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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하의면] 하의면 문화유산 신안문화원 2008/2/12 3817


    [하의면] 하의면의 문화유산
    출처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8 《신안군문화유적분포지도》 신안군

    1. 新安 熊谷里 北浦祭堂 (신안 웅곡리 북포제당)
    소 재 지 : 하의면 웅곡리 북포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개요 : 북포제당은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야산(55.1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제당은 음력 정월 초사흘에 거행되던 북포마을 당제의 제장이다. 그러나 당제는 1950년대부터 지내지 않고 있으며, 구체적인 제의과정이나 내용을 아는 마을주민은 생존해있지 않다. 현재 제당에는 원형 돌담만이 남아 있으며, 돌담은 거의 유실되어 흔적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2. 新安 於隱里 언동祭堂 (신안 어은리 언동제당)
    소 재 지 : 하의면 어은리 언동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개요 : 언동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초사흘 날에 마을 뒤편 당산(61.8m)이라 불리는 야산의 정상부에서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산신제)를 지냈다. 산신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지내지 않고 있으며, 당산 정상부에 제당이었던 원형 돌담만이 남아 있다. 돌담의 규모는 높이 120cm, 둘레 650cm 정도이며, 잡목으로 인하여 일부분이 훼손되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3. 新安 於隱里 세꾸미祭堂 (신안 어은리 세꾸미제당)
    소 재 지 : 하의면 어은리 세꾸미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개요 : 세꾸미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 날에 당제를 지냈다. 마을의 공동의례라 인식하여 남ㆍ여 구분 없이 집안끼리 번갈아 가면서 음식을 준비해 제를 지냈었다고 전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제의가 중단되어 지금은 지내지 않지만, 마을 뒤편의 야산(70.7m) 정상부 아래 제당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제당의 형태는 원형돌담으로, 규모는 높이 60cm, 둘레 360cm 정도이다. 돌담은 주변의 잡목과 수풀로 인하여 절반정도가 훼손된 상태이며, 다른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신자료

    4. 新安 於隱里 皮里寺址 (신안 어은리 피리사지)
    소 재 지 : 하의면 어은리 피리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사지
    유적개요 : 피리마을에서 남쪽으로 450m 정도 떨어진 ‘절바우’라 불리는 야산(66.9m) 정상부에 암자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건물지는 정상부에 위치한 바위를 천정부로 사용하고 그 안쪽에는 상ㆍ하면이 편평한 할석을 바닥전면에 깐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대부분 파괴되었다. 또한 건물지 앞으로는 석축이 쌓아져 있다. 석축은 상ㆍ하면이 편평한 할석을 사용하여 쌓고 빈틈은 소형할석을 끼워 넣었다. 규모는 잔존길이 6m, 높이 1.5m 정도이다. 유물은 건물지 주변에서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기와편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5. 新安 於隱里 皮里祭堂 (신안 어은리 피리제당)
    소 재 지 : 하의면 어은리 피리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개요 : 피리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초하루에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냈다. 제를 지내는 곳은 마을에서 남쪽으로 450m 정도 떨어진 ‘절바우’라 불리는 야산(66.9m)의 정상부 남쪽 사면에 위치하며, 현재 원형돌담의 형태가 남아있다. 원형 돌담은 잡목과 수풀로 인하여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확인되는 규모는 높이 210cm, 둘레 450cm 정도이다. 또한 제당에서 남쪽으로 10m 정도 아래에는 당집이 위치하고 있다. 당집은 ‘ㅁ’ 자형의 담장 안에 기와로 된 집으로, 담장과 당집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당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6. 新安 五林里 有戶祭堂 (신안 오림리 유호제당)
    소 재 지 : 하의면 오림리 유호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개요 : 유호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초사흘 날 마을 서쪽에 위치한 야산(43.3m)의 정상부에서 제의를 지냈다. 당제는 마을에서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다고 생각되는 남자 2명을 선발하여 제를 지내기 3일전부터 준비를 하고 제의가 끝난 뒤에는 남은 음식을 마을주민들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현재 당제는 1950년대부터 지내지 않고 있으며, 제당에는 원형의 돌담터 흔적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제당은 잡목과 수풀이 우거져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참고문헌 : 신자료

    7. 新安 五林里 蜂島祭堂 (신안 오림리 봉도제당)
    소 재 지 : 하의면 오림리 봉도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개요 : 봉도마을에는 음력 정월 초사흘 날 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야산(55.3m) 정상부의 동쪽사면에 위치한 제당에서 제의를 지냈다. 당제는 마을에서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다고 생각되는 남자 2명이, 제를 지내기 3일전부터 준비하여 초사흘 날 새벽에 제의를 모셨다고 한다. 제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지내지 않고 있으며, 제당에는 원형 돌담만이 남아 있다. 원형 돌담은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어 정확한 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참고문헌 : 신자료

