 장축 260㎝, 단축 130㎝, 두께 80㎝이다. 현재의 상석 형태는 방형이고 장축방향은 남-북 방향이며,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참고문헌: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5. 新安 伏龍里 朴云化不忘碑 (신안 복룡리 박운화불망비)
    소 재 지 : 압해면 복룡리 효지마을
    시 대 : 1923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효지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朴云化施惠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는 공을 기념하기 위해 1923년에 세워진 것이다. 비의 왼쪽에는 1979년에 효지리 마을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監察朴公慈善碑’가 있다. 비문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비문의 내용을 해석하기 불가능하다. 규모는 높이 106㎝, 너비 41㎝, 두께 16㎝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6. 錦山寺 (금산사)
    소 재 지 : 압해면 가룡리 산22-2
    시 대 : 1904년
    종 류 : 불교건축
    유적현황: 금산사는 금산(101.4m)의 남쪽 골짜기 산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金山寺序’에 의하면 “갑술년에 압해도 분매리에 거주하는 강성규, 목포의 강영옥씨와 부인 배씨 등이 이곳에 들러 산수가 좋고 경치가 수려하여 불심을 전파하고자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81년 사찰이 보수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3년 중창된 것이다. 사찰은 대웅전 1동, 산신각․칠성각 1동, 요사채 1동, 자명당 1동, 극락전 1동 등 총 5동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6,『압해 하수처리시설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7. 新安 駕龍里 永慕齋 (신안 가룡리 영모재)
    소 재 지 : 압해면 가룡리 무학마을
    시 대 : 1919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영모재는 무학마을의 동쪽에 있는 무학산(57.3m)의 남쪽 산사면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김해김씨 문중 재각으로 상량에 ‘庚子年’이라 새겨져 있어 1919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25년에 한 차례 중수가 되었으며 최근 2004년에 다시 중수되었다. 김해김씨 후손들은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이곳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다. 영모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재각 정면에 ‘永慕齋’(甲寅年, 朴學周 記)라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8. 新安 駕龍里 天安全氏紀實碑 (신안 가룡리 천안전씨기실비)
    소 재 지 : 압해면 가룡리 무학마을
    시 대 : 1946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무학마을의 남쪽 진입로 입구에 비가 위치하고 있다. 비 주위로 낮은 담장이 둘러져 있다. 전씨의 본은 천안이며, 金相秋와 혼인하였다. 남편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그러나 끝내 남편이 사망하자 장례를 치른 부인은 남편의 묘역에서 움집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丙戌年에 기실비를 건립하였다. 비 앞면에는 ‘節婦全氏紀實碑’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전씨부인의 열행사실이 비문(11행 33자)으로 남아있다. 현재는 담장의 한쪽 벽면이 무너져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9. 丁氏始祖墓 (정씨시조묘)
    소 재 지 : 압해면 가룡리 산165-2(봉진원마을)
    시 대 : 통일신라(추정)ㆍ1857
    종 류 : 분묘ㆍ유교건축
    유적현황: 정씨시조묘는 압해정씨 도선산(都先山)이 있는 유두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우측 아래에는 추원재가 있다. 시조는 대양군 정덕성이으로, 당나라 덕종 16년(800년)에 남양 대천리에서 출생하여 1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당나라 무종 때에 대승상겸 대양군에 봉작되었다. 선종 7년(853년) 신라에 유배되었다. 유배 시 장남 정연도, 차남 정웅도와 함께 압해도에 입도하여 압해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장남은 “영광 정씨파” 차남은 “나주 정씨파”로 분파되었다. 추원재는 압해정씨 문중 재각으로 大陽君․筽城君․錦城君․義昌君 등 4위를 봉안하고 있으며, 1857년에 창건되어 한차례 중수된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이며, 팔작지붕이다. 추원재 앞에는 ‘丁氏始祖大陽君行蹟碑’와 압해정씨 도선산을 조성하는데 공을 세운 3명의 공적비인 ‘東溪․愚山․林軒三先生功績綜合碑’가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10. 新安 新龍里 會龍支石墓群 (신안 신용리 회룡지석묘군)
    소 재 지 : 압해면 신용리 회룡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회룡마을 북쪽 야산(44.7m) 중턱의 소로 옆에 1기가 있다. 이곳은 마을 뒷산의 남동쪽 지류로서 완만한 능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목교마을과 바다가 펼쳐져있다. 기존조사에서는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300m 떨어진 야산에 5기의 지석묘가 남-북 방향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1기의 지석묘만 지금의 자리로 이동되어졌다.
    참고문헌: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11. 新安 新龍里 會龍遺物散布地 (신안 신용리 회룡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신용리 회룡마을
    시 대 : 삼국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회룡마을 입구에서 동-서로 뻗은 완만한 구릉 경사면에 해당하며, 마을 안쪽에서 보았을 때 수호식품 앞쪽에 입지하고 있다. 유적의 북쪽에는 회룡지석묘군이 위치한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유물로는 회청색경질 구연부편과 파상문이 새겨진 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박물관 2006,『압해 하수처리시설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12. 新安 新龍里 흙성안土城 (신안 신용리 흙성안토성)
    소 재 지 : 압해면 신용리 회룡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성곽
    유적현황: 회룡마을에서 추섬으로 난 소로를 따라 2㎞정도 가다보면 추섬제방에 이른다. 지금은 매립되어 추섬과 연결되어 있다. 흙성안토성은 추섬제방으로 진입하기 전 남동쪽의 산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흙성안토성은 바다를 면한 곳에 판축한 토성이다. 토성은 동-서 방향으로 높이는 약 4m, 밑변은 약 8m에 달하며, 현재 남아있는 길이는 200여m 정도이다. 토성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편이고, 북문으로 추정되는 곳도 눈에 띤다. 토성은 조선시대에 萬戶가 살았으며 치도의 선창을 이용하여 지방의 식량을 조정으로 운반하는 임무, 또는 외적의 침범 등을 막는데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토성 위로 숲이 우거져 있어 심각한 훼손을 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우거진 숲 때문에 토성의 윤곽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렵다. 토성의 반대편에는 삭토되어 급경사를 이룬다. 기존조사에서는 성 바로 아래에 있는 밭에서 토기편과 도자기편들이 수습되었다. 이들은 작은 편들이어서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신용리건물지에서 수습된 것들과 동시기로 추정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13. 新安 新龍里 會新遺物散布地① (신안 신용리 회신유물산포지①)
    소 재 지 : 압해면 신용리 회신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회신마을 서쪽에 자리잡은 안산(38.5m)의 북쪽사면으로 흘러 내려가는 구릉 일대에서 유물이 확인되었다. 산을 전체적으로 과수원으로 개간하여 이용되고 있으며 하단부에는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땅이 척박한 편이며 돌이 많은 편이다. 유물은 기존조사에서 두부가 전면 마연되고 인부만 타격되어 있는 석부편이 확인되었다. 기존 조사에서는 ‘회신Ⅰ유적’, ‘신용유물산포지①’로 보고되었으나, 행정명에 따라 ‘회신유물산포지①’로 정정하였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14. 新安 新龍里 會新遺物散布地② (신안 신용리 회신유물산포지②)
    소 재 지 : 압해면 신용리 회신마을
    시 대 : 삼국~고려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회룡마을의 남쪽에 위치한 안산(39.4m)의 북쪽 산사면에 넓게 형성되어 있다. 현재 산사면은 밭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축산시설이 있다. 기존조사에서 유물은 소량의 경질토기편과 우각형파수 1점이 확인되었으나, 이번조사에서는 경질토기편과 고려시대 도기편, 청자편 등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15. 新安 新龍里 建物址 (신안 신용리 건물지)
    소 재 지 : 압해면 신용리 86-1(회신마을)
    시 대 : 고려
    종 류 : 주거유적
    유적현황: 회신마을에서 동쪽으로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곳은 과거 ‘곱촌’또는 ‘고읍촌’으로 불리던 곳으로 북쪽에 자리한 ‘뒷산(42.0m)'의 남사면부이다. 유적은 신안군민체육관 진입도로 개설공사구간 내에 포함되어 2004년에 목포대학교박물관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건물지 3동이 확인되었으며 고려시대 잔과 접시를 비롯한 청자편과「大近惠○癸卯三月」명 기와편 등 다량의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5,『신안 신용리 건물지』.

