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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산어보를 만든 위대한 유배인 정약전 최성환 2009/8/27 7967


    자산어보를 만든 위대한 유배인 정약전

    최성환(신안문화원 국장)

    정약전(1758~1816)은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천주교 신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서적인 《자산어보》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유명한 다산 정약용의 형이기도 하다. 두 형제는 공교롭게도 모두 서남해권에 유배를 와서 우리고장과 밀접한 인연을 맺었는데, 이번 글에서는 정약전 선생 위주로 소개하겠다.
    정약전의 집안은 당시 국가에서 금지하던 천주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해서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결국 1801년에 정약전은 신안군 흑산도로, 동생인 정약용은 강진으로 보내져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둘 다 천주교를 접했지만 정약용의 경우 학문적인 호기심이 강했다면, 정약전은 신앙적인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더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보내진 것 같다.
    이 유배지의 갈림은 이후 두 사람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다산초당을 짓고, 수많은 저서들을 남길 수 있었던 반면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기 때문에 참고서적도 변변치 못했고, 상대적으로 집필할 만한 기회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섬이라는 특성상 정약전이 남긴 저서들은 후세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었는데 최근에서야 하나 둘 발견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정약전 선생은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면서 약 15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고, 끝내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에는 흑산도와 우이도(예전에는 소흑산도로 불리기도 함)가 같은 권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흑산도 유배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두 곳을 오가면서 생활할 수 있었다. 오늘날 흡사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마을에서 ‘사촌서당’라는 서당을 차리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생활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몇몇 저서들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이 최초의 해양생물서적인 ‘자산어보(玆山魚譜)’라고 할 수 있다. 자산어보에서 ‘자산’이라는 말은 ‘흑산’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자산어보는 흑산도(우이도 포함) 주변의 해양 생태계를 조사하여 약 220여 종의 어류에 대해 설명한 조선시대 해양생물사전인 셈이다. 비늘이 있는 어류와 없는 어류, 개류(패류), 잡류 등으로 체계를 분류하여 소상하게 살피고 있는데, 오늘날의 백과사전과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자산어보는 해양의 중요성이 새롭게 강조되는 근자에 들어 더 높은 가치평가를 받고 있다. 각종 방송매체에서 자산어보와 관련된 다큐멘타리를 제작하고 있고, 자산어보를 재조명한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정약전은 유배를 와서 인지 ‘흑산'이라는 용어가 어감 상 무섭게 느껴져서 대신에 ‘자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최근의 학자들은 자산이 아니라 ‘검다’는 뜻인 ‘현산(玆山)’으로 읽어야 옳다고 보고, ‘현산어보’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개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정약전이 해양생태계에 관심을 갖고 불후의 명작인 자산어보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흑산도로 유배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생활은 어떠했을까? 정약전이 자산어보 같은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흑산도 주민들과의 유대관계가 매우 좋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른 서적이야 책상에 앉아서 참고문헌들을 보면서 저술할 수 있지만, 자산어보는 철저하게 현장에서 어부들이 잡아 올린 물고기들을 보면서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산어보를 읽다보면 정약전이 지역 토박이들에게 물고기의 습성이나 생태에 대해서 소상히 전해듣고서 이 책을 집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산어보는 흑산도민들과 정약전이 함께 만든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고, 정약전은 흑산도가 낳은 위대한 학자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최근에는 자산어보 외에도 정약전과 관련된 새로운 자료들이 발견되고 있다. 정약전이 우이도에 머물던 시절 문순득이라는 사람이 바다에 표류했다가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중국 등을 거쳐서 4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정약전은 그의 표류했던 체험담을 듣고서 표해록을 저술하였다. 이 표해록에는 당시 표해되는 과정과 함께 200여 년 전의 필리핀이나 일본 오키나와 민족들의 언어, 풍속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여겨진다. 또한 당시의 소나무 정책에 대한 정약전의 의견을 담고 있는 ‘송정사의’라는 글도 발견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두 저술은 그동안 구전만 있을 뿐 내용을 알 수 없었는데, 현재 우이도에 살고 있는 문채옥(문순득의 후손)씨가 소장하고 있는 문집의 기록을 통해서 원문의 내용이 밝혀졌다.
    흑산도에는 정약전 선생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유배지였던 흑산도 사리마을 유적지에 정약전 선생이 기거했다는 복성재 서당이 복원되어 있고, 예리마을 선착장 인근에는 자산문화도서관이 건립되어 있다. 또한 신안군에서는 흑산도에 국내 최초로 유배문화공원을 조성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바로 정약전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흑산면 사리마을을 중심으로 조성하는 계획이 추진 중에 있다. 정약전 선생의 숨결이 담겨 있는 흑산도 유배문화공원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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