    8. 新安 五林里 新村祭堂 (신안 오림리 신촌제당)
    소 재 지 : 하의면 오림리 신촌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개요 : 신촌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초사흘 날 마을에서 동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야산(46.7m)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제당에서 제의를 지냈다. 제당은 ‘국사당’이라 불리고 있다. 당제는 마을에서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다고 생각되는 남자 2명이 3일 전부터 준비를 하여 제 당일날 새벽에 제의를 모셨다고 한다. 당제는 2000년대부터 지내지 않고 있으며, 제당은 대나무숲이 우거져 접근이 불가능하다. 현재 돌담 일부만을 관찰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신자료

    9. 新安 大里 東便支石墓群 (신안 대리 동편지석묘군)
    소 재 지 : 하의면 대리 동편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 대리 동편마을은 덕봉산(87.1m) 남동쪽 산기슭과 평지에 위치한다. 기존의 조사에서 마을 내에 4기의 지석묘가 확인되었다. 1호 지석묘는 김장곤씨 댁(225번지) 앞마당에 있는데, 수년전 담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워두었다. 2호 지석묘는 김심배씨 댁(225번지) 뒷밭에 있는 것으로 상석의 크기는 장축 212㎝, 단축 140㎝, 두께 76㎝이고 형태는 타원형이다. 장축방향은 남-서인데, 하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3호 지석묘는 윤양신씨 댁(229번지) 뒷밭에 있는 것으로 상석의 크기는 장축 230㎝, 단축 120㎝, 두께 60㎝이고 형태는 장방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하부가 들여다보이는데 지석들이 있고 판석재가 주변에 흩어져 있다. 4호 지석묘는 정화수씨 댁(199번지) 담장에 있다. 한쪽은 길가로 나와 있고, 다른 쪽은 집안에 들어가 있는데, 상석의 크기는 장축 228㎝, 단축 190㎝, 두께 75㎝이고 형태는 장방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3․4호 지석묘는 유실되고 1ㆍ2호 지석묘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조사에서는 ‘대리 지석묘군’이었으나 이번조사에서 행정명에 따라 ‘대리 동편지석묘군’으로 정정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5,『도서문화』제3집.

    10. 德鳳講堂 (덕봉강당)
    소 재 지 : 하의면 대리 145(동편마을)
    시 대 : 1965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대리마을은 한때 300~400가구의 집들이 들어섰던 대규모의 마을로 ‘덕봉산(87.1m)’ 남동쪽 산기슭과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덕봉강당은 덕봉산의 동쪽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편마을에 속한다. 하의면 출신 유학자 ‘草庵 金鍊’ 선생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서당을 지어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선생은 당시 신간서적이라면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까지 돌아다니면서 2,000여권의 고서(필사본)을 모았으며, 항상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공자의 예절을 높이 숭상했다. 그 후 제자들이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어 1965년 덕봉강당을 지어 선생의 유물인 성리대전 등 166책, 1435여권의 책을 보관하고 있으며, 고서적 등 초암선생의 유물을 과학적으로 보관 전시할 수 있는 전시관을 2001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신안군 2006,『우리고장의 향토문화유적』.

    11. 新安 大里 祭堂 (신안 대리 제당)
    소 재 지 : 하의면 대리 동편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현황 : 대리마을은 한때 300~400가구의 집들이 들어섰던 대규모의 마을로 덕봉산(87.1m) 남동쪽 산기슭과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제당은 덕봉산의 동쪽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의 ‘동편’에 속한다. 당제는 마을에서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후 5戊日에 춘제(春祭)와 추제(秋祭)를 지낸다. 당신은 7神으로 荷衣德鳳山后土神, 后稷神, 句龍神, 周祖棄神, 風伯, 雨師, 雲師이다. 마을사람들은 ‘대리신(大里神)’은 영험이 있어 가뭄이 없이 농사가 잘되고 병충해도 없다고 믿고 있다. ‘대리당’으로 불리우는 당집은 정면 3칸으로 이루어진 함석맞배지붕집이다. 당제는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데 마을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당제에 속한 농지가 있어 마을주민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아 계속 당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5,『도서문화』제3집.