    16. 新安 新龍里 鶴洞支石墓 (신안 신용리 학동지석묘)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학동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곱촌마을에서 소로를 따라 200m 정도 가면 뒷산의 동쪽 구릉 끝자락 밭둑에 1기의 지석묘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해발 33.5m의 능선 사면에 해당하며, 주변에는 민묘들이 있다. 지석묘의 주위에는 많은 할석들이 확인되었다. 상석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장축 320㎝, 단축 240㎝, 두께는 45㎝이다. 장축방향은 남동-북서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나무가 우거져 상석의 존재만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17. 新安 鶴橋里 鶴洞遺物散布地① (신안 학교리 학동유물산포지①)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학동마을
    시 대 : 철기~고려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회신마을의 동쪽으로 뒷산(33.5m)이 있으며, 뒷산의 남쪽으로 요살이산이 위치한다. 유적은 뒷산의 남쪽 구릉사면부터 요살이산과 그 주변 구릉이 해당되며, 뒷산과 요살이산의 중간부분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현재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유물이 지표면에 산재되어 있다.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 자기편, 석기 등이 확인되었다. 요살이산에는 많은 양의 옹기편들이 있었다고 하나 이번 조사에서는 나무가 우거져 확인이 어려웠다. 유물산포지는 ‘신용건물지’ 와 ‘학동지석묘’를 포함한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5,「신안군스포츠센터 조성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신안 신용리 건물지』.

    18. 新安 鶴橋里 鶴洞遺物散布地② (신안 학교리 학동유물산포지②)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학동마을
    시 대 : 철기~고려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학동마을 북쪽에 위치하는 뒷메(해발 50.6m)와 양알산(해발 49.0m) 및 그 주변 구릉산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현재 밭과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지표면에는 많은 양의 유물이 산재되어 있다.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과 옹관편, 자기편, 기와편, 석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유적은 서쪽으로 학동유물산포지①과 동쪽으로는 해안선과 접해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5,「신안군스포츠센터 조성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신안 신용리 건물지』.

    19. 新安 鶴橋里 姜圭煥旌閭閣 (신안 학교리 강규환정려각)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학동마을
    시 대 : 1891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학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 떨어져 있다. 학동마을의 남서쪽에는 간척지가 펼쳐져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바다와 인접해있다. 유적은 마을 내에 위치하며, 앞에는 당산나무가 있다. 강규환은 학교리에서 출생하였다. 가정이 빈곤하여 6세의 나이로 늙고 병약한 부모를 봉양하였다. 이러한 그의 효행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1891년(고종 28년) 예조에서 효자로 포상되었다.
    효자각은 정면ㆍ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내부에는 ‘贈童蒙敎官陞通政大夫晋州姜公諱圭煥孝行旌碑配淑夫人文化柳氏’라 명문 된 1기의 비가 있고, 벽면에는 旌閭記가 있다.
    이밖에 정려각 앞에 2기의 비가 있다. 하나는 ‘孝子晋州姜公遺墟碑’이고, 다른 하나는 ‘贈童蒙敎官陞通政大夫晋州姜公諱圭煥孝行旌碑配淑夫人文化柳氏’이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20. 新安 鶴橋里 鶴洞祭堂 (신안 학교리 학동제당)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학동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ㆍ노거수
    유적현황 : 학동마을의 도제는 30여전 전에 중단되었다가 1992년부터 부활되어 다시 모시고 있다. 학동마을의 마을제사는 ‘도제’ 또는 ‘당산제’라고도 부르며 주민들은 제를 통해 마을의 평안과 무사고를 기원한다. 제당은 마을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로 몸통이 5.5m에 이르는 느티나무이며, 제의 신격은 당산할머니이다. 제는 음력 1월 3일 저녁 11시 무렵 시작되어 진설ㆍ헌작ㆍ재배ㆍ독축ㆍ재배ㆍ소지 순으로 진행된다. 제가 끝나면 풍물을 치고 골목길을 행진해 내려오다가 서쪽 샘, 동쪽 샘 앞에서 간단하게 굿을 친다. 다음날 아침에는 마을회관에 모여 주민들과 함께 음복을 하고 제관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주민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지만 제의가 부활되면서 마을사람들 간에 전통연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주민 간에 동질감 회복에도 기여한 면이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21. 新安 鶴橋里 木橋支石墓群① (신안 학교리 목교지석묘군①)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목교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지석묘는 마을 서쪽에 위치한 구릉 정상부에 3기가 있다. 3기의 지석묘 중 1기는 마을의 서북쪽 150m 지점에 있으며,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2기가 있다. 기존조사에 따르면 1기가 위치한 곳에는 원래 8기의 상석이 있었으며, T자형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남서쪽에 위치한 2기의 지석묘는 현재 밭 경작으로 인해 밭둑에 걸쳐져 있고, 상석의 남쪽 하부가 심하게 유실되어 있다.
