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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후기 민권운동의 선구자, 김이수 최성환 2008/6/17 8259
# 첨부파일 : 흑산도 김이수 묘(사진 5-15).JPG




    신안의 역사인물


    조선후기 민권운동의 선구자, 김이수(金理守)


    최성환(신안문화원 사무국장)

    신안의 역사인물을 이야기하면 흔히 언급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배인’에 해당된다. 그 중에는 ‘정약전’과 같이 오랜 세월동안 지금의 신안군에서 생활을 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5년 이내의 생활을 하다 섬을 떠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필자는 “진짜 신안의 역사 인물은 누구일까?”를 고민한 적이 있다. 섬에서 태어나고, 섬사람을 위해 살다가, 섬에 뼈를 묻은 그런 인물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김이수(金理守, 1743~1805. 생몰년은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음)’ 선생은 그런 자격을 충분히 갖춘 토박이 신안 사람이다. 현재 흑산도 선착장에 가보면 홍어 모양을 한 거대한 흑산도 연혁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그 뒷면에 새겨진 흑산도의 내력 중에서 ‘김이수’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조차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김이수’는 조선후기 1700년대 중․후반에 지금의 흑산면 대둔도에 살면서, 흑산도를 비롯한 인근 섬 지역 사람들의 민원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이름 난 학자도 아니고, 높은 관직 생활을 했던 정치인도 아니었지만 그의 삶은 조선 후기 민권운동의 선구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의 1791(정조 15)년 5월 22일 기사에는 “흑산도(黑山島) 백성이 닥나무 세금 폐단으로 인한 원통함을 징을 쳐 호소하니, 이를 시정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 기록에서 지칭하는 “흑산도의 백성”이 바로 ‘김이수’이다.

    김이수는 250여 년 전 지금의 흑산면 대둔도에서 살던 평범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불합리한 세금 제도로 도서민의 부담이 가중되어 흑산도를 비롯한 인근 주민들이 참혹한 생활을 겪게 되자, 이를 보다 못해 폐단을 개혁하고자 민중의 대변인이 되어 개혁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의 섬사람들은 가중한 세금 폐단으로 인해 “섬도 섬이 될 수 없고, 백성도 백성이 될 수 없다”며 섬을 버리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처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1767년부터 약 40여 년의 세월동안 섬 주민들의 손과 발이 되어 폐단을 시정코자 노력했으며,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두어 내기도 하였다. 당시 관료들은 ‘김이수’의 활동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미워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오직 민중의 권익을 위해 개혁을 소리 높여 외쳤다.

    ‘김이수’의 활동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1791년 정조 임금의 행차를 가로막고 ‘격쟁(擊錚)’을 올린 일이다. ‘격쟁’은 임금의 행차 길에 징이나 꽹꽈리를 치면서 시선을 집중시킨 후 직접 백성들의 민원을 호소하는 방법이다. 그는 당시 흑산도민들이 겪고 있던 가장 큰 폐단인 ‘닥나무 세금’을 시정하기 위해 관청이나 상부에 소송을 내고 수 차례 시정을 요청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최후의 수단으로 천리만길 한양까지 찾아가 임금에게 직접 개혁을 호소하였다.
    김이수가 한양으로 ‘격쟁’하기 위해 떠나기 전에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듣기가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김이수의 격쟁은 ‘민중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현군(賢君)이었던 정조 임금에게 받아들여져 이에 대한 폐단이 시정되었다. 그 결과 다시 섬으로 되돌아오는 주민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지금이야 청와대 앞에 가서 시위를 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200여 년 전 절해고도로 인식되던 흑산도에서 망망대해를 거쳐 한양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고행의 길이었을 것이다. 바람에 운명을 맡긴 풍선배에 몸을 싣고 오직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는 신념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민권 운동의 선구자다운 면모이다.

    ‘김이수’의 활동약력 중 특이한 점은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를 간행하는 선원록청(璿源錄廳)으로부터 서사랑청(書寫郞廳)이라는 직책을 임명받았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묘비명에서도 확인되는데,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지는 앞으로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김이수’의 존재와 활동사항은 그동안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후손들의 노력으로 ‘김이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12년에 작성된 ‘전기(傳記)’와 관련 기록이 전해옴이 밝혀지면서, 드디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자료들은 단순히 한 개인의 활동상황 만이 아니라 조선후기 사회상과 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것이다. 김이수의 소원(訴冤) 활동은 단순히 폐단의 금지를 요청하는 차원이 아닌 폐단에 대한 시정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김이수’가 개혁운동에 대한 실천가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신안군이 속한 서남해안권은 과거부터 야당성향이 강했고, 근현대에는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고장으로 불리었다. 조선시대 민권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이수’의 존재는 그러한 민주화 운동의 맥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지난 2004년 신안문화원에서는 문중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바탕으로 『국역 김이수 전기』를 발간하였다. 그가 남긴 교훈을 통해 ‘김이수’의 용기와 실천의지를 가진 후손들이 이 땅에 더욱 많아지기를 소원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흑산도에는 ‘김이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작은 기념비조차 세워져 있지 않다. ‘김이수’에 조선 후기 민권운동의 선구자로서 면모를 보여준 ‘김이수’의 행적을 적은 기념비 하나쯤은 건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절해고도(絶海孤島)로 알려진 흑산도에 이러한 역사인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리는 자료가 될 것이며, 신안군의 이미지를 높이는 문화관광자원으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김이수’와 관련된 현존 유적으로는 흑산면 대둔도(수리)에 남아 있는 생가(生家)와 흑산도(이목리 산 38)에 있는 묘소(璿源錄郎廳金公之墓)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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