    12. 新安 大里 똘개목支石墓 (신안 대리 똘개목지석묘)
    소 재 지 : 하의면 대리 똘개목마을
    시 대 : 청동기
    종 류 : 지석묘
    유적현황 : 대리에서 후광리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위에 위치하고 있다. 기존의 조사에서는 길 우측에 1기의 지석묘가 비스듬히 있었다고 한다. 상석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규모는 장축 285㎝, 단축 214㎝, 두께 60㎝이다. 또한 상석 바로 옆에 직경 80㎝ 내외의 둥근 지석이 2개 놓여 있었다. 현재는 도로확포장공사를 하면서 상석과 지석이 도로 아래로 복토되어 확인 할 수 없지만 상석과 하부구조가 매몰되어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5,『도서문화』제3집.

    13. 新安 大里 蛇頭古墳 (신안 대리 사두고분)
    소 재 지 : 하의면 대리 제1호저수지 부근
    시 대 : 삼국
    종 류 : 고분
    유적현황 : 웅곡리 전광마을 서쪽으로 ‘전광들’이라 불리는 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전광마을에서 ‘전광들’로 나있는 소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제1호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둘레로 산들이 에워싸고 있으며 사두고분은 ‘제1호저수지’의 제방 북쪽 끝에 속칭 ‘사두’라는 구릉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규모는 길이 8.2m, 폭 3.6m, 높이 1.4m로 남-북 방향이다. 현재는 봉분위에 잡목이 무성하게 자라 있으며, 정상부에 지름 40㎝의 둥근 구멍이 뚫려있다. 내부를 살펴보았으나 흙이 함몰되어 있어 관찰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5,『도서문화』제3집.

    14. 新安 大里 칼산古墳 (신안 대리 칼산고분)
    소 재 지 : 하의면 대리 제1호저수지 부근
    시 대 : 미상
    종 류 : 고분
    유적현황 : 웅곡리 전광마을 서쪽으로 ‘전광들’이라 불리는 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마을에서 ‘전광들’로 나있는 소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보면 ‘제1호저수지’가 있다. 저수지의 서쪽에는 소위 ‘칼산’이라 지칭되는 낮은 구릉이 있는데 기존조사에서는 이곳에서 길이 3~5m정도, 높이 1m 이내의 고분이 산재되어 있고, 군데군데 도굴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잡목과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형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5,『도서문화』제3집.

    15. 新安 大里 農民紀念館內 碑群 (신안 대리 농민기념관내 비군)
    소 재 지 : 하의면 대리 농민기념관
    시 대 : 1885년ㆍ1903년ㆍ1912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농민기념관 내부에 5기의 비가 일렬로 서 있다. 이 비들은 웅곡선착장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장소로 옮겨 놓은 것으로, 하의도 토지항쟁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특히 4번의 비는 드물게 일본인을 기리는 내용이다. 대한제국기에 하의3도의 땅은 홍씨 가에서 내장원으로, 내장원에서 다시 홍씨 가로 넘어갔다. 이에 하의도민들은 대표를 뽑아 1909년 경성지방법원에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였으며, 일본인 변호사 고노오토라노스케(木尾虎之助)의 도움으로 3년 동안 재판을 벌인 끝에 승소하였다. 비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번호 / 비석명 / 연대 / 규묘(높이, 너비, 두께 cm) / 비고
    1 / 善大夫文公… / 1885년 / 112, 45, 15 / 파손상태가 심함
    2 / 通政大夫敦寧府都正權公在燦永世○○○ / 1903년 / 137, 46, 14 /
    3 / 行郡守金公東佑永世不忘碑 / 1912년 / 126, 47, 16 /
    4 / 辯護士木尾公虎之助永世不忘碑 / 1912년 / 160, 56, 20 /
    5 / 辯護事務員南主事萬䧺永世不忘碑 / 1912 / 143, 45, 17 /

    참고문헌 : 신자료

    16. 新安 大里 벼락바위古墳 (신안 대리 벼락바위고분)
    소 재 지 : 하의면 대리 벼락바위마을
    시 대 : 삼국
    종 류 : 고분
    유적현황 : 면소재지에서 벼락바위마을로 1㎞정도 가면 길 우측에 김해김씨 선산이 있다. 기존의 조사에서는 이 선산에 길이 15m, 폭 10m 정도의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조사당시 고분은 봉토가 이미 깎여 나갔으나 그 윤곽이 뚜렷하여 장축방향이 남-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민묘 외에는 고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기 조사에서는 ‘대리고분’이라 하였으나 이번조사에서 행정명에 따라 ‘대리 벼락바위고분’으로 정정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5,『도서문화』제3집.