    참고문헌: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22. 新安 鶴橋里 木橋支石墓群② (신안 학교리 목교지석묘군②)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목교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가다보면 가룡리와 복룡리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 옆으로는 돈사가 있는데 유적은 돈사 뒤편에 있는 산길의 좌측에 지석묘 3기가 입지하고 있다. 상석의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3기 중 1기는 하부구조가 파헤쳐져 있고, 다른 1기는 지석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묘실의 판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산재해 있다.
    참고문헌:목포대학교박물관 2006,『압해 하수처리시설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23. 新安 鶴橋里 木橋遺物散布地① (신안 학교리 목교유물산포지①)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목교마을
    시 대 : 청동기~삼국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유적은 회룡마을과 목교마을 사이의 북쪽에 위치한 야산(57.5m) 남동쪽 산사면 말단부에 해당한다. 유적의 남쪽에는 목교패총이 자리하고 있다. 기존조사에서 토기편과 격지류와 회청색경질 구연부편 등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24. 新安 鶴橋里 木橋遺物散布地② (신안 학교리 목교유물산포지②)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목교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목교마을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공안산(63.8m)이 있다. 유적은 공안산의 남쪽에 있는 골 주변에 입지하고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삼들이골’ 이라고 부른다. 대부분 계단식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기존조사에서 토기와 격지 및 석부편이 수습되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석부 역시 학교리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는 다른 석기의 격지들과 마찬가지로 응회암제로 만들어져 있다. 이번조사에서는 유물을 확인할 수 없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25. 新安 鶴橋里 木橋遺物散布地③ (신안 학교리 목교유물산포지③)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목교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유적은 마을 서쪽에 위치한 구릉 정상부에 해당한다. 이곳은 마을 북서쪽에 자리한 야산(57.5m)의 가지성 구릉지역으로 유적의 서쪽에는 ‘목교지석묘군①’ 이 남서쪽으로는 ‘목교패총’ 이 입지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기존조사에서 유구석부편이 확인 되었으나 이번조사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26. 新安 鶴橋里 木橋遺物散布地④ (신안 학교리 목교유물산포지④)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목교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가룡리와 복룡리로 가는 갈림길 우측의 폐돈사 남쪽에 자리한 구릉 사면부에 해당한다. 기존조사에서는 이 지역 일대에 4기 퇴적층이 잘 남아있으나 구석기시대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응회암제 석부편이 수 점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조사에서는 유물을 확인할 수 없었으며, 현재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27. 新安 鶴橋里 木橋貝塚 (신안 학교리 목교패총)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목교마을
    시 대 : 철기
    종 류 : 패총
    유적현황: 유적은 목교마을에서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낮은 야산(10.9m)의 동쪽사면에 해당되며,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패총이다. 간척사업 전에는 바닷물이 유입되었던 지역으로 가까운 곳에 바다가 위치하고 있다. 도랑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유실되어 약간의 패각층과 패각류가 흩어져 있다. 패각층상에서 적갈색 연질토기편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28. 新安 鶴橋里 越浦遺物散布地① (신안 학교리 월포유물산포지①)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월포마을
    시 대 : 구석기~삼국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 월포마을에서 남서쪽으로 발달한 저평한 ‘궁개들’은 간척사업 이전에는 바닷물이 유입되었던 곳이다. 유적은 이 궁개들 일대이다. 기존조사에서 유물은 큰 격지 1점과 양면박리한 소형 양면찍개 1점, 경질토기 구연부편 등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구릉 하부로 흘러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제4기 퇴적이 잘 형성되어 있어, 더 많은 구석기 유적이 확인될 수 있는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이곳은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29. 新安 鶴橋里 越浦遺物散布地② (신안 학교리 월포유물산포지②)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월포마을
    시 대 : 삼국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면소재지에 있는 압해중학교와 압해고등학교 사이에 소로가 있는데, 유적은 이 소로의 중간부분에 입지하고 있다. 이곳의 지형은 저평한 구릉사면 끝자락이다. 유적의 남동쪽은 간척된 농경지가 조성 되어 있는데, 간척되기 이전에는 유적의 가까운 곳까지 바닷물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유물로는 타날된 황갈색 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박물관 2006,『압해 하수처리시설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30. 新安 鶴橋里 丁南鎭紀念碑 (신안 학교리 정남진기념비)
    소 재 지 : 압해면 학교리 월포마을
    시 대 : 1935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압해면사무소 옆, 즉 수성당 앞에 소재하고 있다. 정남진은 압해면장을 역임하였던 인물로 1935년에 압해면민일동이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비 앞면에는 ‘前面長丁南鎭功勞紀念碑’가 새겨져있으며, 4언 절구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76㎝, 너비 53㎝, 두께 23㎝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6,『압해 하수처리시설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31. 新安 東西里 西村遺物散布地 (신안 동서리 서촌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서촌마을
    시 대 : 청동기~삼국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서촌마을과 동촌마을 사이의 논을 경계로 해서 동쪽을 동촌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을 서촌마을로 구분하였다. 유적은 서촌마을 새마을농협창고 뒤편에 위치한 구릉정상부와 사면부에 입지하고 있다. 이곳의 지형은 서촌마을 북서쪽에 위치한 야산(41m)의 지맥이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가지성 구릉이다. 기조사에서 마연된 석기와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32. 新安 東西里 西村古墳 (신안 동서리 서촌고분)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서촌마을
    시 대 : 삼국
    종 류 : 고분
    유적현황: 월포리에서 대천리로 향하는 2번 국도를 따라 ‘궁개들’을 지나 200m 정도 가면 우측으로 얕은 구릉이 있다. 구릉 주변을 1~2m정도 삭토하여 밭으로 경작하고 있으며, 구릉 정상부에는 민묘와 수리시설이 있다. 유물은 수리시설을 만들면서 드러난 지표상에서 수습되었다. 수습된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으로 격자문과 승선문 등이 시문되어있다. 유물은 주로 구릉의 정상부에서 확인되며 주변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2~3m 정도 높이의 구릉으로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말무덤’으로 불리고 있어 삼국시대 고분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신자료

    33. 新安 東西里 東村遺物散布地 (신안 동서리 동촌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동촌마을
    시 대 : 청동기~삼국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마을 북쪽에 자리한 구릉사면부로 서촌마을의 복음동서교회 맞은편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의 지형은 북서-남동방향의 길게 뻗은 구릉으로 유물은 남동방향 구릉 끝자락에서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유물은 유구석부편,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박물관 2006,『압해 하수처리시설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34. 新安 東西里 東村空家 (신안 동서리 동촌공가)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동촌마을
    시 대 : 1900년대 추정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가옥은 마을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으로 100여년전쯤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안채와 행랑채가 평탄한 지형에 ‘ㄱ'자형으로 앉혀져 있고, 헛간채 1동이 안채 전면에 놓여있다. 안채는 모방을 전면에 둔 新安도서지역의 대표적 유형인 전면 4칸 4실 구조로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가옥이 낮고 각 실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안방의 전면 출입문(630㎝×139㎝)과 봉창(420㎝×610㎝)도 매우 작다. 행랑채는 헛간, 방, 정지로 꾸며진 3칸 3실 구조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35. 新安 東西里 道唱遺物散布地① (신안 동서리 도창유물산포지①)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도창마을
    시 대 : 구석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마을에서 서쪽으로 500m 거리에 자리한 구남봉재의 남쪽으로 발달된 구릉사면부에 해당한다. 기존조사에서는 석부 1점이 수습되었는데 이 석부는 응회암제로서 복룡리를 비롯한 압해도 여러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석기나 격지들과 동일한 석재이다. 현재 유적의 주변으로 민묘가 조성되어 있고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36. 新安 東西里 道唱遺物散布地② (신안 동서리 도창유물산포지②)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도창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마을의 북쪽으로 비교적 높은 구릉인 수안들(41m)이 있는데 유적은 수안들 일대 정상 부근에 해당한다. 유적의 남쪽으로는 도창지석묘와 도창입석이 입지하고 있다. 기존조사에서 반월형석도편과 석부편이 수습되었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일부 민묘로 조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37. 新安 東西里 道唱支石墓 (신안 동서리 도창지석묘)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도창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도창마을의 서쪽 구릉상에 1기의 지석묘가 있는데, 이곳은 동서리 입석에서 북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구릉으로 원래는 6~7기가 있었으나 모두 소멸되고 1기만 남아있다. 상석의크기는장축 430㎝, 단축 190㎝, 두께 85㎝이다.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동-서이다. 기존조사에서는 지석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조사에서는 주위의 밭둑이 허물어지면서 1개의 지석이 노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참고문헌: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2,『향토문화』제7집.

