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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양화가 수화(樹話) 김환기 관리자 2006/3/9 11407
# 첨부파일 : 서양적인 기법으로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한 김환기 작




    신안의 문화인물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 1913.2.27~1974.7.25)




                                                                                     정리:최성환(문화원 사무국장)

     


    수화(樹話) 김환기 약력

    김환기 화백은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현 안좌면 읍동리 955번지. 기좌도는 안창도와 연륙되어 현재 안좌도가 되었다)에서 출생하였다. 초등학교까지를 고향에서 생활했고, 서울로 올라간 후 일찍이 동경에 유학하여(일본대학 예술학부) 1930년대 후반 일본화단에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하였다. 자유미술가 협회전 창립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고, 광복 후(1947년)에는 신사실파(유영국, 이규상과 더불어)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의 계보를 형성하는 한편 서울대, 홍익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보였다. 1956년에는 프랑스로 진출하여 약 3년 간 체류했으며 1959년 귀국 후는 홍익대 미대 학장, 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미술계 중심에서 활동하였고, 1963년 미국 뉴욕에 정착한 이후 1974년 작고하기까지 뉴욕 화단에서 국제적으로 활동하였다. 


    평론가들이 이야기하는 김환기 화백의 미술세계

    미술평론가들에 따르면 김환기의 예술세계는 초기인 동경시대와 중기인 서울, 파리시대, 그리고 후기인 뉴욕시대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초기에는 입체파, 구성파의 영향을 거쳐 추상미술에 도달하였으며, 광복 후는 추상적 바탕에 자연적 이미지를 굴절시킨 독특한 화풍을 펼쳐 보였다. 이 시기에는 김환기 화백은 달, 산, 항아리, 학, 매화 등 고유한 정서를 담은 소재를 들을 작품 속에 주로 담았는데, 서양화가지만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에 귀의하려는 동양인의 의식을 근간으로 하면서 우리 고유한 정서를 양식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지막 뉴욕시대(1963년 이후)에 와서는 김환기의 예술은 또 다른 변신을 보이는데, 이때부터는 구체적인 자연대상은 지워지고 선, 점, 면들로 구성되는 순수한 추상에로의 변모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김환기 화백의 가장 알려진 대표적인 작품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년, 한국미술대상전 대상작품)가 있다. 김환기 화백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작품이기도 한데, 화면 전체가 점들로 만 채워진 그림이다. 김환기 화백이 다녔던 안좌초등학교를 갔더니, 혹자는 점으로만 화면을 가득 채운 이러한 기법이 서해안 바닷가에서 흔히 보는 김의 모습(입자)과 닮았다며, 김에서 착안한 기법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하였다.


    김환기 화백의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정작 고향에서는 그렇게 인지도가 높지 못한 이유.

    김환기 화백은 우리고장 뿐만 아니라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화가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신안이나 목포에서조차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일찍부터 고향을 떠나서 생활했고, 말년에는 외국에서 주로 작품활동을 하다가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남농 선생처럼 고향에 머물면서 제자를 육성하거나 지역사회에 봉사를 한 경우가 없기 때문에 그를 추모하는 집단이 이 고장에 형성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김환기와 고향을 그린 작품

    추상화에 가깝기는 하지만 ‘기좌도의 달밤’과 같은 경우가 대표작이고, 그 외에도 ‘섬의 이야기’, ‘종달새 노래할 때’, ‘항아리와 여인’ 등 몇몇 작품이 고향을 주제로 그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환기 화백의 고향의식에 대한 평가는 평론가에 따라 다르다. 김환기 화백이 바다나 섬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별로 고향의식이 없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환기는 그의 일기에서 자신의 고향이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고, 추상화이지만 민족적인 정서를 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점에서 김환기의 예술적 기질은 태어난 고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향인 안좌도에 남아 있는 유적

    안좌면 읍동리에 김환기 생가가 있다. 이 생가 건물은 현재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1910년대에 건축되었다는 ‘ㄱ’ 자 모양의 목조기와 한 채가 남아 있다. 현재 2004년 8월 20일을 기한으로 안채보수, 대문건립, 주변 정비 등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장소는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한번 방문해 보고 싶은 성지와도 같은 명소라고 할 수 있다. 주변 정비를 잘하고 관리체계를 보안해서 김환기 화백의 추모공간이자 지역문화예술 산업의 메카로 이곳이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김환기 화백의 모교 안좌초등학교

    안좌도에는 김환기 화백의 생가 외에 모교인 안좌초등학교에서 선생의 향취를 느껴볼 수 있다. 학교에는 1926년 당시 김환기 선생의 생활기록부가 잘 보존되고 있고, 학교 곳곳에 학교의 자랑 김환기에 대한 설명문과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학교에서는 자체적으로 김환기 추모 사생대회를 개최하여 애향심과 예술세계를 선양하고 있다.


    김환기 화백은 지역문화산업의 큰 자산

    그동안 우리고장에서는 김환기 화백의 작품 전시회조차도 제대로 개최를 못했다.  현재 서울에 환기 미술관이 별도로 건립되어 있는데, 그곳 관계자들에 따르면 타지역에서는 “김환기 몇 주기 기념행사” 같은 것을 자기 지역에서 유치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데 오히려 이 고장이 배출한 인물임에도 신안이나 목포 쪽에서는 그런 노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문화의 시대니 만큼 문화인물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선양하는 일들이 많아져야겠다. 김환기 화백은 신안의 이미지를 높이고 문화관광을 유도할 수 있는 하늘이 준 소중한 문화자산이기도 하다.


    참고한 자료:

    문화관광부,《2002년 2월의 문화인물 홍보자료》

    오광수, 1997, 《김환기-영원한 망향의 화가》

    도서문화연구소․신안군, 2003, 《자랑스런 신안인 선양 및 신안이미지 제고 방안연구》

    환기미술관, 인터넷 홈페이지 소개내용

    ※ 김환기 화백의 연보 및 예술세계의 자세한 내용은 환기미술관 홈페이지(http://www.hwankimuseum.org)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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