    17. 金大中大統領 生家 (김대중대통령 생가)
    소 재 지 : 하의면 후광리 100ㆍ121(원후광마을)
    시 대 : 1999년
    종 류 : 탄생지
    유적현황 : 김대중대통령 생가는 후광리 원후광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생가의 맞은편에는 소금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김대중대통령은 1925년 하의면 후광리 원후광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적 초암서당에서 김연(金鍊)선생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하의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12세에 목포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다섯 번에 걸친 죽을 고비와 6년간의 감옥살이, 55차례의 연금, 10년의 망명생활 등을 거쳐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00년 6월 15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그의 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을 향한 노력과 삶이 인정되어 2000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생가는 목조초가 2동으로 1999년 종친들이 복원하여 신안군에 기증한 것이다.
    참고문헌 : 신안군 2006, 『우리고장의 향토문화유적』.

    18. 新安 陵山里 陵山祭堂 (신안 능산리 능산제당)
    소 재 지 : 하의면 능산리 능산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현황 : 능산마을에서는 1950년대까지 당제를 지냈다. 제당은 마을주민들이 ‘당숲’이라고 부르는 마을 남쪽 끝에 형성된 나지막한 구릉으로, 현재 당집이 남아있다. 마을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제신(祭神)은 능산 전체의 신인 ‘능산산신’이며 제는 보통 오름제 3일, 내림제 3일로 이루어지는데 매년 봄에 육물과 해물을 당집에 차려 제를 지냈다고 한다. 1950년대까지 제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 당집은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아 잡목이 우거져 있으며, 지붕이 유실되었고, 남벽에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나 유실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규모는 장벽 440㎝, 단벽 280㎝(잔존), 높이(잔존) 88㎝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19. 新安 陵山里 薪島保護樹 (신안 능산리 신도보호수)
    소 재 지 : 하의면 능산리 1035-1(신도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노거수
    유적현황 : 신도마을 서쪽에는 신도해수욕장이 넓게 형성되어있다. 보호수는 마을회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보호수 둘레로 단을 만들었으나 보호수의 뿌리가 일부 노출되어 있어 상태가 매우 안 좋다. 팽나무로 수령은 미상이며, 둘레 2m, 수고 15m이다.
    참고문헌 :

    20. 新安 陵山里 薪島祭堂 (신안 능산리 신도제당)
    소 재 지 : 하의면 능산리 신도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개요 : 신도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초사흘 날 마을에서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야산(82.5m)의 정상부에 위치한 제당에서 제의를 지냈다고 한다. 당제는 마을에서 어선을 운행하는 사람 7명 정도가 제의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당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제당은 잡목과 수풀이 우거져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나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원형 돌담이 남아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신자료

    21. 新安 玉島里 李鎬俊善正碑 (신안 옥도리 이호준선정비)
    소 재 지 : 하의면 옥도리 장치마을
    시 대 : 1873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선착장에서 장치리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 좌측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는 이호준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의 전면에는 ‘觀察使李公鎬俊公德善政碑’라 새겨져있고, 비의 뒷면에 공의 행적에 대해 4언 절구로 기록되어 있다. 비의 뒷면에 ‘崇禎紀元後五癸酉夏五月日’ 이라 새겨진 것으로 보아 1873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규모는 높이 119㎝, 너비 44㎝, 두께 18㎝이다. 이호준선정비는 암태면(1873년), 안좌면 자라리(1872년), 신의면 상태서리에서도 확인된다.
    참고문헌 : 신자료

    22. 新安 玉島里 日本海軍基地關聯遺蹟 (신안 옥도리 일본해군기지관련유적)
    소 재 지 : 하의면 옥도리 장치마을
    시 대 : 근대
    종 류 : 정치국방유적
    유적개요 : 옥도는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기지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국내 최초의 무선전신소가 설치된 곳이며, 한국 근대 기상관측의 발상지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는 섬이다. 현재 확인되는 유적으로는 선착장에서 300~400m 떨어진 장치마을의 언덕에 있는 우물과 두 개의 비이다. 우물은 ‘八口浦海軍井’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우측에 건립연도(昭和拾壹年八月建立, 1936년)가 적혀있다. 두 개의 비는 일본해군용지 경계석으로 보이며, 하나는 ‘大日本海軍用地’라고 표기되어 있고 반대쪽에 ‘第六七号’라고 적혀있으며(높이 122㎝, 너비32㎝), 다른 하나는 ‘海軍 第八八’(높이 112㎝, 너비 15㎝)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이외에도 또 다른 우물과 석조가 남아있는데, 일본군이 사용하던 시설이라고 전한다.
    참고문헌 : 최성환 2006,「서남해안지역 근대문화유산 조사보고Ⅰ」,『전남문화재 제1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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