    38. 新安 東西里 金洪連紀念碑ㆍ金啓斗孝子閣 (신안 동서리 김계두효자각ㆍ김홍연기념비)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도창마을
    시 대 : 1929년ㆍ1940년
    종 류 : 유교건축ㆍ비갈
    유적현황: 도창마을 신대복씨의 집 내에 소재하고 있다. 金洪連功績紀念碑는 과거에 서촌마을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김홍연은 압해면장과 동서리 진흥회장을 역임 하였다. 이에 1940년 동서리 진흥회원 일동이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비를 건립하였다. 규모는 높이 124㎝, 너비 39㎝, 두께 18㎝이다. 김계두는 김홍연의 부친이며, 효자각 내에 효자비가 소재하고 있다. 비는 高光善이 識하였으며, 朴相九가 書하였다. 1929년에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6,『압해 하수처리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39. 東西里선돌 (동서리선돌)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648-1(도창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거석기념물
    유적현황 : 도창마을에서 조천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에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입석은 그 사이에 경작되고 있는 밭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주민들은 ‘장수지팡이’, ‘장군바위’등으로 부른다. 크기가 커서 힘센 장수들이 지팡이로 썼다는 설화와 송장수가 자신의 부하 사병을 매장한 뒤 그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입석을 세웠다는 설화 등이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동서리 지석묘 근처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지석묘와 함께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墓標와 같은 성격을 띠는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현재 남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으며, 과거에는 더 높았는데 많이 줄었다고 한다. 입석의 규모는 높이 4.8m, 둘레 1m, 두께 0.5m이다.
    참고문헌 :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2,『향토문화』제7집.

    40. 新安 東西里 錫類齋 (신안 동서리 석류재)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군암동마을
    시 대 : 1957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도창마을에서 조천마을로 넘어가는 중간지점으로 구남봉(해발 73.52m)의 남쪽 산사면 도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석류재는 압해정씨 문중재각으로 1957년에 건립하였다. 재각에는 오성공(筽城公)과 태사공(太師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오성공의 휘는 열도(烈道)이고, 정덕성의 아들이다. 태사공은 오성군의 양자로 친부는 금성군이다. 신라 진성왕 때 태사령을 역임하였다. 석류재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이며 팔작지붕이다. 석류재 앞의 안내문에는 압해정씨의 오성군과 태사공에 대한 이력사항, 관련유적으로 신도비와 석류재에 대한 연혁이 쓰여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41. 新安 東西里 外安島貝塚 (신안 동서리 외안도패총)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외안도
    시 대 : 신석기
    종 류 : 패총 유적현황: 외안도는 현재 1가구만 살고 있는 작은 섬으로, 북쪽해안에는 대규모의 새우양식장이 있으며 야트막한 산(37.4m)으로 형성되어 있다. 본래는 10가구 정도 살았으나 현재는 1가구만 남아있다. 패총은 민가 바로 뒤쪽 산사면부에 위치하며, 3~4m 정도 깎여 있는 단애면에 두께 30~40㎝정도 패각층이 관찰된다. 패각층 내에 신석기시대 무문토기편이 확인되었다. 패각류는 굴, 꼬막 등이 보인다. 패총의 정면(서쪽)은 백사장이 형성되어 있고 삼면이 해안단애와 소구릉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주거환경으로 비교적 양호한 지역이다. 그리고 민가에서는 지하암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 신자료

    42. 新安 東西里 外安島祭祀遺跡 (신안 동서리 외안도제사유적)
    소 재 지 : 압해면 동서리 외안도
    시 대 : 미상
    종 류 : 제사유적 유적현황: 제사터는 외안도 선착장에서 우측으로 150m 정도 떨어진 돌출된 구릉상(11.6m)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철마 수점이 확인되면서 제사터로 알려졌다. 철마는 현재 신안군 군립도서관 관장 고경남씨가 소장하고 있다. 철마의 머리 등 신체 일부가 파손된 것을 볼 때 뱃길의 안전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철마 외에 다른 유물들은 확인 할 수 없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43. 新安 大川里 鳥川支石墓群① (신안 대천리 조천지석묘군①)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조천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조천마을은 나지막한 구릉(26.0m)을 뒤로하고 마을 앞에는 ‘작은들’이라는 간척지가 펼쳐져 있으며 바로 앞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조천마을의 북쪽구릉 뒤로도 바다가 있으며 새우양식장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기존조사에 의하면 조천교회에서 서쪽으로 150m 떨어진 일명 ‘동산’ 이라는 야산에 15기의 지석묘가 남서-북동방향으로 3열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군집을 이루던 상석들이 경작으로 인하여 모두 밭 가장자리로 이동되었으며, 주변에서 석부와 격지들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44. 新安 大川里 鳥川支石墓群③ (신안 대천리 조천지석묘군③)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조천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대천리 조천마을 전원어린이집 바로 옆 야산인 일명 ‘비석등’의 남쪽사면에 대ㆍ소형의 지석묘 2기가 있다. 이곳은 마을 동북쪽에 자리한 봉엽산(53.8m)의 남쪽 산사면에 해당하며, 남쪽으로 300m 지점까지 바닷물이 유입되었으나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대형 지석묘의 상석의 크기는 장축 470㎝, 단축 235㎝, 두께 55㎝이며, 지석 두 개가 지탱하는 전형적인 기반식 지석묘이다. 형태는 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남서-북동이다. 소형지석묘 상석의 크기는 장축 120㎝, 단축 90㎝, 두께 30㎝이며, 장축방향은 북동-남서이다. 소형지석묘는 수풀이 우거져서 확인할 수 없었다.
    참고문헌: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45. 新安 大川里 金冀炫遺墟碑 (신안 대천리 김기현유허비)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조천마을
    시 대 : 1941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도창마을 봉엽산(56.7m) 아래, 즉 조천마을 입구 도로변에 소재하고 있다. 김기현(1860~1936)의 자는 聖旭으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선생의 성품은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는 효자였고 벗에 대한 우애가 깊었으며 형제간의 화목을 도모하였다. 또한 후진양성에도 이바지하였다. 1936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유풍을 기리기 위해 ‘白鹿洞’의 유풍을 쫒아 壇을 쌓았다. 그리고 1941년에 제자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유허지에 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는 단 앞에 서 있는 유허비이다. 비문은 33행 35자이며, 李炳觀이 撰하고, 李範錫이 書하였다. 비 뒤면에는 ‘蓮塘壇’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52cm, 너비 54cm, 두께 20cm이다. 연당단에는 ‘蓮塘金先生’이라 새겨진 비가 서 있고, 마당과 외삼문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46. 新安 大川里 백수원家屋 (신안 대천리 백수원가옥)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13-367(조천마을)
    시 대 : 1935년경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백수원가옥은 조천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안채는 모방, 정재, 큰방, 광(마래)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광 앞으로 툇마루가 넓혀진 ‘대청’을 둔 것이 다르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광이 다소 줄어들었다. 평면상의 작은 변화지만 공간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이곳은 하절기 가족들의 휴식공간, 일꾼들의 식사공간 등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이다. 현재 새로 지은 부속채(조적조 건물) 자리는 옛 행랑채 자리다. 행랑채는 광 1칸, 방 1칸, 그리고 ‘소막’이라고 부르는 1칸 등 모두 3칸이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47. 新安 大川里 廣笠支石墓群① (신안 대천리 광립지석묘군①)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광립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광립마을 북쪽에 자리잡은 큰젯산(37.5m)의 서쪽 능선상에 1기의 지석묘가 있다. 마을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곳에 원래 5기가 있었는데 1기만이 현존하고 4기는 파괴되었다고 한다. 상석의 크기는 장축 270cm, 단축 190cm, 두께 40cm이다.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동-서이다.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참고문헌: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2,『향토문화』제7집.

    48. 新安 大川里 廣笠支石墓② (신안 대천리 광립지석묘②)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광립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마을 남서쪽에 위치한 구릉 정상부의 김춘배씨 집 앞에 지석묘 1기가 있다. 지석묘는 상석의 북쪽 일부가 파괴되었다. 상석의 크기는 장축 430cm, 단축 190cm, 두께 90cm이다.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동-서 방향으로 2개의 지석이 확인된다.
    참고문헌:목포대학교박물관 2006,『압해 하수처리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49. 新安 大川里 廣笠貝塚 (신안 대천리 광립패총)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광립마을
    시 대 : 청동기~철기
    종 류 : 패총
    유적현황: 패총은 마을 북쪽에 자리한 ‘큰젯산(35.7m)’의 남쪽 경사면에 위지하고 있다. 기존조사에서 이곳은 크게 A, B, C지구로 나누고, 유물을 통해서 청동기시대~철기시대유적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번조사에서는 A, B지구는 확인할 수 없었고 C지구만 확인되었는데,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나 패각이 잘 남아있었다. 패각의 범위는 길이 23m, 너비 19m로 비교적 두텁게 쌓여있다.
    참고문헌: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2,『향토문화』제7집.

    50. 新安 大川里 大伐支石墓群① (신안 대천리 대벌지석묘군①)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대벌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대벌마을은 안산의 북동쪽 아래 평지에 자리 잡고 있고 마을의 남서쪽에는 ‘논골소류지’라는 저수지가 형성되어 있다. 마을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간척지가 펼쳐져있다. 지석묘군은 마을 북쪽 일명 ‘장들’ 이라는 곳에 있는데 5기의 지석묘가 군집해 있다. 이곳은 논골산(96m)줄기의 말단부 구릉에 해당하는데, 구릉상에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상석의 형태는 일정치 않으며, 장축방향은 대체로 남-북이다. 군집형태는 남동-북서 2열을 이루고, 모두 지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주변에는 소나무가 서 있고 일부는 밭으로 경작 중이다. 기조사에서는 유적 주변에서 응회암제 유구석부편을 확인하였다.
    참고문헌: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51. 新安 大川里 大伐採石場 (신안 대천리 대벌채석장)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대벌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산업생산유적
    유적현황: 대벌마을은 안산의 북동쪽 아래 평지에 자리 잡고 있고 마을의 남서쪽에는 ‘논골소류지’라는 저수지가 형성되어 있다. 마을 북쪽과 동쪽으로는 간척지가 펼쳐져있다. 유적은 논골산 정상부에서 지석묘의 채석장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곳이 확인되었다. 이곳 주위에는 지석묘의 상석과 비슷한 석재가 20여기 이상 산재해 있었고, 정상의 바위에는 석재를 떼어내기 위한 쐐기흔적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52. 新安 大川里 大伐遺物散布地 (신안 대천리 대벌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대벌마을
    시 대 : 삼국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대벌마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수락마을 방향으로 가는 축사장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송공산의 한 지맥인 야산(97m)의 동쪽 산사면 끝자락에 해당하는 곳이다. 유적의 동쪽으로는 간척된 농경지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와 접해있다. 이것으로 보아 간척사업 이전에는 유적이 위치한 곳까지 바닷물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응회암제 석부편 등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6,『압해 하수처리시설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53. 新安 大川里 半月遺物散布地① (신안 대천리 반월유물산포지①)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반월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압해서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500m 지점의 일명 ‘저드레미’ 라고 불리는 저평한 구릉상에 위치한다. 이곳은 원래 야산 이였으나 개간되어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유적의 동쪽은 과거에 바닷물이 바로 아래까지 들어왔으며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약 200m 지점에 바다가 있다. 기존조사에서 대벌마을의 박상우씨와 반월마을의 김만섭씨 소유의 밭에서 양인합인석부, 돌끌, 석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54. 新安 大川里 半月遺物散布地② (신안 대천리 반월유물산포지②)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반월마을
    시 대 : 구석기ㆍ청동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압해서초등학교 뒤편에 발달한 구릉 일대로, 남서쪽으로는 안산(91.2m)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주변에는 4기 퇴적이 잘 발달되어 있고 토양이 비옥하여 농작물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기존조사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여러면석기와 마제석부 1점이 확인되었다. 석부의 윗면은 잘 마연되었고 아랫면에는 제작하면서 격지를 떼어낸 흔적이 남아있다. 뒷면에는 제작 중 큰 격지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보인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55. 新安 大川里 西串牧場址(신안 대천리 서곶목장지)
    소 재 지 : 압해면 대천리 조천ㆍ대벌ㆍ반월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마정
    유적현황: 서곶목장은 조천ㆍ대벌ㆍ반월마을을 포함한 ‘큰들’이라는 지명의 넓은 평야에 위치했다. 압해도 목장은 조선 세종 때 설치되었고 18세기 임자도 목장이 압해도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현재 압해도 목장은 관련 지명이나 구전으로만 전해오고 있다. 압해도 대천리 주민들의 제보에 따른면,「서곶목장」이 있었던 대천리 조천마을은 일명 ‘새-장안’, ‘신목장’이라 칭하고 있는데, 이는 ‘새로 만든 목장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조천마을 뒤편 골짜기를 ‘통-장’이라 칭하는데, 이곳은 지형이 낮아서 목마를 가둬 놓았던 곳으로 전해오며, 조천마을 서북쪽에 있는 ‘들-목’이라는 마을은 ‘마장에 들나드는 길목’이라는 뜻에서 붙혀진 지명이다. 또 목마가 인근 논밭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해 두었던 돌담을 ‘똘장’이라 하였고, 목장 인근 들녘을 ‘짱-들’이라 하였다. 현재는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56. 新安 宋孔里 上村遺物散布地 (신안 송공리 상촌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송공리 상촌마을
    시 대 : 구석기ㆍ청동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상촌마을 남쪽에 위치한 야산(38.5m)의 동쪽사면부에 해당한다. 이곳은 마을공동 밭이며, 서남쪽으로는 바다가 보인다. 기존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격지와 청동기시대의 여러 격지편이 확인되었으며, 유적의 사면에는 토양쐐기가 잘 발달해 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57. 新安 宋孔里 金鍾寀享壇碑 (신안 송공리 김종채향단비)
    소 재 지 : 압해면 송공리 상촌마을
    시 대 : 1939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상촌마을 입구에 비가 있다. 비 바로 옆에는 ‘芝堂ㆍ芝塢金先生 兩位行義碑’(1980년)가 있다. 金鍾寀의 자는 明旭이다. 후학들이 선생을 芝塢라 불렀다. 비문에 따르면, “옛날에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 제사를 모시는 것이 ‘鹿洞’의 규례이다. 압해도 송공산 아래에 한 스승이 있으니, 그가 바로 김종채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김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陸師契를 조직하여 芝塢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비의 전면에는 ‘芝塢金先生享壇碑’가 새겨져있으며, 1939년에 육사계원 일동이 건립한 것으로 규모는 높이 173㎝, 너비 60㎝, 두께 30㎝이다. 비 주위에 돌담이 둘러져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58. 新安 宋孔里 大村遺物散布地 (신안 송공리 대촌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송공리 대촌마을
    시 대 : 구석기ㆍ청동기ㆍ고려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마을에서 서쪽방향으로 1㎞정도 가면 해태가공공장이 있는데, 공장 뒤편의 구릉일대에 위치한다. 이곳의 지형은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형성된 구릉지역으로 대부분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유적의 주변에는 굴양식장과 해태포자배양장이 있다. 이곳 사면에는 토양쐐기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기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격지와 청동기시대의 석기편, 고려시대 도기편, 청자편 등이 수습되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59. 新安 宋孔里 堂山祭堂 (신안 송공리 당산제당)
    소 재 지 : 압해면 송공리 대촌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현황 : 대촌마을에서는 제를 음력 1월 15일에 지냈으나 현재는 양력 5월에 못자리를 하고 난 직후 날을 받아 지낸다. 당산제에 대한 준비는 청년회와 부녀회가 맡아 하고 있으며, 제관은 깨끗한 분 1명을 선정하여 지내도록 한다. 제일이 되면 마을회관 옆 당산나무 아래에 제물을 진설하고 간단하게 제를 지낸다. 이때 마을주민들을 옆에서 제의 진행을 구경한다. 제가 끝나면 마을회관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음복을 하면서 경로잔치를 행한다. 마을의 당산제는 5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단되었었다. 그런데 당산제가 끊긴 후 마을에 궂은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일들을 주민들은 당산제 중단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당시 마을청년들에 의해 마을 노인들을 위한 경노잔치가 추진되었는데 이러한 계기로 경로잔치와 당산제를 같은 날에 실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20여 년 전부터 마을에서 당산제를 다시 지내게 되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60. 宋孔山城址 (송공산성지)
    소 재 지 : 압해면 송공리 산32
    시 대 : 삼국
    종 류 : 성곽
    유적현황: 송공산성은 송공산(해발 230m)정상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일제강점기 조사 자료에 의하면, 정상에 소형 석루(石壘)와 우물이 있고 삼한시대 이전에 축조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송공산성은 대부분 붕괴되어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군데군데 석축의 흔적이 남아있어 성의 규모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산성의 규모는 잔존높이 1.2m, 둘레길이 230m 정도이며, 성 내부에 우물이 남아있다. 기조사에서 산성 내부에서 토기와 도자기, 그리고 기와편들이 확인되었으며 현재도 기와편들이 확인되고 있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61. 新安 盆梅里 姜大榮不忘碑 (신안 분매리 강대영불망비)
    소 재 지 : 압해면 분매리 원분매마을
    시 대 : 1926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비는 마을입구에 위치한다. 이 비는 선정을 베푼 면장 강대영을 기리기 위하여 면민일동이 1926년에 건립한 것이다. 비 앞면에 ‘面長前參奉姜大榮施惠不忘碑’라 쓰여져 있고, 강대영이 선정을 베푼 내용의 4언 절구가 새겨져있다. 규모는 높이 160㎝, 너비54㎝, 두께 24㎝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1 -압해면 편-』.

    62. 新安 盆梅里 新基遺物散布地 (신안 분매리 신기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분매리 신기마을
    시 대 : 구석기ㆍ통일신라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신기마을에서 용강마을로 들어가는 소로 옆에 자리잡은 야산(53m)의 사면 끝자락에 해당한다. 이곳은 석영제의 잔 자갈돌이 많은 편이며, 기존조사에서 찌르개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호의 구연부편이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63. 新安 盆梅里 갯모실遺物散布地 (신안 분매리 갯모실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분매리 갯모실마을
    시 대 : 구석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갯모실 마을 내의 낮게 발달한 구릉일대이다. 주로 벼농사와 밭농사로 생활하며 축산업을 하는 가구도 있다. 주변에 노출된 토양은 암편이 많이 섞여있지 않은 4기 퇴적층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의 퇴적층은 비교적 안정적인 양상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조사에서 여러면 석기가 1점 확인되었다. 이 석기는 주로 석영제 자갈돌 주변에 간단한 손질로 둥근 형태의 석기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64. 新安 盆梅里 동교遺物散布地 (신안 분매리 동교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분매리 동교마을
    시 대 : 삼국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압해동초등학교에서 남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유적이 위치한다. 이곳의 지형은 낮은 봉우리(51.5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구릉상부로 남쪽에는 7호저수지가 있다. 또한 구릉의 동쪽과 서쪽은 곡간지가 발달하였으며, 7호저수지 아래는 간척된 농경지가 있다. 유물은 적갈색연질토기편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박물관 2006,『압해 하수처리시설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65. 新安 新庄里 水滿支石墓 (신안 신장리 수만지석묘)
    소 재 지 : 압해면 신장리 수만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지석묘는 마을입구에서 북동쪽으로 700m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금산의 남서쪽에 흐르는 계곡의 중앙부로 남쪽은 간척지이다. 지석묘는 계곡의 중앙부 밭 가장자리에 1기가 있는데 하부가 매몰되어 지석은 확인할 수 없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곳에는 더 많은 수의 지석묘가 있었다고 하는데 경작으로 인해 매몰되었다고 한다. 상석의 규모는 길이 600cm, 너비 280m, 높이 180m이며, 장축방향은 동-서이고,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다.
    참고문헌: 남도문화재연구원 2006,『신안월드 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66. 新安 長甘里 터골遺物散布地 (신안 장감리 터골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장감리 터골마을
    시 대 : 구석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마을입구 좌측에 위치한 저평한 구릉지대에 해당한다. 유물산포지에는 굵은 사립이 많이 섞여 있는 적갈색층이 노출되어 있고 바다를 메운 지역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유물은 기존조사에서 강자갈의 끝부분에 간단한 잔손질을 해서 날이 형성된 외면찍개 1점이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67. 新安 長甘里 터골貝塚 (신안 장감리 터골패총)
    소 재 지 : 압해면 장감리 터골마을
    시 대 : 철기
    종 류 : 패총
    유적현황: 패총은 터골유물산포지에서 300m정도 떨어진 구릉하단부의 끝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점은 구릉에서 내려다보면 돌출된 낮은 언덕을 볼 수가 있는데 동쪽면에서 패총을 확인할 수 있다. 바닷물의 오랜 침식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어 패각류가 주위에 흩어져 있다. 기존조사에서는 패각층에서 경질토기편과 각종 패각류 등이 수습되었다. 최근 침식작용에 의해 패각층이 많이 훼손되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68. 新安 長甘里 元長甘遺物散布地 (신안 장감리 원장감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장감리 원장감마을
    시 대 : 구석기ㆍ신석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적은 원장감마을에서 터골마을로 가는 도로를 따라 100m정도 떨어진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이곳의 지형은 북서-남동의 낮은 구릉으로 서쪽은 바다에 인접하고 있다. 또한 이 구릉의 대부분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기존조사에서 석창 1점이 수습되었다. 이 석기는 석기제작수법상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에 사용된 세워떼기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거의 전 양면에 박리를 가해 만들었다.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도서문화』제18집.

    69. 新安 佳蘭里 佳蘭遺物散布地 (신안 가란리 가란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가란리 가란마을
    시 대 : 삼국~통일신라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물산포지는 가란마을 서쪽에 야트막한 야산(해발 15.9m)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야산에서 북서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구릉의 동쪽 사면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 구릉은 가란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마을 북쪽으로는 넓은 간척지가 형성되어 있다. 현재 유적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 기대편, 방추차 등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70. 新安 佳蘭里 張以軫旌閭ㆍ錦城吳氏旌閭(신안 가란리 장이진정려ㆍ금성오씨정려)
    소 재 지 : 압해면 가란리 가란마을
    시 대 : 1936년, 미상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가란마을내에 위치하고 있다. 비 2기가 붉은 벽돌 담장으로 둘러져 있는데, 1기는 ‘張以軫旌閭’이고, 1기는 ‘錦城吳氏旌閭’이다. 이 비는 인동장씨가문의 효자와 열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장이진의 字는 元仲, 號는 誾軒으로 본관은 仁同이다. 1826년에 아버지 張南翰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며 효도하였다. 이에 전남 모성공회 유생들의 추천으로 郡과 道에서 포상을 받았다. 공은 1899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 비는 1936년(丙子年)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비의 앞면에는 ‘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張公以軫之閭’라 새겨져 있다.
    금성오씨는 吳重瑜의 딸로 태어났다. 장성한 후에 인동장씨 가문의 장복일과 혼인였는데, 가세가 기울어 경기도 수원으로 이주하였다. 이주한지 4년후에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같은 날 부인은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1678년 경기도 암행어사 이철보가 조정에 보고하여 경기 감사 이진순의 조사를 거쳐 旌閭를 받았다. 비의 앞면에는 ‘烈女贈通政大夫右承旨張公福一配叔夫人錦城吳氏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 신자료

    71. 新安 古耳里 七洞遺物散布地① (신안 고이리 칠동유물산포지①)
    소 재 지 : 압해면 고이리 칠동마을
    시 대 : 삼국~고려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칠동마을은 마을뒷산(47.6m)에서 동-서 양방향으로 뻗은 구릉으로 둘러싸여있으며 북쪽으로는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유물산포지는 이 야산의 동쪽 구릉으로 마을을 마주보는 구릉사면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현재는 계단식으로 밭을 개간하여 삭토가 많이 이루어졌다. 유물로는 회청색경질토기편 등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72. 新安 古耳里 七洞遺物散布地② (신안 고이리 칠동 유물산포지②)
    소 재 지 : 압해면 고이리 칠동마을
    시 대 : 삼국~고려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칠동마을은 마을뒷산(47.6m)에서 동-서 양방향으로 뻗은 구릉으로 둘러싸여있으며 북쪽으로는 간척지가 조성된 논경작지다. 유물산포지는 마을내의 서쪽 산기슭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현재는 밭으로 개간되고 있으며,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73. 新安 古耳里 七洞遺物散布地③ (신안 고이리 칠동유물산포지③)
    소 재 지 : 압해면 고이리 칠동마을
    시 대 : 삼국~고려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유물산포지는 태봉산(해발 52.8m)의 서쪽 산자락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불당골’이라고 불리는데 과거 불당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유물산포지는 계단식으로 밭을 개간하면서 많이 삭토되었다. 밭 아래의 소로를 따라 소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유물로는 적갈색연질토기편과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74. 新安 古耳里 七洞保護樹 (신안 고이리 칠동보호수)
    소 재 지 : 압해면 고이리 230(칠동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보호수
    유적현황: 보호수는 마을 초입부에 위치하고 있다. 수종은 팽나무이며, 수령은 270년이며, 높이 15m, 둘레 270㎝이다. 과거 팽나무에 금줄을 드리고 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행하지 않고 있다. 팽나무의 속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해 시멘트를 채워 넣어 보수하였다.
    참고문헌 :

    75. 王山城址 (왕산성지)
    소 재 지 : 압해면 고이리 산221
    시 대 : 삼국
    종 류 : 성곽
    유적현황: 왕산성은 압해도의 북쪽에 인접해 있는 고이도 왕산(80m)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은 왕산의 동남쪽 능선에서 석축이 확인된다. 바다에 면한 동ㆍ남쪽은 산의 능선을 따라 축성되었고, 서ㆍ북쪽은 산줄기 및 계곡의 지형을 이용하여 축성되었다. 따라서 왕산성은 계곡을 이용하여 부정형으로 축조되었고, 성벽은 1m 내외의 자연석과 50×20cm 정도의 잡석을 이용 狹築法에 의해 축조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사에 의하면, 왕산성은 당시에도 대부분 붕괴된 상태였고, 왕건의 동생 某가 해적이 되어 이곳에 근거를 두고 약탈을 일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76. 新安 古耳里 古庄遺物散布地 (신안 고이리 고장유물산포지)
    소 재 지 : 압해면 고이리 고장마을
    시 대 : 청동기~삼국
    종 류 : 유물산포지
    유적현황: 맹산(60.8m)의 남쪽기슭에 고장마을이 있는데 유적은 고장마을의 우측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유적의 범위는 고장마을과 고이그리스도교회 사이에 개간된 넓은 밭이다. 유물은 무문토기편과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확인되었으며 밭의 왼쪽 가장자리 밭둑에 지석묘 상석으로 추정되는 바위가 있다. 그러나 주변 야산에서 굴러 떨어진 바위들이 많아 지석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바위의 크기는 단축 160㎝, 장축 170㎝, 두께 20~75㎝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77. 新安 古耳里 朴仁根記念碑 (신안 고이리 박인근기념비)
    소 재 지 : 압해면 고이리 사동마을
    시 대 : 1942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고이리 분교 앞 삼거리 공터에 위치하고 있다. 비의 전면에 ‘前面議員學院會長朴仁根記念碑’라고 새겨져 있고, 행적이 4언 절구로 새겨져있다. 학교건립에 공이 있는 박인근의 공을 기리기 위해, 金恒來, 李石珍을 중심으로 후원회 일동이 1942년(昭和 17년)에 건립한 비이다. 규모는 높이 173㎝, 너비 51㎝, 두께 20㎝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78. 新安 梅花里 徐致奎不忘碑 (신안 매화리 서치규불망비)
    소 재 지 : 압해면 매화리 대동마을
    시 대 : 1933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비는 마을입구에 위치한다. 공은 소작인들에게 곡식의 양을 공평하게 부과해서 칭송을 받았다. 이러한 공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權日永, 全斗年을 중심으로 소작인일동이 癸酉年(1933년)에 비를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는 ‘丞旨徐公致奎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고, 공의 행적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규모는 높이 175㎝, 너비 57㎝, 두께 24㎝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79. 新安 梅花里 馬山墳墓 (신안 매화리 마산분묘)
    소 재 지 : 압해면 매화리 마산마을
    시 대 : 고려
    종 류 : 역사분묘
    유적현황 : 마산마을 KT무선전화국 뒤로 야트막한 구릉(해발 30.9m)이 형성되어 있는데 구릉의 정상부에는 마을에서 당제를 지내던 소나무 4본과 무덤이 있다. 고려시대 분묘로 추정되는 곳은 구릉의 북서쪽으로 현재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마을이장의 제보에 따르면 20여년전 밭을 갈면서 청자병과 접시 등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 신자료

    80. 新安 梅花里 馬山祭堂 (신안 매화리 마산제당)
    소 재 지 : 압해면 매화리 마산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ㆍ노거수
    유적현황 : 마산마을 KT무선전화국 뒤로 야트막한 구릉(해발 30.9m)이 형성되어 있는데 노거수는 구릉의 정상부에 있다. 수종은 소나무로 총 4본이 있다. 소나무사이에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으나 현재는 대나무가 우거져 형태를 확인하기 어렵다. 마을이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은 당제를 지냈던 곳이라 한다. 당제의 순서는 그해에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사람을 선정하여 3일전에 가장 깨끗한 물에 목욕을 한다. 제관은 마을에서 모은 쌀, 팥, 돈으로 제사상을 차린다. 제의 중 특징적인 것은 소머리를 당제 지내는 묘 앞에 묻는 것이다. 당제의 마지막 의례는 각 집마다 소원을 창호지에 써서 올린다. 당제가 끝나면 농악을 울리며 마을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현재는 마을인구가 많이 줄고 교회를 믿으면서 지내지 않게 되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81. 新安 伏龍里 利川徐氏旌閭閣 (신안 복룡리 이천서씨정려각)
    ○ 소재지 : 압해면 복룡리 304-1
    ○ 시 대 : 1925년
    ○ 종 류 : 유교건축
    ○ 유적개요 : 원복용 마을에서 ‘뒷재’로 이어지는 길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利川徐氏는 光山金氏 36세 珪鎬(1834~1913)의 부인으로 결혼한지 3년만에 남편이 병으로 죽자 부인은 남편의 묘역에서 움집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각을 건립하였다. 예전에는 정려각 주변에 담장과 문이 있었으나 1991년에 기와와 서까래 모서리를 보수하면서 문을 없앴다고 한다. 현재 정려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이고 정면 414cm, 측면 204cm이다. 정려각 내에는 ‘烈婦利川徐氏之閭’(을축년, 1925년)라 새겨진 현판과 ‘出義與寄附員名錄’(1925년)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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